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71화 (44/558)

제71화

“그 말씀은….”

올란트가 말끝을 흐렸다.

덴스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잔과 술병을 가져왔다. 싸구려 술이지만 청량감만큼은 자타공인 1등인 크박이었다.

“일단 받아.”

술을 가득 따라서 올란트에게 건넸다. 덴스는 빙긋 웃은 다음 술을 쭉 들이켰다.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입 안을 휘감는 탄산의 알싸함에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덴스는 올란트 잔을 가리키며 얼른 마시라고 보챘다.

“정말입니까?”

“내가 널 데려다 놓고 농담 따먹기 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아. 물론 체스 둘 시간은 있지만.”

올란트가 잔을 움켜쥐더니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덴스는 빈 잔에 다시금 술을 따랐다.

“문제가 생기긴 할 거야. 네 선임 치프들 중에서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분명 있을 테니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어요.”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올란트가 상체를 살짝 내밀며 말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선배님 능력이야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관료사회의 위계질서를 뒤집긴 힘드니까요.”

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란트의 말은 옳았다. 실력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사회였다면 청탁이란 단어는 진즉에 사라졌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 멧시언 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소장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마에스트로 멧시언. 둔 거병제철소의 총책임자가 용인해 주었다. 이제 올란트는 치프급으로 대우받으며 ‘랩’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주말에 시간 내라. 소장님을 뵈러 가야 하니까.”

“그래야죠.”

“너 넥타이 있냐? 제철소 행사 때나 매는 후줄근한 거 말고.”

올란트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멀쩡한 넥타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다. 기다려봐.”

덴스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미리 사둔 넥타이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자, 받아.”

돌돌 만 넥타이를 후배에게 던졌다.

“선물이자 뇌물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선물은 오히려 제가 드려야죠.”

“됐어. 네 머리가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니까. 한번 매봐.”

올란트가 앉은 자리에서 넥타이를 맸다. 지겹게 매봤다는 듯이 손놀림이 자연스러웠다.

“잘 어울리네. 나와 달리 인물이 훤칠해서 좋고.”

“얼마나 부려 먹으시려고 그렇게 칭찬하세요.”

“살살 꼬드겨놔야 나중에 도망 못 가지.”

얘기하던 도중 이 층에서 발소리가 났다. 덴스는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어린 딸이 눈을 비비며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천사! 시끄러워서 깼어?”

덴스는 한걸음에 계단으로 가 딸을 안아 들었다. 품에 안긴 딸이 올란트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낯선 손님이 신기한 모양이다.

“아빠 친구야. 인사할래?”

딸이 도리질 쳤다. 자다 깨서 그런지 부끄럼이 배가 됐다. 소파에 앉아 있는 올란트가 두 손을 격하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딸이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안녕.”

딸이 자그마한 손으로 인사했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천사인가. 예의도 바르고 귀엽고 착하고.

덴스는 올란트에게 다가가 딸의 얼굴을 보여줬다. 여전히 부끄러운지 딸이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올란트, 잠깐만 기다려봐. 애 재우고 올 테니까.”

이 층으로 올라가 딸을 침대에 눕혔다. 잠깐 칭얼댔지만 금방 고롱고롱 숨을 고르며 잠에 빠졌다.

“눈이 선배님을 닮았네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올란트가 한 말이었다.

“눈 빼고는 다 아내를 닮아서 예뻐. 날 닮았으면 뾰로통했을 텐데, 다행이지.”

덴스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가하란이라고 했었나? 아들 말이야.”

“예.”

“걘 어때? 널 많이 닮았냐?”

“저도 눈 빼곤 아낼 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 중입니다.”

덴스는 크게 웃으려다가 잠든 딸을 떠올리고는 소리를 낮췄다.

“네가 잘돼야 나도 잘되고, 나아가 우리 아들딸들이 잘되는 거다. 기술자로서 꿈도 중요하지만, 가장의 의무를 내팽개칠 순 없으니까.”

옅게 미소 지으며 주억거리던 올란트가 술을 시원하게 마셨다.

“한 잔 더 주세요.”

“그래. 마음껏 마셔라. 어차피 취하지도 않을 테니까.”

한동안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두 병을 내리 마셨다. 독한 술이 아니라 기분 좋게 취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었다.

“전에 선배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모든 공학자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꿈꾼다.”

“두 번 말했지. 첫 번째는 너랑 술 마실 때, 두 번째는 군부에 붙들려 있을 때.”

모듈 탈취 건 때문에 붙잡혀 있던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무릎이 쑤셨다.

의자로 무릎을 찍으며 자백을 강요하던 이름 모를 군관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이가 뿌드득 갈리면서도 어쩔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동시에 든다.

사람은 권위 앞에서 취약해지기 마련이니까. 독기 품은 눈으로 구타하던 군관 역시 군복을 벗겨놓으면 선량한 시민일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치밀어 올라 못 참을 거 같으니까.

덴스는 미소를 지었다. 경사를 앞두고 지나간 일을 떠올려서 뭐 할까.

“저 역시 기술자로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에 욕심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럴 거다. 지식을 갈망하지 않는 놈은 학자가 될 자격도 없지.”

올란트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이제는 들어야겠어요. 선배님께선 무엇을 꿈꾸고 계시는지. 그 꿈에 저도 모든 걸 걸어야 하니까요.”

덴스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고 보면 새로 개설할 랩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 아직 올란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뒤늦게 이 말을 하니까 웃기긴 한데,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용케 내 제안을 수락했구나.”

“선배님이니까요. 덴스, 그 이름을 들으면 확신이 섭니다.”

“좋으면서도 부담되네.”

덴스는 손을 마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올란트. 넌 병기로서의 거병을 어떻게 생각하냐?”

