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68화 (41/558)

제68화

“율하고 제가 사촌이란 건 들으셨나요?”

“네. 들었어요.”

쿠엔이 고개를 살며시 들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부대꼈어요. 가문끼리 왕래가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율이 개인적으로 많이 찾아왔죠. 어릴 때부터 거병 기사가 되겠다고 난리였거든요.”

“바르체만큼 거병에 해박한 곳도 없으니 율이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겠네요.”

“네, 맞아요.”

쿠엔이 티스푼을 들었다. 찻잔을 휘휘 젓는 모습이 고상했다.

“집안 어른들도 율을 반겼죠. 잘 아시겠지만, 성격이 워낙 좋잖아요.”

“그건 모르겠네요. 참견이 심하다는 건 잘 알지만.”

“그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전 그게 마음에 들었지만.”

“어릴 때부터 좋아했나 봐요?”

쿠엔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릴 땐 그냥 친구 사이였어요. 짜증도 좀 나고 보기 싫을 때도 있는 그런 흔한 친구. 연심을 알아챈 건 최근이에요. 그 친구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허탈감을 느꼈어요. 그때 알았죠. 아, 선머슴 같은 친구가 아닌 여자로서 좋아했구나.”

쿠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혼담이 나온 이상 마음을 접어야 했죠. 불편해지는 건 원치 않았거든요.”

“그런데 상황이 바뀐 거네요. 약혼식 자체가 무산됐으니까.”

“그렇죠.”

“기회네요. 가문 어른들도 반대하지 않을 테고요.”

사촌끼리 결혼해 권력을 공고히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카르벤’과 ‘바르체’. 서로 결속을 다지면 득을 보는 가문들이니 이해관계도 맞고.

“네. 말씀하신 대로 주변 여건은 괜찮습니다. 파혼한 지도 꽤 됐고, 예의 차릴 시간도 지났으니 말을 꺼내도 괜찮죠.”

“근데 왜 직접 말 안 해요?”

“두렵거든요.”

쿠엔이 찻잔을 양손으로 쥐었다.

“아까 보셨다시피 율에게 눈치를 몇 번 줬는데 별 반응이 없어요.”

“이번이 처음은 아니죠?”

“네. 파혼 소식을 들은 이후에 몇 번이나 시간을 내서 만나러 갔어요. 그때마다 즐겁게 대화했죠.”

“근데 발전이 없다?”

밀레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에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파혼을 겪었으니 율도 조심하는 거겠지, 시간을 좀 더 주면 대꾸를 해주겠지… 그렇게 어영부영 여기까지 왔네요.”

“바르체란 가문명과 어울리지 않네요. 좋게 말하면 로맨틱, 나쁘게 말하면….”

“겁이 많은 거죠.”

쿠엔이 안경을 벗었다. 피곤한지 미간 사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시작이 엉켜 버리니까 나중에 가서는 말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나와 가문의 이름 아래 정식으로 만나보자, 결혼하자. 차라리 파혼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말할 걸 그랬어요. 그때는 쉽게 했을 테니까요.”

“지금이라도 해봐요.”

쿠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밀레나 씨가 보기에 율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던가요?”

“짜증 나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눈치 없는 애는 아니에요. 파벌 문제만 아니었다면 율은 다른 모든 생도들과 친해졌을 거예요. 지금도 뭐 한 명 빼고는 친한 거 같지만.”

이리엘데를 떠올리며 말했다.

“저도 율이 눈치 없는 애라고는 생각 안 해요. 오히려 분위기를 잘 읽는 편이죠.”

밀레나는 쿠엔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나아가 두려워하는지 이해했다.

“율이 말 대신 행동으로 거절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나 봐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어릴 적 친분 때문에 차마 대놓고 말은 못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멍청한 제가 그것도 모르고 기웃거리는 게 아닐까. 말을 너무 두서없이 했나요?”

차분한 인상과 달리 말하는 속도가 들쭉날쭉했다. 그만큼 속이 복잡하단 뜻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늘 또 찾아온 건 왜죠?”

“겁이 많은 만큼 미련도 많거든요.”

밀레나는 오물오물 씹어 삼킨 다음 말했다.

“속사정을 저한테 다 털어놨다는 건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이겠죠?”

“제가 뭘 바라는지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율의 속마음을 떠보는 건 내키지 않네요. 그런 걸 잘 해낼 자신도 없고.”

