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70화 (43/558)

제70화

“그 귀족은 어떻게 됐어?”

질문을 던지자 제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지, 셰프 아저씨가 몇 마디 하니까 성질부리던 귀족이 그냥 물러났어.”

“뭐라고 했는데?”

“자세히는 듣지 못했어. 알렝 국장? 아무튼 사람 이름이 나왔는데 그걸 듣자마자 한발 물러섰다니까.”

“귀족이 사릴 정도면 꽤 높은 사람인가 보네.”

“그렇겠지?”

제니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며 두 손을 맞잡았다.

“구치 아저씨 친구, 그러니까 랜더 아저씨가 셰프 아저씨랑 아는 사이였어.”

구치와 랜더, 그리고 셰프.

가하란은 제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관계도를 그렸다.

제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면 어수선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정리해서 말해달라고 하면 따갑게 쏘아볼 테니, 알아서 정돈해야 했다.

“랜더 아저씨 덕분에 나도 가게로 들어가게 됐어. 맨날 밖에서만 봤지 안은 처음 보는 거잖아? 진짜 멋지더라. 예쁜 언니가 바이올린도 연주하고 있었어. 비싼 가게는 다 그렇게 하나 봐.”

“나도 한번 보고 싶다.”

“난 봤는데도 또 가보고 싶어. 거기서 먹은 음식은 진짜 맛있었거든. 예술이었어.”

제니 얼굴이 밝아졌다. 잠깐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모양이다.

제니가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한 입 거리 파이부터 마지막을 장식한 살짝 언 멜론까지.

가하란은 설명을 들으며 상상해봤다. 몇 가지 음식은 제법 또렷하게 떠올랐다. 맛도 예상할 수 있었고.

하지만 대부분 음식은 어떤 모양일지, 어떤 맛일지 유추해낼 수 없었다.

한 호흡에 설명을 마친 제니가 길게 숨을 뽑아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말하는 제니는 오랜만이었다.

가하란은 짧은 연극을 본 것 같아 박수를 보냈다.

“그걸 어떻게 다 외웠어?”

“너도 가서 먹어보면 알게 될 거야. 잊히지 않는 맛과 모양이거든. 아까워서 한참을 봤다니까? 어떻게 그렇게 만들 수 있지? 그 셰프 아저씨는 진짜 대단해. 무섭게 생겼지만 음식은 정반대야. 귀엽게 장식된 음식이 되게 많았어.”

곰 같은 셰프가 만들어낸 귀여운 음식. 이 또한 상상이 안 된다. 직접 봐야 제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랜더 아저씨, 귀족은 아니지만 엄청난 부자인 게 확실해. 청소 팁으로 은화를 줬다니까?”

“그건 테리 형한테 들었어.”

사냥꾼인 구치와 함께 왔다는 희한한 손님. 어떤 사람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근데 랜더 아저씨, 바쁜 일이 생겼나 봐. 요즘 한 번도 못 봤어. 구치 아저씨 말로는 누굴 만나러 성문에 간다던데.”

“뒤늦게 합류하는 일행이 있는 걸까?”

“어쩌면 상단일지도 몰라. 랜더 아저씨가 이끄는 상단.”

그때였다. 옆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테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는 소리 같았다.

“문제가 얼마나 어려우면 저래?”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규칙만 겨우 배운 나도 금방 풀었는걸?”

“우리 오빠는 좀 바보라서 쉬운 문제도 어려워하니까.”

제니가 히죽 웃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내가 한번 풀어볼게. 먼저 풀어서 오빠를 놀려야겠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얼른 따라와.”

가하란은 제니에게 붙들려 옆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문을 여니 여전히 고심 중인 테리가 보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다 진짜 풀 수 있을 거 같아.”

테리가 체스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제니가 아랑곳하지 않고 테리 옆에 가서 앉았다.

“뭐해?”

“나도 풀어보려고.”

“네가? 넌 절대 못 풀어. 체스 어렵다고 포기한 네가 이걸 어떻게 풀어.”

“기다려 봐. 내가 금방 풀어서 오빠보다 낫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테리가 코웃음을 쳤다.

