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끝난 거 같지?”
“내 눈에는 수가 안 보이네.”
동기들이 체스판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갤러리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건 승패가 명확하게 갈렸다는 뜻이다.
율은 고심 중인 쿠엔을 바라보았다.
고민이 길어지고 있었다.
정식 경기였다면 시간제한을 뒀겠지만, 친선전인 만큼 밀레나가 말없이 기다려주고 있었다.
쿠엔이 고착된 침묵을 깨트린 건 1분 정도가 더 흐른 뒤였다. 쿠엔이 자신의 킹을 붙잡아 기울어트렸다. 바닥에 누운 킹. 항복 선언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밀레나가 말했다. 인사를 받은 쿠엔이 곧바로 기물을 정리했다.
체스판 바깥으로 밀려났던 기물들이 다시 체스판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나이트를 물렸어야 하나요?”
“그것도 좋지만, 이렇게 수를 바꿔보는 건 어때요?”
복기가 시작됐다. 쿠엔이 질문하면 밀레나가 답했다. 복기 때는 갤러리도 참여할 수 있어서, 구경 중인 동기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e6이 낫지 않나?”
“그것보단 오프닝부터 삐끗한 거 같은데. 레빗 디펜스로 받았으면 좀 더 수월했을 거야.”
“레빗도 괜찮지만 프로치아는 어때? 밀레나의 수를 생각하면 모든 폰을 교환하는 게 편했을 거야.”
의견이 난립했다. 몇몇 동기들은 아예 자리를 이동해 방금 대국을 재연하고 있었다.
“그만, 그만! 나머진 너희들끼리 해.”
율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내버려 두면 종일 체스판을 붙들고 있을 것 같았다.
모여 있던 동기들이 하나둘씩 자리로 돌아갔다.
“쿠엔, 네가 하자고 한 거지?”
율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던 탓인지, 공기가 후끈거렸다.
“맞아. 내가 하자고 했어.”
“역시나.”
쿠엔의 대답을 들은 다음 밀레나를 바라봤다. 밀레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찻잔을 들었다.
“난 잠깐 어울려줬을 뿐이야.”
찻잔을 입에 가져가던 밀레나가 멈칫했다.
“언제 다 마셨지.”
밀레나가 지배인을 호출하는 동안, 율은 쿠엔에게 말을 걸었다.
“그새를 못 참고 어떻게 체스 둘 생각을 했어? 난 대화를 하랬지, 체스를 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이유? 너 설마 내기 걸었어?”
“그냥 하는 것보단 그게 재미있잖아.”
쿠엔이 머쓱하게 웃었다.
“뭘 걸었는데?”
“그런 게 있어.”
“말 안 하시겠다?”
밀레나를 힐긋 바라봤다. 이쪽도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지, 시선을 회피한다.
“그래, 둘만의 비밀로 삼아. 좀 섭섭하지만, 이걸 계기로 두 사람이 가까워진다면 나쁠 건 없겠지.”
지배인이 밀레나가 주문한 차와 시원한 물을 가져왔다. 율은 물이 담긴 잔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물었다.
체스를 둔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래도 멍청하게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밀레나가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었다. 쿠엔한테 관심이 없었다면 진즉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밀레나는 그러고도 남을 애니까.
율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둘이 잘되면 좋을 텐데.
“질 거라고는 예상 못 했지?”
쿠엔에게 말을 걸었다. 단절된 대화를 이어 붙이기 위해 체스를 이용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때 눈치껏 빠져줄 것이다.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
“밀레나가 아니라 다른 애였다면 이겼을 거야. 얘는 좀 특별하거든.”
검지로 밀레나의 볼을 콕 찍었다. 밀레나가 인상을 쓰며 손을 툭 쳐냈다.
“밀레나가 누구한테 체스를 배웠는지 들었어?”
“아니.”
“누굴 거 같아? 한번 맞혀봐.”
“전혀 모르겠어. 기풍을 읽어내지도 못하고 막기에 급급했으니까. 수 싸움에 허덕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끝나 있더라고.”
