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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73화 (46/558)

제73화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살갗은 차가우나 몸 안쪽 깊숙한 곳에선 열이 들끓는 느낌. 한번 겪어봐서 알고 있는 증상이었다.

가하란은 가냘픈 숨을 안으로 집어삼키며 현관문을 열었다. 여관에서 출발했을 때는 멀쩡했는데, 산페르의 말을 듣고 난 후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

열병. 타챠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영령을 만난 영향이라고.

룽네 아줌마를 찾아갈까?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줌마를 찾아가 아프다고 말하면, 아빠가 알게 된다.

아빠는 최근 무척이나 바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빠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시간을 빼앗을 수 없었다. 아프다고 말하면 아빠는 일을 미룬 채 침대 옆을 지킬 테니까.

“…툴.”

힘을 짜내 불렀다. 작은방 방문이 삐거덕 열리며 툴이 나왔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천진하게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불러놓고 나니 깨닫게 된다. 쟤가 날 도울 수는 없겠구나.

다가온 툴이 몸을 낮췄다. 턱을 바닥에 깔고 빤히 바라본다. 가하란은 웃음을 짜내며 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좀 잘게.”

추위와 더위가 몸 안에서 넘실거렸다. 가하란은 몸을 웅크리며 양팔을 부여잡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밀려드는 피로감에 몸을 맡겼다.

컹컹, 툴이 주변을 뛰어다니며 짖었다.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말해주고 싶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희미해져 가는 시야 사이로 뛰쳐나가는 툴이 보였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 * *

가하란은 밑을 내려다보았다. 메마른 땅이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땅은 금방이라도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질 것 같았다.

어디지? 몽롱한 정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른쪽에서 파도가 치고 있었다. 눈과 불로 이루어진 파고였다.

왼쪽에는 검은 안개가 잔뜩 끼어 있는데, 그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아니,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층층이 쌓인 하늘은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정령세계.

안원(安原).

또다시 휩쓸려 온 것일까?

가하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억이 흐릿했다.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됐지?

“집에 갔었어. 아니, 여관에 있었나? 그리고 체스는 누구랑 뒀었지?”

기억이 이어지지 않았다. 스푼으로 퍼먹은 푸딩처럼, 기억이 군데군데 사라진 상태였다.

“가자.”

가하란은 고개를 내렸다. 손바닥보다 작은 사슴이 저 먼 곳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어딜요?”

“네가 가고 싶은 곳. 너, 저기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지 않아?”

사슴이 앞발로 가리킨 곳. 수많은 정령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우린 네 얘기가 듣고 싶을 뿐이야.”

“제 얘기요?”

“그래. 기왕 온 김에 우리하고 놀자.”

사슴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가하란은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 높이 오른 사슴이 커다란 날개를 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하란은 넋을 보고 바라보다가 한 걸음 뗐다. 신비한 곳. 호기심을 자극하는 세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사슴을 쫓아갈 때였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하란은 우뚝 멈춰 섰다. 날아가던 사슴이 말했다.

“서두르는 게 좋아.”

“잠깐만요!”

“얼른 오라니까.”

가고 싶었다. 두려우면서도 아름다운 저 세계에 한 발 들이밀고 싶었다. 하지만 가하란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아빠와 약속해 줬으면 해. 두 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이 났다. 어떻게 아빠 목소리를 잊고 있었지? 가하란은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꽉 꼬집었다.

통증은 없지만, 그 행동만으로도 많은 것이 떠올랐다.

“안 올 거야?”

하늘 위 사슴이 물었다.

“가고 싶은데 지금은 갈 수 없어요. 아빠하고 약속했거든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그래? 근데 난 널 데려가고 싶은데.”

사슴이 날개를 휘저었다. 버틸 수 없는 강렬한 바람에 몸이 붕 떠올랐다.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잡아 보려 했으나, 떠오른 몸은 바람에 실려 나아갈 뿐이었다.

“전 돌아가야 해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우린 심심하거든. 오랜만에 찾아온 ‘눈이 뜨인 자’를 그냥 돌려보내는 건 아쉽잖아?”

정령들이 모인 곳으로 몸이 나아갔다. 몸이 뒤집히면서 시야도 역전됐다.

가하란은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가 하나씩, 하나씩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그게 기억이란 걸 눈치챘을 때는 같이 사는 개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이루는 것들이 사라져간다.

가하란은 저 멀리 보이는 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손에 힘을 줬다.

그때였다. 메마른 땅이 갈라지더니 물이 솟구쳤다.

드높던 하늘이 물줄기에 가려졌다. 끝 모르고 펼쳐졌던 땅이 물로 뒤덮였다.

날개를 저으며 나아가던 사슴이 비명을 질렀다. 노도에 휩쓸린 사슴이 날개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가하란도 추락했다. 거친 물살을 향해 일직선으로 꼬꾸라졌다.

수면에 맞닿기 직전, 누군가가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하란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고개를 들었다.

누가 붙잡아 준 거지?

그 순간 세상을 뒤덮었던 물이 가하란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몸을 맡겨도 된다는 안정감을 느끼며, 가하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눈이 번쩍 떠졌다.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집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었다. 정령세계로 휩쓸려 가지 않았다.

가하란은 안심하며 숨을 고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거실에서 쓰러졌을 텐데?