“좋아. 한번 해봐.”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설명은 해줘야지.”

테리와 제니가 동시에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가하란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체스판 앞에 앉았다.

“룰은 단순해. 이 상태에서 흑이 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면 돼.”

“흑이 백을? 되게 쉬운 거 아니야?”

제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리가 크게 웃었다.

“쉽다고? 가하란, 얘 하는 말 들었어? 이게 쉽데.”

“오빠는 가만히 있어봐. 가하란도 어렵지 않은 문제라고 했어.”

“네가 가하란이야? 쟤는 그렇다 치고, 넌 절대 못 풀어.”

제니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잘 봐.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으니까.”

제니가 거침없이 나이트를 쥐고 이동했다.

“어때? 이러면 유리한 거 아니야?”

테리가 픽 웃으면서 흰색 룩을 움직였다.

“이러면? 이쪽 다 내주는 건데?”

“이게 왜 내주는 거야?”

“야이씨. 넌 기초도 모르면서 이걸 풀겠다고 한 거야? 가하란! 아까 했던 거 다시 보여줘.”

가하란은 씩씩대는 두 남매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다가, 천천히 기물을 움직였다.

자신만만하던 제니의 얼굴이 뚱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뭐야. 이러면 지는 거였네.”

“내가 말했지? 넌 못 푼다고.”

“근데 이건 가하란이 잘 둬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백이라면 이렇게 안 둘 텐데.”

“바보야. 그러니까 어렵다는 거야. 서로 최선의 수를 둔다고 가정한 다음에 문제를 풀어야 하니까.”

제니가 눈을 찌푸렸다.

“그건 억지 아니야? 체스판이 이렇게나 넓은데, 최선의 수가 뭔지 어떻게 알아?”

“알 수 있어. 알 수 있으니까 이런 문제를 만든 거야. 하여간 체스도 모르면서.”

테리가 빈정거리자 제니가 머리로 테리 어깨를 들이받았다.

“너보다 잘하거든!”

“너? 오빠한테 너?”

한바탕할 기세였다. 사이좋은 남매고, 둘 다 서로를 아끼지만 가끔 엇나가는 일이 생기면 대차게 싸우곤 했다.

물론 싸운다고 해서 악감정이 오래가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지만 아마 모레쯤엔 오빠 동생 하며 살갑게 굴 것이다.

문제는 그 이틀간 애꿎은 사람이 시달리게 된다는 점이다. 또 나만 고생하겠지, 가하란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거 먼저 푼 사람이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거 어때?”

으르렁거리던 남매가 동시에 체스판을 봤다. 둘 다 승부욕이 대단하니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내가 먼저 풀면, 제니 네가 일주일 동안 3층 청소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지면 오빠가 해.”

“그럴 일 없으니까 너나 딴소리 마.”

남매가 동시에 체스판을 바라봤다. 눈빛이 살벌했다. 툭 건드리면 둘 다 며칠 굶은 개처럼 짖을 것 같았다.

“오늘 저녁까지 푸는 걸로 할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슬쩍 말을 꺼냈다.

“아니. 풀 때까지 계속할 거야.”

“나도. 가하란, 오빠한테 정답 알려주지 마.”

“누가 할 소리? 가하란. 너 일단 나가봐. 우리한테 힌트 주지 말고.”

눈길조차 안 주며 말하는 남매였다. 가하란은 식물도감을 챙기며 말했다.

“그럼 나 이거 빌려 가도 돼?”

“그거 아빠 거야. 일 층에 계시니까 한번 물어봐. 아마 빌려주실 거야.”

테리의 말을 들으며 방문을 열었다. 눈에 불을 켠 남매를 잠깐 지켜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식물도감을 품에 안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테이블을 닦고 있는 안소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저씨. 저 이거 빌려 가도 돼요?”

“봐도 재미없을 텐데.”

“아니요. 엄청 재미있어요.”

안소니가 행주를 접으면서 가하란을 보았다.

“그 책, 마음에 드냐?”

“네.”