쿠엔이 넋 놓은 표정으로 말하다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아주 제대로 혼난 모양이네.”
“혼난 정도가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였어. 밀레나 씨, 어떤 분한테 가르침을 받은 거죠?”
밀레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가르침을 받았다기보단, 저도 신나게 얻어맞았어요. 대공께선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거든요.”
“대공이라면 설마….”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그분이 맞을 거예요.”
쿠엔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 대공께 체스를 배울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네요.”
“그게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에요. 말했다시피 대공께선 정말 무자비하게 두시거든요.”
율은 흐뭇하게 두 사람을 지켜봤다. 분위기가 제법 좋았다. 조금만 더 어울리다가 슬쩍 빠지면 되겠어.
“이번 한 번으로 결판내는 건 아쉬우니까 다음에 또 둬보는 건 어때? 밀레나, 너도 체스 싫어하진 않잖아.”
여기서 약속까지 잡아둔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밀레나가 쿠엔을 바라본다.
“체스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두죠. 그리고 약속은 약속이니까 기억해 두세요. 전 비싸게 받을 거예요.”
“바르체는 다른 건 몰라도 체스로 진 빚은 꼭 갚습니다. 그러니 필요할 때 말하세요.”
뭐야,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래.
율은 일어서려는 밀레나는 붙잡았다. 어딜 가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볼일 다 봤으니까 난 그만 일어날게.”
“왜? 더 있다가 가.”
“율. 너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율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쿠엔 씨, 얘 정말 모르나 봐요.”
“지금 보니까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머진 알아서 하세요. 전 이만 물러날 테니.”
밀레나가 율의 손을 떼어내며 일어섰다. 쿠엔도 정중한 미소로 밀레나를 배웅했다.
율은 계단을 밟는 밀레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쿠엔에게 말했다.
“왜 안 붙잡았어. 분위기 나름 좋았는데.”
쿠엔은 말이 없었다. 대신 모호한 눈길로 율을 바라보았다.
“뭐야.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 없었어. 밀레나 씨는 내 푸념을 들어줬을 뿐이야.”
“푸념? 아니, 잘해보라고 자리 만들어 줬더니 투덜거렸어? 너 그러다가 이상한 소문 돌아. 물론 밀레나가 그럴 애는 아니지만, 만약이란 게….”
어릴 때부터 투덕거려온 사촌이자, 절친한 친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려던 때였다.
“율.”
쿠엔이 말했다. 율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다물고 말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올곧은 시선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봐.”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가문에 큰 화가 닥쳤나? 아니면 신변에 문제라도?
걱정의 부피가 점점 늘어날 때였다.
“약혼반지 받아줄래?”
쿠엔의 입을 비집고 나온 말에 율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
지금 얘가 뭐라고 한 거지?
“무슨 반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제대로 들었고 이해도 했다. 그런데도 다시 질문했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약혼반지.”
“그걸 왜 나한테?”
“좋아하니까.”
“네가? 나를?”
율은 고개를 홱 돌렸다. 이 층으로 올라간 줄 알았던 밀레나가 계단 끝자락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머리를 한 번 매만지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려 쿠엔을 본 다음, 다시 바닥을 봤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나를?”
“진짜 몰랐던 거야?”
“전혀.”
“꽤 티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었나.”
티를 냈다는 말에 율은 과거를 돌이켜봤다. 그러고 보면 티를 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심인 거지?”
“어.”
담담한 어투와 달리 쿠엔의 깍지 낀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 거야.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반지는 준비해왔어?”
“어? 아니. 지금은 없어.”
“치수는 알아?”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준비성이 부족하네.”
율은 검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쿠엔에게 주었다. 쿠엔이 반지를 움켜쥐며 웃었다.
“내 취향에 안 맞으면 안 받을 거야. 알지? 나 되게 깐깐한 거.”
말을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중에 봐.”
몸을 돌리며 말했다. 쿠엔이 등에 대고 대꾸했다.
“금방 올게.”
