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74화 (47/558)

제74화

“빈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지키지 않을 말은 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잼이 입에 맞았거든요.”

“다음번엔 살구로 잼을 만들 거예요. 그때도 생각나면 찾아와요. 이런 건 안 들고 와도 되니까.”

룽네가 선물 가방을 흔들며 말했다.

“빈손으로 선물을 받아 가는 건 예의가 아니에요.”

밀레나는 병에 담긴 잼을 보며 말했다. 찌그러지고 기포가 여기저기 생긴 유리병이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가하란을 보고 갈 건가요?”

룽네가 맞은편에 있는 가하란 집을 보며 물었다. 밀레나는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온 김에 보고 가야죠.”

아프다고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 같이 와요. 다른 건 몰라도 밥은 대접할 수 있으니까.”

“그럴게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잼이 든 가방을 들고 가하란 집으로 향했다.

오후 6시.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면 이동 제한이 걸릴 것이다. 보안 단계가 낮아졌다고는 하나 시민을 대상으로 한 통제는 유지되고 있었다.

올란트는 돌아오지 않는 걸까. 보모도, 종자도, 하인도 없는 이 휑한 집에 어린 아들만 남겨두다니.

시민의 삶은 다 이런 걸까? 아니면 올란트의 배짱이 대단한 걸까?

몰락한 귀족이라면 풍족한 삶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을 텐데, 이 집을 보고 있으면 그런 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올란트는 시민이 사는 방식에 완전히 녹아든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의 집안 사정에 관심을 두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도 없다지만, 첼 총집사가 연관돼 있다고 생각하니 잡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약간 시큼한 향도 섞여 있다.

걸음을 재촉해 거실로 들어선 다음 주방을 바라봤다. 바닥에 설치된 화구 앞에 가하란이 있었다. 바글바글 끓는 스튜를 멀거니 보다가 가하란에게 시선을 옮겼다.

“말 진짜 안 듣는구나. 누워 있으라니까.”

“이것만 하고.”

잼을 식탁에 올려두고 곁으로 걸어갔다.

“요리도 할 줄 알아?”

“밥은 챙겨 먹어야 하니까.”

국자로 휘휘 젓자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채소들이 잠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냄새가 제법 좋았다.

“누나, 밥 안 먹었지?”

“안 먹긴 했지.”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에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뜯어말려도 기어 나와서 요리를 끝낼 것 같으니 내버려 두는 수밖에.

게다가 안색도 좋아졌다. 시름시름 앓고 있었으면 목덜미를 잡아다가 침대에 던져놨을 것이다.

가하란이 오목한 나무 그릇에 스튜를 떠서 따로 보관했다.

“그건 왜?”

“아빠 거. 오늘은 안 들어오실 거 같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평소에도 네가 다 해? 지난번에 왔을 때도 네가 챙겼잖아.”

“아니. 가끔 아빠를 도울 뿐이야. 만들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어.”

눈앞에 스튜가 놓였다. 고기는 안 보이지만 기름기가 떠 있었다. 지방으로 채소를 볶아낸 건가? 가축의 지방만 따로 보관해 요리 때 쓴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가하란이 마른 빵을 내왔다. 한 접시에 담겨 있었다. 개인 접시를 바라는 건 사치일 테니, 군소리 없이 빵을 집어 먹었다.

표면은 말랐고 안은 질겼다. 보름간 이어진 생존 훈련 때 먹었던 건빵과 비슷했다.

스튜에 푹 담가 먹으니 그나마 나았다.

“어때?”

가하란이 웃으면서 물었다. 별로야, 라는 말이 혀끝에 살짝 올랐다.

“나름 괜찮네.”

극적으로 타협해서 말을 바꿨다. 솔직한 게 좋다고는 하나 저렇게 웃는 애 앞에서 맛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난 맛없는데. 누나는 진짜 다 잘 먹는구나?”

가하란이 짓던 해맑은 웃음에 장난기가 섞인다.

밀레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장난칠 기운이 있는 걸 보면 괜찮은 것 같긴 하네.”

“이제 다 나았어.”

밀레나는 스튜를 한 숟가락 떠먹은 후 질문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쓰러진 건지, 그 거북이는 뭔지 설명해 줬으면 하는데.”

가하란이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곤란해하는 얼굴이다.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할 수 없는 거면 됐어. 정령과의 관계는 은밀한 거라 다 밝힐 수 없다고 들었으니까. 아팠던 것도 정령 때문인 것 같고.”

궁금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간섭할 권한이 없으니까. 조금 아쉽기는 해도 상대가 거리를 두는데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긴 싫었다.

“누나.”

“왜?”

“많이 궁금해?”

“궁금하지. 사람 체온이 그렇게 급변하는 건 흔치 않으니까. 그 말하는 정령도 그렇고. 하지만 내 호기심이 네가 말하지 않을 권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말하지 않을 권리는 중요하다.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물론 같이 어울리는 귀족 친구들은 이 얘기를 들으면 어이없어할 테지만.

“누난 귀족이잖아.”

“귀족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걸 망각하고 시민을 박대하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가하란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팠던 건 열병 때문이야.”

열병? 감기 같은 건가? 생소한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다가 가하란을 응시했다.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어. 비밀로 한다고 해서 불편해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어. 우린 친구니까.”

“친구라고 해도 감춰야 할 게 있는 법이야.”

“그것도 알아. 근데 누나한테는 말해주고 싶어. 날 구해준 사람한테 다 감춰버리면, 너무 섭섭한 일이잖아.”