“그러면 가져가라. 돌려줄 필요 없다.”

“이거 비싼 책 아니에요?”

“책은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읽히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지. 우리 집 애들은 그 책에 흥미가 없으니 어차피 창고에서 썩을 거고, 그러느니 너한테 주는 게 낫지. 그게 올바른 책의 사용법이기도 하고.”

안소니가 두꺼운 손으로 가하란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가하란은 기쁜 마음에 활짝 웃었다.

“그래도 다 보고 나면 돌려 드릴게요.”

“네 마음대로 해라. 근데 애들은 뭐하고 너 혼자 내려왔냐?”

“둘 다 체스 문제 풀고 있어요.”

“체스 문제?”

위층 상황을 짧게 요약해 안소니에게 전했다.

“올란트한테 체스를 배운 모양이구나.”

“얼마 전에요. 근데 잘하지는 못해요.”

“어떤 문제였는지, 나한테도 알려줄 수 있겠냐?”

안소니가 카운터에서 체스판을 가져왔다. 체스판도, 기물도 여기저기 흠집이 많았다.

“손님들하고 자주 뒀단다. 물론 네 아빠하고도.”

가하란은 의자에 앉은 다음 체스판 위에 기물을 세웠다.

“이게 아빠가 알려준 문제에요.”

안소니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걸 너한테 문제랍시고 알려줬다고?”

안소니의 어투가 조금 이상했다. 어이가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네.”

“그래서 넌 이 문제를 풀어냈고?”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풀긴 풀었어요. 근데 아빠가 알려준 답과는 약간 달랐어요.”

“그렇단 말이지.”

안소니가 왼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오른손으로 기물을 빠르게 움직였다.

흑백의 기물이 서로 번갈아 가며 영역을 침범하고, 교환되다가, 이내 흑이 승기를 가져왔다.

“이게 내가 아는 답인데, 어떠냐?”

“맞아요. 아빠가 알려준 답이에요.”

“네가 생각해낸 풀이를 보여줄 수 있겠니?”

“잠시만요.”

가하란은 판 밖으로 밀려난 기물을 다시 가져왔다. 그다음 몇 시간을 고민해 알아낸 답을 재연해냈다.

“여기서 비숍을 올리고, 체크메이트. 전 이렇게 풀이해 봤어요.”

“고엥 트랩의 세 번째 수구나.”

“아빠도 그렇게 말했어요.”

안소니가 크게 웃었다.

“넌 거병 기사가 아니라 체스마스터가 되는 게 낫겠다. 체스 선생이 되면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으니까.”

“그것도 생각해 볼게요. 꿈은 많은 수록 좋다고 하니까요.”

“그래, 너라면 다 할 수 있을 거다.”

안소니가 기물을 정리했다.

“나랑 한 게임 하자꾸나.”

“아저씨랑요?”

“왜? 싫으냐?”

“아니요. 할래요.”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거다.”

“바라지도 않아요.”

의자 끝자락에 엉덩이를 걸치고 체스판을 바라봤다.

* * *

“체크메이트.”

덴스는 선언을 듣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한 수만 무르자.”

“선배님. 벌써 네 번째예요.”

“그러니까 선심 쓴 김에 한 번만 더. 이럴 때 선배 대접 제대로 해줘야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린 지 오래였다. 덴스는 진심으로, 정말 추잡하게라도 올란트를 한 번만 이겨보고 싶었다.

올란트가 작게 웃으며 앞으로 밀었던 룩을 뒤로 당겼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럼그럼!”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또 체크메이트를 당했다. 덴스는 한숨을 내쉬며 패배를 인정했다.

“악독하다, 악독해.”

이견이 없는 패배였다. 다섯 번이나 수를 물렀는데 졌으면 하늘이 뒤집혀도 못 이기는 실력 차이였다.

“진 건 진 거고, 이제 결정 내려야지?”

덴스는 체스판을 옆으로 치웠다. 여흥은 여기까지, 이제 중요한 얘기를 나눌 때였다.

“우리 랩에 들어와. 새로운 스타일의 거병을 만드는 데 네 머리가 필요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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