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체크.”
킹이 몰렸다. 가하란은 수를 생각해 보다가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패배를 인정했다.
이걸로 4전 4패.
처음 두 경기는 30분 만에 끝났는데, 다음 두 경기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한 게임 더 두자.”
밀레나가 기물을 정리했다. 가하란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누나, 나 졸려.”
“어?”
고개를 번쩍 든 밀레나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가하란은 밀려드는 잠을 털어내며 살짝 웃었다.
“근데 누나, 집에 갈 수 있겠어?”
한밤중이었다. 경비대도 돌아다닐 시간이고. 밀레나는 귀족이라 검문에 걸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밤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했다.
“천천히 걸어가면 돼.”
“둔이라고 해도 밤길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괜찮아.”
가하란은 창문을 보았다. 촛불의 주홍빛이 창가에서 어른거릴 뿐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빛 한 점 없는 골목. 친절하고 온화한 이웃들만 있는 골목이지만 때때로 사고가 터지곤 했다.
“누나. 자고 가면 안 돼?”
“여기서?”
“이불 남는 거 있어. 아니면 누나가 내 침대 써도 돼. 내가 툴하고 거실에서 잘게.”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밀레나가 검지로 턱을 톡톡 건드렸다.
“내일 일정이 있는 건 아니니까.”
가하란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이불을 가져올 것이다.
테리와 제니가 와서 자고 간 적은 많지만, 두 친구 외에 이 집에서 머물다 가는 사람은 밀레나가 처음이었다.
괜스레 신이 났다.
“잠은 내가 여기서 잘게. 네가 침대 써.”
“불편할 텐데.”
“언 땅에서도 잘만 잤어. 이 정도면 호사 부리는 거야.”
손님용 이불을 가져왔다. 바닥에 깔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넬 때였다.
“가하란. 너 많이 졸려?”
밀레나가 물었다.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잠이 확 달아났다. 가하란은 아니, 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체스 한 게임만 더 두자. 어때?”
“체스 두려고 집에 안 간 거였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그러니까 한 판만 더 두자. 너도 재미있잖아, 안 그래?”
늦게 자면 아빠한테 한 소리 듣겠지만, 오늘은 아빠가 없으니까 괜찮겠지?
게다가 거절하면 밀레나가 실망할 것 같았다.
“좋아. 근데 다른 얘기도 하면서 체스 둬도 돼?”
“얼마든지!”
밀레나가 체스판을 들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에 앉아서 두는 것보단 이게 더 편하니까.”
기물 정리를 끝낸 밀레나가 반쯤 누웠다. 가하란은 방에서 베개를 가져와 끌어안았다.
“난 체스를 네 살 때부터 배웠어. 아니, 배웠다기보다 놀이로 삼았지.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은 건 여섯 살 때부터니까.”
“네 살 때부터? 누나는 천재였구나.”
폰을 움직이던 밀레나가 눈을 갸름하게 뜨며 가하란을 봤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속이 조금 상하네.”
“왜?”
“체스를 배운 지 한 달도 안 된 애한테 수 싸움을 읽혔으니까. 난 천재는 아니야. 하지만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지.”
“난 잘 모르겠어. 아빠랑 둘 때는 계속 지기만 했거든. 안소니 아저씨도 못 이겼고.”
가하란은 밀레나를 흘깃 바라봤다.
“지금도 누나한테 지고 있잖아.”
“지금이야 지겠지. 하지만 몇 판 더 두고 나면 달라질 거야.”
밀레나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너랑 첫 판 둘 때는 할 만했어. 오랫동안 계산하지 않은 수로도 실익을 가져왔으니까. 두 번째 판도 마찬가지고. 근데 세 번째부터 달라졌어. 너도 알고 있잖아.”
가하란은 나이트로 폰을 거둬낸 뒤에 말했다.
“그건 누나가 어떻게 두는지 봤으니까.”