“비효율의 극치. 그러나 안 쓸 수 없는 애물단지죠.”

“그래. 그게 일반적인 시선이지.”

거병 한 대를 운용하기 위해 들어가는 인적, 물적 자원을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코스트 절감은 거병관리국, 제조소, 제철소가 평생 해결해야 할 숙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나 역시 그 일에 관심이 있고.”

덴스는 안경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거병을 단독으로 운용하는 전술에 대해 들어본 적 있지?”

“예. 하지만 구상 단계에서 엎어지지 않았나요? 위험도가 너무 크다고.”

“맞아. 그 거대한 쇳덩이를 단독으로 전장에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운반대의 중심인 메인 캐리어, 거병 기사가 사고로 전장을 이탈하게 될 시 대신 거병을 조종할 써전, 거기에 기술지원팀과 운반호송대까지.

거병 한 기를 전장으로 내보내려면 수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야 했다.

일단 기동하면 어지간한 물리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괴물이 되지만, 기동 전에는 참으로 허약한 마법공학품이니까.

“마나응축봉이 남아돌면 격납고부터 거병을 기동해 전장으로 내보내면 되지만, 그게 불가능하니까. 결국 인력을 동원해 일단 전장 근처로 이동시킨 후 기동을 시작하지.”

“어쩔 수 없죠. 한 발짝 떼는 순간부터 돈이 녹아나니까요.”

“돈 먹는 괴물이긴 해.”

덴스가 양손을 앞으로 들었다. 손바닥을 마주 보게 한 상태로 말을 꺼냈다.

“코스트를 줄이려면 결국 크기를 줄이는 게 가장 쉽고 단순하지.”

손바닥 사이의 간격을 점차 줄여나갔다. 좁아진 틈 사이로 올란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도 구상 단계에서 틀어지지 않았나요? 노획됐을 때 손해가 막심하다는 이유로요. 또한 거병의 출력은 대개 크기에 비례하는데, 신장이 줄어들면 기존의 거병을 막아낼 수 없고요.”

“정론이군. 근데 말이야 연료 소모를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다면 어떨까? 게릴라 전용 거병이 실전에서 쓰인다면, 그 효과는 대단하지 않겠어?”

올란트가 팔짱을 꼈다.

“소형화된 거병이 전장을 휘젓는다면 이점이야 수도 없이 많겠죠. 접지압 문제도 수월해질 테고. 하지만 크기를 줄인다고 해서 연료 소모가 크게 줄지는 않을 텐데요?”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어. 내가 어떻게 랩을 개설했겠어?”

올란트가 입을 살짝 벌렸다. 놀란 후배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뿌듯해진다.

“놀랍네요. 근데 왜 제조소와 관리국 내에서 아무런 소식도 없죠? 이런 연구성과라면 여러 입에 올랐을 텐데요.”

“방금 네가 들은 건 1급 기밀에 속하니까. 지금 이 사실을 아는 건 극소수에 불과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알려주자면, 이건 황제 폐하께서도 모르는 일이야.”

덴스는 술을 마시면서 올란트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아래로 깔려 있던 올란트의 눈동자가 중앙으로 돌아왔다.

“개발 주체는 의회인가요?”

“아니. 이건 성도 행정국 주도하에 긴밀하게 진행된 건이야.”

“행정국이요?”

“정확히는 행정2국 알렝 국장님. 그리고 소장님. 물론 개발비가 쓰이고 있다는 건 황가와 의회도 알고는 있어.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이 두 분과 랩에 참여할 사람들, 그리고 외부초빙 인사 한 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몰라.”

덴스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들은 이상 넌 못 빠져나가는 거야. 1급 기밀을 듣고도 발 뺄 생각은 아니지?”

“제대로 물렸네요. 어차피 빠질 생각도 없지만.”

올란트가 술로 입을 적셨다.

“거병의 소형화. 메리트는 분명 있지만, 이 개발 건이 수면 위로 올랐을 때 지지받을 수 있을까요?”

“그걸 위해서 널 데려온 거야. 탈로스 조정에 네 지식이 필요해. 전에도 말했지만, 기존 치프들처럼 몸을 사리는 자들은 힘들어. 과단성이 필요한 프로젝트니까.”

“그 누구의 지원도 못 받고 꼬꾸라질 수도 있겠군요.”

“다시 말하지만, 너 발 못 빼.”

“안 뺀다니까요.”

올란트가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세한 연구 내용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그보다 밖에서 초빙해온 분은 누굽니까?”

“이건 지금 말하기에는 좀 아까운데.”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대단하지. 대단하고말고.”

덴스는 안경을 벗은 다음 손으로 눈가를 살며시 눌렀다.

“너, 볼로스가 어딘지 아냐?”

“볼로스요? 국경지대잖아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알지?”

“격납고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B 텔스였나? 그 기종의 거병이 그곳에 있죠.”

“잘 아네.”

덴스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올란트가 몸을 숙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근데 네가 알고 있는 것 중에 잘못된 정보가 하나 있어.”

“뭔가요?”

“볼로스에는 격납고가 두 개 있어. 작지만 연구시설도 갖춰져 있지.”

“처음 듣는 소리네요.”

“최근에 생긴 거니까. 그리고 그 격납고가 우리 랩의 보금자리기도 하고.”

올란트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그곳에 초빙인사가 계신다. 새로운 거병을 시험하려면 써전으론 힘들지.”

“거병 기사가 한 분 가 있는 거군요.”

“맞아. 운이 정말 좋았지. 쉽게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거든.”

덴스는 안경을 다시 쓰면서 말을 이었다.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 필렌 경께서 시험기를 맡아주고 계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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