율은 쿠엔을 힐긋 본 다음, 계단 끝자락에 서 있는 밀레나를 향해 뛰어갔다.
밀레나가 난생처음 보는, 음흉한 미소를 짓다가 위로 사라졌다.
“밀레나! 나랑 얘기 좀 하지?”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외쳤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 * *
가하란은 책장을 맨 앞으로 넘겼다. 특이한 식물들을 정리한 도감인데,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안소니 아저씨는 이런 책을 어디서 구한 걸까?
“이게 아닌데.”
가하란은 책에서 눈을 떼고 앞을 보았다. 테리가 엄지를 문 채 체스판을 보고 있었다.
“형. 아직 멀었어?”
“기다려 봐.”
“벌써 20분은 지난 거 같은데.”
“책 보고 있어.”
“내가 설명을….”
“절대 안 돼! 내가 수를 생각해낼 때까지 가만히 있어. 멋대로 말하면 다신 너 안 볼 거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테리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가하란 왔어?”
제니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가하란은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체스 둬?”
제니가 말했다. 테리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입을 열었다.
“가하란. 잠깐 나가서 제니랑 놀고 있어.”
“형은?”
“난 이거 푼 다음에 나갈 거니까 나 찾지 말고.”
테리의 고집을 꺾을 순 없으니 일단 나가기로 했다. 제니에게 눈짓한 다음, 같이 방 밖으로 나왔다.
“오빠 뭐 하는 건데?”
제니가 닫힌 문을 보며 물었다.
“아빠한테 배운 체스 문제를 형한테 내봤어. 그거 푸느라 정신이 없는 거고.”
“그래? 근데 너 체스 둘 줄 알아?”
“테리 형이랑 같이 놀려고 아빠한테 조금 배웠어. 꽤 재미있더라.”
“난 어렵기만 하던데.”
제니가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바로 옆인 제니 방으로 들어갔다.
“여관에 몇 번 왔었다며. 왜 나 안 보고 갔어.”
“올 때마다 네가 없었으니까.”
제니가 킥킥 웃으며 그렇긴 해, 라고 대답했다.
“있잖아, 나 자랑할 거 생겼다.”
“자랑할 거?”
“요정의 안뜰 알지.”
“둔에서 거길 모르는 사람은 없지.”
“나 거기서 밥 먹었다. 대단하지?”
“진짜? 어떻게?”
요정의 안뜰이라면 예약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예약을 해도 몇 달은 기다려야 했다. 음식 가격도 상상을 초월하고.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제니가 신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구치 아저씨 데리고 안뜰에 갔거든? 아, 구치 아저씨 모르지?”
“알아. 테리 형이 알려줬어. 얼굴도 한 번 봤고.”
제대로 인사조차 못 했지만. 뒷말은 안으로 삼키며 제니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무튼 구치 아저씨, 그리고 아저씨 친구랑 같이 안뜰에 갔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긴 거야.”
“무슨 문제?”
“뚱뚱한 귀족이 예약 시간을 어겨놓고 막 화를 내더라고. 들여보내 달라고 종업원 언니를 협박하고. 그 언니 진짜 착한 언니인데.”
“무서웠겠다.”
“조금.”
제니는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며 인상을 썼다.
“그때 가게 안에서 셰프 아저씨가 나왔는데, 솔직히 말하면 난 귀족보다 그 아저씨가 더 무서웠어.”
“왜?”
“엄청 컸거든. 곰 같았어. 게다가 왼쪽 얼굴에 상처도 있었고.”
안뜰 셰프를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제니의 설명만으로는 감이 안 잡혔다. 얼굴에 상처가 있는 곰 같은 사람?
“근데 내 착각이었어. 그 아저씨 진짜 상냥해. 상처도 친구들 구하려다 생긴 거였대. 셰프 아저씨가 예전에 군인이었거든. 아, 이건 구치 아저씨 친구분이 알려준 거야.”
“처음 듣는 얘기네.”
전직 군인이었던 사람이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가 됐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