“본다고 해서 바로 기풍이 달라진다면 누구나 다 체스마스터가 됐을 거야.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고, 이해한 것을 적용하는 것 또한 다른 일이야.”
공세가 매서워졌다. 가하란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체스 보드 위에서 기물들이 재빠르게 자리를 이동했다.
d5, Nh4. 아니, 이건 위험한가?
어설픈 진행을 치워버리고 다시 재정렬했다.
이동, 수정, 재조정.
손이 움직인 건 머릿속에서 날뛰던 기물이 제자리를 찾은 다음이었다.
비숍을 생각한 위치에 놓고 손을 뗐다. 좋은 수인지, 나쁜 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체스판에서 눈을 떼고 밀레나를 보았다. 밀레나가 예리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보고 있었다.
“거봐. 또 달라졌잖아.”
“내가 달라졌어?”
“두 판 전의 너라면 분명 이렇게 뒀을 거야.”
밀레나가 손을 움직였다. 방금 움직였던 비숍 대신 룩을 왼쪽으로 밀었다.
“어때?”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나와 체스를 두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움직였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룩 대신 비숍을 움직인 거니까.
“읽힌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그게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받아. 나한테 밀려났던 애들도 이런 기분을 맛봤겠지?”
밀레나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눈빛이었다. 진중하면서도 섬뜩하다.
“쉽게 지진 않을 거야. 네가 이해했듯, 나도 널 이해해볼 거거든.”
퀸이 움직였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진행이었다. 누나는 퀸을 전면에 내세우는 걸 싫어했는데.
“답습하면 깨지기 마련이지. 근데 좀 아깝네. 이건 대공과 대국할 때 선보이려고 아껴둔 수인데.”
밀레나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여유가 없었다. 퀸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를 점검해야 했다.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게임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모호함, 그 혼란이 가하란은 즐거웠다.
“누나. 조금만 생각할게.”
“너도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구나.”
“응?”
“아니야, 집중해. 난 얼마든지 기다려줄 테니까.”
가하란은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흰색과 검은색이 얽혀 만들어진 조용한 전장. 피를 흘리지 않는 병사와 장수들을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고민은 길었지만, 결과물은 명쾌했다. 가하란은 주저 없이 퀸에 손을 댔다.
* * *
꼬마애. 웃음이 나올 정도로 순박한 꼬마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야 할 단어가 생겼다. 집념, 투지, 그리고 싸움꾼의 기질.
밀레나는 가하란의 눈을 보았다. 탁한 하늘색 눈동자가 체스 보드를 훑고 있었다.
마냥 유순해 보이던 눈빛이 지금은 실전을 앞둔 생도처럼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빛났다.
저 머릿속에는 어떤 괴물이 사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여섯 판.
게임 여섯 번 만에 수를 완전히 읽히고 있었다.
‘무서운 체스 기사는 게임이 아닌 보드 너머의 사람을 볼 줄 아는 기사다.’
준 공이 해준 말이었다.
대공과 가하란을 비교하는 건 코웃음 나오는 일이었다. 가하란의 뛰어난 재능도 준 공 앞에서는 빛을 잃을 것이다.
그분의 체스는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몇십 수, 아니, 몇백 수를 내다보는 듯한 말도 안 되는 대국을 겪고 나면 남는 건 불가해를 향한 찬양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하란의 수 싸움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대공의 그림자가 보였다.
밀레나는 발칙한 생각을 해봤다.
기풍이 인간의 껍데기를 벗어나 하늘에 닿았다는 대공의 수를, 가하란은 읽어낼 수 있을까?
안 될 것이다. 머리는 분명 그렇게 결론 내렸다. 하지만 가슴 한쪽에서 이런 불경한 마음도 생겨난다.
어쩌면 대공의 전략을 야금야금 따라잡아 기어코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가지 않을까?
“가하란.”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밀레나는 손가락을 뻗어 가하란의 무릎을 건드렸다.
“어, 누나. 왜?”
