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흠. 이 오프닝으로는 이제 힘들구나.”
안소니가 킹을 바닥에 눕히며 말했다. 가하란은 고개를 젖히며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8패 끝에 1승을 거둬냈다. 땡볕에서 뛰어논 것처럼 진이 빠졌다. 가하란은 흩트려놓은 기물을 재빨리 정리하며 말했다.
“복기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22수에서 내가 뭘 했어야 좋은지, 한번 생각해보자.”
수를 되짚어가며 기물을 움직였다. 안소니가 말한 22수에 다다를 때쯤 위에서 테리와 제니가 내려왔다. 둘 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속이 울렁거려요.”
“저도요.”
남매가 사이좋게 문으로 향했다.
“형! 아저씨랑 복기할 건데, 같이 볼래?”
“지금 체스판 보면 토할 거 같아. 네가 내준 문제도 아직 못 풀었어.”
테리가 흐느적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제니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테리 뒤를 따라갔다.
“고집을 부린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아직 쟤들은 생각해낼 수 없는 풀이일 거다.”
“그런가요?”
안소니가 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이해력이 남다른 거다. 몇 달을 둬도 너만큼 못 두는 사람이 대부분일 테니. 어쩌면 몇 년일지도 모르지.”
“그 정도는 아닐 거예요. 전 아빠한테 한 판도 못 이겼는걸요. 아저씨한테도 겨우 한 판 이겼고요. 아니, 이긴 것도 아니죠. 아저씨가 봐줘서 겨우, 정말 겨우 한 게임 따낸 거예요.”
“그 ‘겨우’조차 못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이런 말 하면 내 자랑 같아 좀 그렇지만, 근방에서 체스로 날 이길 사람은 손가락에 꼽는다. 올란트가 그중 하나고.”
안소니가 22번째 수를 뒀다. 가하란은 궁지에 몰린 나이트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룩으로 교환을 신청했다.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요? 기물 하나만 봤을 땐 손해지만, 피스를 내주고 이쪽 전장을 가져올 수 있어요.”
“제대로 봤구나.”
안소니가 막힘없이 기물을 움직였다. 게임 흐름이 예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됐다.
“역시나. 아저씨는 이기는 수를 알고 계셨죠?”
“밖을 봐라.”
가하란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창밖을 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마무리 경기는 접어주는 게 어른의 미덕이지.”
“결국 한 판도 제대로 못 이겼네요.”
“그건 아니다. 21수에서 네가 만약 다른 수를 뒀다면, 난 승리를 굳혔을 거다.”
“어쨌든 봐주신 거니까 8전 8패. 한 게임도 못 가져왔네요.”
가하란은 테이블 옆에 서서 안소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공부해서 다음에 또 도전할게요.”
“여러 방법론이 있지만, 체스도 결국 암기력이 중요하다. 유명한 대국과 오프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두면 그게 실력이 되지. 내가 보기에 순간의 기지는 네가 더 낫다. 오늘 내가 이긴 건 세월 덕분이니 실망하진 말고.”
가하란은 방긋 웃었다.
“아빠한테 처음 배웠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체스는 정말 재미있어요. 한정된 보드 안에서 한정된 기물로 싸우는데, 경우의 수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으니까요.”
“체스를 즐기는 사람은 다들 똑같이 생각할 거다. 그게 묘미니까. 반대로 무한에 가까운 수 싸움이 싫어서 체스를 기피하는 사람도 있지.”
가하란은 체스판을 정리했다. 기물을 통에 담고 천으로 판을 닦았다.
“아저씨. 체스판이 더 넓으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흥미롭지만, 전장이 넓어지면 즐거움이 배가 되지 않을까?
안소니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3각 체스가 있긴 하지.”
“3각 체스요?”
“네 말대로 보드가 확장되는 체스다. 기물도 많아지지. 그만큼 수 싸움이 어려워져서 체스에 익숙한 사람도 적응하기 힘들 정도다. 나도 몇 번 구경은 해봤는데, 엄두가 안 나더라.”
“보고 싶어요. 어디 가면 볼 수 있죠?”
“여기선 체스연맹이 운영하는 대국장에 가면 볼 수 있지. 체스바에서도 볼 수 있긴 하지만, 이 근방에서는 아직 3각 체스보단 기존 체스가 인기 있어서 쉽게 보진 못할 거다.”
“나중에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안소니가 체스판을 카운터 선반에 올려두며 말했다.
“나도 3각 보드를 한번 알아보마. 가격만 괜찮다면 가게에 하나 들여놓을 테니 와서 써 봐.”
네, 라고 대답한 후 식물도감을 챙겼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아저씨, 저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였다. 눈앞이 팽 돌더니 시야가 꽉 막혔다. 당황하지 않고 중심을 잡았다.
“말이라도 해줘요.”
불쑥 솟아난 산페르에게 속삭였다. 가하란은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산페르가 나타났다는 건 눈앞에 구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 여전히 모르겠어. 대체 뭐지?
“모르겠으면 제 눈을 돌려줘요. 이번엔 인사 좀 제대로 하게.”
부탁했으나 산페르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면은 틀어막혔고 가장자리만 희미하게 보인다.
주변시를 통해 간신히 다리를 확인했다. 저번에도 본 장화였다. 구치 아저씨가 맞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이쯤이면 눈동자가 맞았겠지? 얼굴이 있을 법한 위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날 보면서 인사해 주는구나.”
“저번에는 그게….”
말하던 도중에 시야가 뒤집혔다. 가하란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거냐?”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다행이고. 그 책은 안소니가 빌려준 거냐?”