“구해준 사람? 말이 너무 거창해. 난 그냥 쓰러진 널 발견하고 침대에 옮겼을 뿐이야. 널 도와준 건 그 이상한 정령일 거고.”

가하란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누나가 날 잡아줬어.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

그렇게 서두를 뗀 가하란은 스튜가 식을 때까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수많은 정령, 그 정령들이 사는 안원, 고약한 정령에게 끌려갈 뻔한 것과 휩쓸려 사라질 뻔한 걸 어떤 손이 붙잡아 줬다는 것까지.

그 손의 주인이 나였다는 것도.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았다.

정령세계.

들어본 적은 있었다.

뛰어난 정령술사는 정령들이 사는 세계로 초대받는다고 했다. 초대받지 못한 정령술사가 그곳에 가면 폐인이 된다고 했던가?

정령과 오랫동안 교감한 베테랑들조차 정령세계에 발을 디딘 경우가 드문데, 이 꼬마는 두 번이나 정령세계에 다녀왔다고 했다.

웃어넘겨도 되는 거짓말.

가하란이 아닌 다른 애가 말했다면 분명 무시했을 것이다.

“거짓말하는 건 아니야.”

가하란이 말했다. 밀레나는 식탁에 팔꿈치를 댄 다음 턱을 괴었다.

“믿어. 말만 들었으면 모를까, 본 것도 있고. 근데 열병이란 건 뭐야?”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위대한 영령을 만나고 오면 아프게 된대.”

“위대한 영령?”

이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정령에도 급이 있던가?

“그 거북이가 위대한 정령이야?”

“아마도.”

“위대해 보이진 않던데.”

위대하기보단 좀 맹하게 생긴 거북이었다.

“나도 모르는 게 많아서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는데, 그 아저씨는 내 말을 잘 안 들어.”

“까칠해 보이긴 하더라. 나한테도 큰일 아니니 신경 쓸 거 없다고 했고.”

가하란이 스튜를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랑 얘기해 봤어?”

“얘기까진 아니고, 그냥 널 내버려 두라는 말만 들었어.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밀레나는 팔짱을 꼈다. 경황이 없다고 한들, 갑자기 솟아난 정령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었다. 평소였다면 조목조목 따져보고 반박했을 텐데, 왜 순순히 따랐지?

돌이켜 보니 어떤 중압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둥실 떠다니는 거북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위대한 영령이라.

“그… 거북분, 지금도 불러낼 수 있어?”

호칭이 애매해졌다. 거북이라 계속 부르면 훗날 후회할 것 같아 재빨리 ‘분’을 붙였다. 붙이고 나니 좀 웃기긴 하지만.

“아저씨.”

가하란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는 오른쪽 위를 가리켰다.

“여기.”

“어?”

밀레나는 가하란이 가리킨 공간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있잖아.”

“있다고? 난 안 보이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북이 형태를 드러냈다. 다시 봐도 그냥 거북이었다.

“안녕하세요. 아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먼저 말을 걸었다. 빤히 쳐다보던 거북이 그대로 사라졌다.

“원래 저런 분이셔. 마음에 안 내키면 아무 말도 안 해.”

“까칠하시네.”

“그래도 나쁜 정령은 아니야. 아저씨는 날 지켜주고 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고.”

떠들다 보니 스튜가 미지근해졌다. 먹기 힘들어지기 전에 서둘러 숟가락을 움직였다.

“남겨도 돼.”

“차려진 음식은 감사히 다 먹는다. 우리 집안 가훈 중 하나야.”

“정말?”

“농담 같지?”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다. 룽네 집에서 본 대로 직접 치우려 했으나, 가하란이 먼저 움직였다.

“잘 먹었어.”

자그마한 몸으로 바지런히 움직이는 가하란을 지켜보다가 거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서랍장 위에 반가운 물건이 있었다.

“체스 보드네. 저번에는 없었던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아빠한테 배웠어. 누나도 체스 둘 줄 알아?”

“둘 줄 아냐고? 널 가르쳐줄 수도 있어.”

“진짜? 그러면 나 알려줘.”

밀레나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후 7시.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하지만….

시계에서 눈을 떼고 현관 쪽을 보았다. 가하란 말대로 올란트는 오늘 안 돌아올 생각인가?

“그래. 알려줄게.”

시민과 달리 통금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일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괜찮아졌다고는 하나 아팠던 애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신경 쓰였다.

정리를 마친 가하란이 거실로 걸어왔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 보고 나서 뭘 알려줄지 결정할게.”

아마도 기초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기본으로 로얄 갬빗, 다룬, 엑셉트 디펜스 정도면 되겠지.

“잘 모르니까 많이 알려줘.”

가하란이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폰을 쥐었다.

* * *

가하란은 졸린 눈을 비볐다. 하품이 계속 입을 비집고 나왔다.

“저기, 누나.”

심각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보던 밀레나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눈빛을 보자마자 잠이 확 달아났다.

“혹시 시간 제한 있는 거야?”

밀레나가 말했다. 가하란은 도리질을 쳤다.

“그러면 조금만 더 기다려봐.”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대며 다시 생각에 잠기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거실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마나 보충이 잘못돼 고장이 난 게 아니라면, 지금은 자정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 건 1년에 몇 번 없었다.

“가하란.”

“응?”

“체스 배운 지 얼마 안 된 거 맞지?”

“어.”

뭔가 잘못된 걸까?

그때 밀레나가 기물을 움직였다. 가하란은 잠시 보드를 바라보다가 룩을 옮겼다.

또다시 말없는 대국이 이어졌다.

누나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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