가하란이 잠에서 깬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너 말이야, 제대로 체스를 배워보지 않을래? 둔이 아니라 성도로 가서 체스연맹에 등록하는 거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할게. 지금은 이렇게 노는 것만으로도 좋거든.”
“노는 게 아니라 네 인생을 바꿀 수도 있어. 농담 아니야. 나 진짜 진지해.”
원한다면 대공과 자리를 마련해 볼 수도 있어,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켰다.
대공을 끌어들이는 건 욕심이었다. 부탁하면 들어주실 분이지만, 바쁜 분을 귀찮게 할 수는 없으니.
“꿈은 많을수록 좋다고 아빠가 말했어. 그래서 난 꿈이 많아. 할아버지처럼 미개척지에 가보고 싶고, 힘들겠지만 하늘석에 용이 사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어. 체스마스터가 되는 것도 분명 멋있는 일이고.”
가하란이 폰에 손을 댔다.
“하지만 다른 꿈을 이루기 전에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어.”
밀레나는 시선을 옮겼다. 거실 서랍장 위를 장식하고 있는 거병 모형.
“거병 기술자?”
“응.”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건 달라.”
“그래도 난 하고 싶어.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가하란이 다음 수를 뒀다.
세로줄의 모든 기물을 치워내며 전진하는 폰. 중반부부터 프로모션을 계획하는 도발적인 수였다.
체스를 잘 두는 것과 기술에 해박한 건 별개의 것이었다.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돼 있는데, 그걸 내버려 두고 다른 곳을 개간하는 건 아깝지 않은가?
당연한 사실인데 말갛게 웃고 있는 가하란을 보고 있으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꿈은 이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계속 꾸는 게 중요하대.”
“아닐걸?”
“나도 아빠한테 들은 말이라 다 이해한 건 아니야. 그래도 난 그 말이 좋아. 그러니까 나는 해볼 거야.”
가하란이 기물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밀레나는 손바닥에 볼을 기댄 채 앞에 있는 꼬마를 바라봤다.
아주 조금, 정말 진짜 아주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미뤄도 되는 건 타협뿐이래.”
“그것도 너희 아버지가 해준 말이야?”
“아니. 이건 엄마가 남겨준 말이야. 목소리로 직접 전해 들은 건 아니지만.”
“멋있네, 너희 어머니도.”
밀레나는 베개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감상은 감상이고 게임은 게임이었다.
읽혔다고 해서 지는 건 아니었다.
변칙, 교란, 회피. 가용한 모든 수단을 써서 흑백의 전장에서 승리할 것이다.
“적어도 오늘내일 동안은 한 판도 안 질 거야.”
“맞아. 난 누나한테 못 이길 거야.”
“겸손도 지나치면 교만이란 말, 꼭 기억해둬.”
밀레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내민 후 바람을 불렀다. 앞 머리카락이 살짝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자.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근데 누나.”
가하란이 목소리를 냈다. 체스판에서 눈을 떼고 가하란을 바라봤다.
“나 졸려.”
눈을 비비며 크게 하품하는 가하란이었다. 들끓던 전의가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밀레나는 입을 가리며 크게 웃었다. 자야 할 애를 붙잡고 뭐 하고 있었던 거지?
“들어가서 자.”
“이번 게임은 끝내고 잘게.”
“됐어. 너 눈빛이 아까랑 완전히 달라. 흐리멍덩해. 지금 둬봤자 의미 없어.”
잠깐 버티던 가하란이 비틀비틀 일어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기 전 가하란이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누나, 잘 자.”
“그래.”
방문이 닫혔다.
밀레나는 체스판을 정리하려다가 가만히 내버려 뒀다. 아침에 다시 한번 살펴볼 것이다. 꽤 흥미로운 대국이었으니까.
켜놓은 촛불들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낯선 집이건만, 기이할 정도로 편했다.
생각해 보니 좀 웃기네. 예정도 없이 자고 가다니. 밀레나는 옆으로 누우며 조용히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