제76화
몇 시에 잠을 잤건 상관없이 체내 시계는 정확하게 작동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밀레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목을 좌우로 비틀고 어깨를 빙글빙글 돌렸다.
두어 달 동안 푹신한 침대에서 자다가 방바닥에서 자려니 불편하긴 했다.
그래도 뱀이 기어 다니는 풀밭은 아니니까.
가볍게 기지개를 켠 후 이불을 내려다봤다. 습관대로 내버려 두려다가 옅게 미소 지으며 정리했다.
닫힌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골목의 아침은 부산스러웠다.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자기 집 앞을 쓸고 있었다.
작은 새가 처마에서 지저귀고, 스멀스멀 지붕을 타고 내려온 햇빛이 창문을 넘어왔다. 바람은 적당했고, 하늘은 구름 몇 덩이가 떠 있지만 맑았다.
“좋네.”
한 번 더 힘껏 기지개를 켤 때였다. 집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밀레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내렸다.
“안녕하세요.”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집주인을 무시할 순 없었다.
올란트가 현관문을 바라보며 귀 뒤쪽을 긁는다. 가하란이 종종 보여주던 버릇이다.
“잘못 찾아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저희 집 맞죠?”
농담 섞인 질문에 밀레나는 맞아요, 라고 대답했다. 올란트가 집으로 들어왔다.
“허락 없이 댁에서 하루 머물게 됐어요.”
“가하란이 허락했을 테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자리가 불편하진 않던가요?”
“나름 편했어요.”
올란트가 잠시만요, 라고 말하며 작은방 문을 열었다. 밀레나도 따라가 안쪽을 살피려다가 그만두었다. 어린애라고 해도 사생활이 있을 테니.
“녀석, 잘 자고 있네요.”
올란트가 방문을 닫았다.
“아침은 아직이죠?”
“식사는 돌아가서 해결할게요.”
“인사도 없이 가면 제 아들놈이 섭섭해할 겁니다.”
“나중에 또 올게요. 와야 할 이유도 있고.”
밀레나는 한쪽으로 밀어둔 체스판을 바라봤다.
“가하란하고 뒀나 보네요.”
“네. 보통이 아니던데요?”
“나름 괜찮긴 하죠.”
나름? 밀레나는 단어가 잘못 사용됐다고 생각했다. 가하란의 수준은 ‘나름’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었다.
잠깐만, 어제 나눴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가하란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아빠한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고.
“올란트 씨. 아니, 아저씨.”
“호칭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두 번째 뵙는 손님이니.”
“아저씨라 부를게요. 가하란이 아저씨한테 체스를 배웠다고 했어요.”
“기본적인 걸 잡아주긴 했죠.”
“가하란하고 제대로 대국해 봤나요?”
“대국이랄 것도 없습니다. 놀이로 즐길 뿐이니까요. 머리를 식히는 데 체스만 한 것도 없거든요.”
머리를 식힌다. 대공이 체스보드 앞에서 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시간 괜찮으세요?”
밀레나는 체스판을 힐긋 보며 말했다.
“예. 괜찮습니다.”
“그러면 한 게임만 해요. 괜찮죠?”
대답을 잠시 미루던 올란트가 체스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바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있어서요. 우리 아들놈 밥 해줘야 하거든요.”
체스판이 테이블 위로 올랐다. 기우뚱거리며 넘어간 기물을 올란트가 다시 세웠다.
“이걸 마무리하는 걸로 하죠.”
“저야 상관은 없지만, 괜찮겠어요?”
흑이 불리한 형국이었다. 게다가 올란트가 이끌어온 게임이 아니라 흐름을 잡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정도면 별문제 없습니다.”
“만약 아저씨가 지게 되면 나랑 한 게임 더 해야 해요.”
“갑자기 조건이 붙었네요.”
“온전한 대국을 하고 싶거든요.”
올란트가 보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봉수 같은 건 없을 테니, 제가 이어서 두면 될까요?”
“네. 근데 좀 더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림이 대강 그려졌으니 장고할 필요는 없죠.”
흑색 비숍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밀레나가 새로운 대국 상대의 첫수를 눈여겨볼 때였다.