여긴 작은방, 그리고 침대 위였다. 어떻게 된 거지? 아빠가 집에 와서 날 본 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오른팔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온기도 느껴졌다.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침대 머리맡에 있었다.

가하란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빠끔 내민 툴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오른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손목을 붙잡아 주고 있던 작은 손이 침대로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손의 주인이 눈을 떴다.

“뭐야, 이제 괜찮은 거야?”

작게 하품하며 눈가를 매만지는 밀레나였다.

“누나가 여길 어떻게….”

밀레나가 옆으로 다가온 툴을 껴안았다.

“이쪽으로 오는 길이었는데, 얘가 갑자기 뛰어오더라고. 근데 평소 같지 않았어. 놀아달라고 보채는 게 아니라 내 옷을 물고 낑낑거리며 움직이더라.”

툴이 헥헥거리며 침대로 올라왔다. 가하란은 툴의 턱 밑을 간지럽히며 밀레나의 말을 들었다.

“찜찜해서 뛰어왔더니 네가 쓰러져 있더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몸이 뜨거우면서도 차가운데, 무슨 일인지 나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일단 의술사한테 데려가려고 했는데….”

밀레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게 나타났어.”

“그거?”

“그래, 그거. 그 이상한….”

밀레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머리 위에서 산페르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거, 아니, 이분을 말하는 거지?”

밀레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허둥대는 누나는 처음 본다.

“괜찮아. 제멋대로긴 해도 나쁜 분은 아니야.”

가하란은 산페르를 바라봤다.

“아저씨였죠?”

하늘을 뒤덮었던 물. 그건 분명 산페르의 힘이었을 것이다.

-나 때문에 너한테 문제가 생기면 세핀느, 그 아이가 슬퍼할 테니까.

산페르가 모습을 감췄다.

“아까 그거, 정령 맞아?”

“응. 맞아.”

“내가 아는 정령하고 너무 다른데.”

“다르다니?”

밀레나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산페르를 찾는 것 같았다.

“정령술사를 몇 번 본 적이 있어. 그 사람들이 보여준 정령은 저렇게 사람 말로 떠들지 않아. 아니, 떠들더라도 정령술사 외에는 소통이 불가능해. 근데 아까 그 거북이는….”

“아저씨는 조금 특별해.”

“조금이 아닐걸? 대체 어디서, 언제부터 그런 정령하고 알게 된 거야?”

“얼마 안 됐어.”

가하란은 이불을 치워내며 침대에서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밀레나가 이불을 붙잡으며 말했다.

“어딜 움직이려고.”

“이제 괜찮아.”

“얼음처럼 차가웠다가 불처럼 뜨거워지던 애가 잠깐 쉬었다고 괜찮아지겠어? 그보다 올란트 씨는? 너희 아버지는 어디 계셔?”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줘.”

밀레나가 눈을 씰룩거렸다.

“내가 널 발견하고 깨워보려 했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내가 말을 했어?”

“역시나 기억이 없구나.”

밀레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빠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무슨 떼쓰듯이 말했어.”

“그랬구나.”

“애면 애답게 어른한테 의지해. 혼자서 끙끙 앓을 필요 없어.”

“누나도 애면서.”

살짝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을까. 평소라면 안 했을 말이 툭 튀어나왔다.

가하란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밀레나가 검지로 가하란의 이마를 꾹 눌렀다.

몸이 침대로 쓰러졌다.

“누가 애라고?”

“알았어! 잠깐만! 미안해!”

이마가 뚫릴 것 같았다. 밀레나가 손가락을 치우자마자, 손바닥으로 이마를 비볐다. 거짓말이 아니라 몇 초만 더 눌렀으면 뼈가 바스러졌을 것이다.

“아파.”

“그래, 너 환자야.”

“아니, 그게 아니라….”

“뭐? 조용히 하고 누워 있어.”

얌전히 이불을 덮었다. 자주 얼굴을 봐서 잊고 있었다. 누나가 스콜라 생도라는 걸. 테리 형도 누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너희 아버지는 언제 귀가하시는데?”

“모르겠어. 안 들어오실 수도 있어.”

“너 혼자 이 집에 있는 거야?”

“응.”

“어떤 면에서는 올란트 씨도 참 대단하다.”

“주변에 어른들 많아서 괜찮아.”

밀레나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일어섰다.

“가려고?”

아쉬운 마음이 들어 물어봤다.

“아주머니 집에 잠깐 다녀올 거야. 난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거든.”

밀레나 손에 끈 달린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화려한 문양이 박혀 있는 봉투였다.

“잼 받아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잼?”

“저번에 같이 식사했을 때 말했잖아. 잼을 그냥 받아 갈 수는 없으니 선물을 들고 오겠다고. 이게 그 선물.”

아, 그 얘기구나. 가하란은 밀레나를 바라봤다. 지나가는 투로 하는 말이 아니었구나.

그러고 보면 누나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켰다. 다시 보러 오겠다는 약속도, 연극 초대권을 주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아빠가 말한 고지식하지만 배우고 싶다는 귀족의 표본이란 게 이런 걸까?

“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누워 있어. 툴, 너도 지켜보고 있어. 쟤가 일어서려 하면 그냥 물어버려.”

툴이 알겠다는 듯이 컹컹 소리를 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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