“네. 이 책을 아세요?”
“내가 작성한 거다. 조잡하지만 그래도 나름 쓸 만은 하지.”
“정말요?”
이제는 하늘과 땅이 출렁거렸다. 아니, 내 몸이 흔들리는 건가. 감각이 이상했다. 정령세계에 떨어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냐?”
“체스를 오래 둬서 조금 피곤했나 봐요. 괜찮아요.”
가하란은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말했다.
“어지럽다면 잠깐 앉았다가 가는 게….”
“아니에요! 더 늦기 전에 가야 해서요.”
“그래. 해 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안전하긴 하지.”
조심해서 가라는 말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일단 구치 옆에서 벗어나야 했다. 제멋대로인 산페르를 말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여관에서 멀어지자마자 시야가 돌아왔다. 눈꺼풀을 찍어 내리는 졸음이 뒤를 이었다.
1분 정도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몽롱했던 정신이 다시 예리해졌다.
가하란은 성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태평하게 헤엄치고 있는 산페르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또 한 번 이러신다면, 전 아저씨를 미워하게 될 거예요.”
산페르를 대답이 없었다. 한없이 푸른 눈동자로 여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저씨.”
- 돌아가자. 가면서 얘기해줄게.
“얘기해 준다고요?”
- 그걸 원한 거 아니야? 아니면 조용히 있을까?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물고 도리질을 쳤다. 항상 자기 할 말만 하던 산페르가 드디어 ‘얘기’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 됐다.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걸으며 산페르의 말을 들었다.
- 우린 이 층의 생명과 달리 육체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이 없어. 물론 영원불멸한 건 아니지. 기나긴 시간 속에서 근원이 점점 깎여나가고 이내 사라지게 돼.
차분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 사라진다고 해서 원형 자체가 소멸하는 건 아니야. 소멸은 스스로 선택했을 때나 찾아오지.
“그러면 사라진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근원이 텅 빈 거. 바로 저렇게 되는 거지.
눈꺼풀이 한번 감겼다가 떠졌다.
온 세상을 꽉 채운 정령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이렇게나 많이 있었던 건가?
- 지금 넌 내 눈을 빌려서 세계를 보고 있어. 평소에 네가 본 정령은 극소수에 불과해.
“이렇게나 많은 정령이 주변에 있었네요.”
가하란 눈앞으로 정령 하나가 지나갔다. 물방울 형태였는데, 바람에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 저 녀석들도 한때는 이 층에 관심이 있었을 거야. 변화가 신비롭고 정체가 아름다웠겠지. 하지만 그것도 찰나에서나 감흥이 생기지, 억겁의 시간 동안 지켜보고 있으면 다 똑같아 보여.
눈앞으로 정령이 다가온다. 부러진 각목을 닮은 정령이 가하란의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침묵한 채 떠도는 정령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라진다는 건 저렇게 된다는 뜻인가요?”
- 그래. 형태만 남은 것들. 소멸을 택하지 못해 근원이 깎여나가고, 결국 껍데기만 남은 것들. 저 녀석들은 먼지와 다를 바 없어. 뿌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 층에서 영원히 방랑하지.
주변을 꽉 채웠던 정령이 한순간 사라졌다. 눈이 굉장히 시렸다. 태양을 오랫동안 쳐다본 것처럼.
- 나 또한 오랫동안 이 층을 지켜봤어. 똑같은 것의 반복. 지겹고 또 지겨워. 세핀느 같은 아이가 가끔 나타나 내 무뎌진 감정을 되살려주지만, 그마저도 짧아. 결국 인간족은 삶을 마감하고 없어져 버리니까.
처음이었다. 산페르 목소리에서 진한 감정이 느껴진 건. 엄마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내겐 흥밋거리가 없어. 모든 게 똑같아 보이니까. 이름이 각인된 자들은 다 비슷하게 생각할 거야. 하지만… 방금 그건 내가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야. 놀랍고, 신비롭고, 탐이 나. 미지의 영역이 아직 남았다는 게 흥분돼.
개울에 발을 담근 것처럼 몸이 시원해졌다. 산페르의 기분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구치 아저씨가 그렇게 신기해요?”
- 그 인간족이 문제인지, 아니면 그 곁에 있는 또 다른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어. 알 수 없기에 좋은 거고.
“아저씨가 어떤 기분일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도 모르는 걸 발견하면 즐겁거든요.”
산페르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 나한테는 즐거운 일이지만, 너한테는 아닐 수도 있어. 아니, 인간족 전체한테 문제일 수도 있지.
“네?”
- 읽어낼 수 없는 힘의 잔향이 그 인간족 주변을 맴돌고 있거든. 내 근원을 소멸시킬지도 모르는 파괴적인 힘이자, 모든 걸 품을 수도 있는 자애로운 힘이야. 아니, 이걸 힘이라 정의할 수 있는 걸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산페르는 긴 혼잣말을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가하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산페르는 보통 정령이 아닐 것이다. 분명 상상도 못 할 힘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 정령이 파괴적인 힘이라고 칭했다. 그건 대체 어떤 것일까?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 같았다.
얼굴조차 제대로 못 봤지만, 목소리로 접한 구치는 참 따뜻한 사람 같았다.
방금도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고 조심해서 가라는 인사도 해줬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생각을 정리며 다시 걸을 때였다.
어디선가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핫’ 하고 2음절로 나뉘는 웃음소리였다. 자연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일부러 저렇게 웃는 걸까?
독특한 웃음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술집이 모여 있는 거리 쪽이었다.
가하란은 잠깐 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몸이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