“아침이니 가볍게 불렛룰로 진행하는 게 어떻습니까?”
올란트가 말했다.
불렛룰. 30초 단위로 말을 움직여야 하는 게임 방식이었다.
수 싸움을 오래 할 수 없어서 친선전에서나 가볍게 즐기는 용도로 사용되는 룰.
“나쁘지 않네요. 나도 불렛룰은 자신 있거든요.”
정식 룰로는 단 한 번도 준 공을 이겨본 적 없지만, 불렛룰로는 딱 한 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마저도 대공이 차를 마시느라 시간을 허비해서 그렇게 된 거지만.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였다.
밀레나가 퀸을 이동시키고 손가락을 뗄 때였다. 올란트의 손이 움직였다. 수읽기가 필요 없다는 듯이 기물의 위치를 바꾸었다.
밀레나는 눈을 씰룩였다. 아무리 불렛룰이라지만 상대의 의도 정도는 파악해야 했다.
설마 대충 끝내려는 생각인 건가?
“두시죠.”
올란트가 말했다. 눈빛이 담담했다. 귀찮아하거나 자리를 피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담백하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밀레나가 손을 움직였다. 큰 흐름에 따라 기물을 옮겼다.
이번에도 체스판에서 손이 멀어지자마자, 올란트가 다음 수를 뒀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가짐은 아닌 거죠?”
“전 이기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들놈이 뚱한 표정을 지어도 절대 봐주지 않죠.”
몇 마디 오가고 다시 경기는 계속 진행됐다.
막힘없이 뻗어나가던 손이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밀레나는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게 왜 이렇게 됐지?
불렛룰이라고 한들 어제에 이은 대국이었다. 머릿속에 확고한 전략이 자리를 잡았고, 승리를 위한 전술도 계획해 두었다.
다섯 수 전까지는 생각한 대로 게임이 진행됐다. 분명 그랬다.
근데 왜?
“10초 전입니다.”
올란트가 말했다. 사고의 흐름이 뚝 끊겼다. 밀레나는 서둘러 수를 뒀다. 재미 삼아 두는 체스라지만 룰을 어길 순 없었다.
검토를 충분히 못 했던 단 한 번의 수.
게임을 벼랑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수였다.
밀레나는 몇 번 더 응수해 봤지만 결국 막다른 길에 도달하고 말했다.
훤히 보이는 체크메이트였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었다. 밀레나는 상대가 체크를 외치기 전에 킹을 꺾었다.
체스판에 누운 킹을 보며 작게 말했다.
“졌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올란트가 체스판을 정리했다. 밀레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물을 바라봤다. 제대로 둔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저기, 아저씨.”
“아침 드시고 가세요.”
“네?”
“아침 드시고, 한 번 더 둬요. 그걸 원하시는 거죠?”
속마음을 읽혔다. 뜨끔해서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지만, 이내 당당하게 말했다.
“맞아요. 정식 룰로 한 번만 더 부탁할게요.”
“부탁까지야. 놀이는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 즐거운 법이죠. 앉아 계세요. 금방 준비할 테니.”
밀레나는 의자에 앉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요리 중인 올란트를 바라봤다.
과감한 결정과 빈틈없는 전술.
체스판을 가져와 조금 전 대국을 복기했다. 하나하나 수를 둬가며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올란트가 빠르게 결정한 수 하나하나가 그 판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음을.
순식간에 진행된 탓에 게임 당시에는 못 느꼈지만, 이렇게 찬찬히 되짚어보니 아주 익숙한 기풍이 엿보였다.
“에이, 설마.”
가하란에게서 대공의 그림자를 봤다면, 방금 올란트의 수는 대공과 견주어도 될법한 수였다.
“아저씨.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이 비법 소스에 관한 거라면 알려드릴 수 없어요.”
올란트가 유리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건 안 궁금해요.”
“정말요? 주변에서 이거 알려달라고 난리였는데. 그러면 뭐가 궁금한가요?”
밀레나는 작은방을 슬쩍 바라봤다. 아직 자는 거 같으니 괜찮겠지.
“대답하기 어렵다면 답하지 않아도 돼요.”
“서두에 그런 말을 붙이는 질문은 대개 대답하기 어려운 법이죠. 그래도 아가씨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답해볼게요.”
올란트가 음식이 담긴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이어서 말했다.
“아들놈과 친구가 되어 주셨으니.”
밀레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제 착각일 수도 있지만, 아저씨는 준 공께 체스를 배운 적이 있는 거죠?”
“…준 대공.”
올란트가 빙긋 웃더니 작은방으로 걸아갔다.
“아들, 일어나야지. 아빠랑 밥 먹자. 누나도 기다리고 있어.”
문을 두들기며 말한 올란트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밀레나는 올란트의 입을 바라봤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까는 아가씨께서 조건을 거셨으니, 저도 조건을 하나 걸죠. 다음 대국에서 절 이긴다면 질문에 답해드리죠.”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안녕?”
가하란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밀레나는 의자를 가리킨 다음 눈짓을 했다.
얼른 먹고, 체스를 둬야 했다.
* * *
“거긴 어때?”
“어떻겠어. 다 뒤집혔지. 재작년 보관 서류부터 싹 다 훑는 중이야. 그뿐이야? 최근 업무차 작성한 것들도 죄다 가져갔어. 그 와중에 서식이 다르다고 잔소리하더라.”
“대비했어도 당하는 건 변함없네.”
유렐은 행정처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위로를 담아 커피를 건넸다.
“‘특수감찰단’. 내가 살면서 그놈들한테 조사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잘 수습해 놨으니까 큰일은 없겠지.”
유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흘 전 승냥이 무리가 둔에 도착했다. 황가와 의회의 표식을 앞세우며 당당히 둔에 입성한 그들은 검문소부터 차례대로 점검에 들어갔다.
검문소장이 신물을 토해내며 쓰러졌다는 소문이 어제 들려왔다. 얼마나 호된 일을 당한 걸까.
“군부 쪽은 어때?”
친구가 물었다.
“우린 아직. 관리국 쪽으로 인원이 대거 투입됐으니, 그쪽 마무리되면 우리 차례겠지.”
“행정처는 중간에 껴서 괜히 피 보는군.”
“그래도 행정처는 얌전히 지나갈 거야. 왈즈였던가? 부처장 말이야. 일 처리가 깔끔하다고 소문났으니.”
“차기 처장으로 거론될 만큼, 그 양반 수완이 좋긴 하지. 우리 부서도 그 양반 덕을 좀 봐야 할텐데.”
친구가 커피를 쭉 들이켠 다음 일어섰다.
“이만 가볼게. 나도 자리를 지켜야 하거든. 처장이 수시로 호출해서 골치 아파.”
“그래, 욕봐.”
유렐은 문을 열고 나가는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감찰단장은 만나봤나?”
“감찰단장? 아니. 아직 코빼기도 안 보여. 검문소 말로는 감찰팀하고 같이 온 게 아니라 미리 둔에 들어와 있었대.”
“그 인간도 참 별나.”
“그러니까 황가와 의회, 두 곳과 척지지. 제정신이 아니야.”
방문이 닫혔다.
유렐은 제복을 갖춰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손님맞이를 준비해야 하므로.
회중시계를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앉아있던 부관이 옆에 따라붙었다.
“부장님.”
“뭔가?”
“독립2군 소속 이등 중사 헌트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내일 점심에 보자고 하게.”
“알겠습니다.”
“사령관실에서는 따로 내려온 얘기 없나?”
“예.”
부관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취조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걸음을 옮겼다.
“그놈 상태는?”
“변함없습니다.”
“지독하군. 신념이란 게 이토록 무서워.”
취조실 문이 열렸다. 쇠 갈리는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점검하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쯧, 혀를 찬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총집사께서 오후 2시에 방문 예정입니다.”
“그분도 꾸준하군. 오시면 나한테 먼저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취조실 앞을 지키고 선 경비병에게 눈짓했다. 이중잠금쇠가 열리며 지긋지긋한 범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반갑다는 인사도 이젠 질릴 때가 됐지?”
유렐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