“초면에 이런 부탁을 드린다는 게 실례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부탁드린다면… 들어주실래요?”

“율하고 어색해지는 게 그 정도로 싫어요?”

쿠엔은 대답하지 않고 머쓱한 웃음을 보였다.

“개인 대 개인 말고 가문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면 쉽게 성사될지도 몰라요. 바르체와 카르벤은 서로 손해 볼 게 없으니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밀레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연애를 하고 싶다, 이거네요?”

“그런 셈이죠.”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본인이 말한 대로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바르체의 이름을 빌리면 아리송한 연애 감정 따윈 건너뛰고 바로 결혼할 수 있을 텐데. 율 역시 바르체라면, 알고 지낸 쿠엔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테고.

밀레나는 생각을 잠시 멈추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고의 흐름이 하품이 나올 정도로 고리타분했다.

미엔한테는 온갖 잘난 척을 하면서 ‘엔첸세’는 일반적인 귀족과는 다르다고 했는데,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건 뻔하디뻔한 귀족 사상 아닌가?

권위, 편의, 합의. 권력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이용하는 걸 당연시하고 있다.

사랑은 진부한 것이고, 애틋한 감정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한 건 아닐까?

밀레나는 쿠엔을 다시 바라봤다.

앞에 있는 건 바르체란 가문명을 잇게 될 유능한 귀족이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의 속마음을 알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슬프면서도 웃긴 남자였다.

“율이 카르벤이 아니라 이름 없는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쿠엔 씨의 마음도 좀 달라졌을까요?”

언젠가 로운에게 했던 질문을 약간 바꿔서 쿠엔에게 던졌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의 어느 한 부분만 좋아한다는 뜻이 아닐 거예요. 얼굴, 성격, 배경, 취미, 능력. 알게 모르게 그 모든 걸 헤아린 다음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거죠. 분명 그럴 겁니다.”

쿠엔이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전 율이 다른 가문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좋아했을 거예요.”

“시민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시민이라. 지금보다 더 고민했겠죠. 그다음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했겠죠. 사실 율의 성격이라면 신분은 크게 상관없을 거예요. 특유의 사교성으로 집안 어른들을 다 포섭할 테니까.”

“정말로 좋아하나 보네요. 아니, 사랑하나 봐요.”

밀레나는 다리를 꼰 다음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쿠엔 씨의 부탁은 거절할게요. 애초에 들어줄 마음도 없었어요.”

“그렇군요.”

“율하고는 나름 친해요. 아니, 스콜라 내에서 가장 친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율이 제 얘기를 하던가요?”

쿠엔이 슬며시 다른 곳을 본다. 밀레나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딱 보니 뭐라고 했는지 알겠네요. 별명을 말하던가요?”

“아, 네. 듣긴 들었습니다. 길쭉이와….”

쿠엔이 뒷말은 헛기침으로 대신했다.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나 보네, 밀레나는 방긋 웃는 율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아무튼 스콜라 내에서도 세트로 묶여서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요. 하도 붙어 있었더니 친해질 수밖에 없죠. 진중한 얘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그 애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아요.”

밀레나는 쿠엔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러니 율이 돌아오면 확실하게 물어봐요. 두 사람 사이를 생각하면 그게 가장 옳은 방법일 테니까.”

“알고는 있지만….”

“알고 있으면 실천해요. 제가 해줄 말은 그거밖에 없어요. 좋아한다면 부딪치세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시원하게 깨지는 게 아무것도 안 하고 빌빌대는 것보단 낫다고.”

잠깐만, 누가 이 말을 했더라.

기억을 더듬다 보니 떠올랐다. 준 공께서 해준 말이었다. 근데 연애 문제에 적용해도 괜찮은 거겠지?

밀레나는 다리를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 상담료를 계산해 볼까요?”

“상담료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쿠엔이 작게 웃었다.

“상담 결과물이 시원치 않아도 대가를 받나요?”

“그럼요. 귀중한 휴가 시간을 투자했으니 나름의 보상이 있어야죠.”

“하긴, 틀린 말은 아니네요.”

밀레나는 쿠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심이 섰는지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결정한 모양이네요.”

“조언을 따라 보려고요. 신기하네요. 혼자서 앓고 있을 때는 답을 알고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용기가 좀 나네요.”

“가끔 등 떠밀어 주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죠.”

쿠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장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곳에 놓인 체스판을 가져왔다.

“상담료를 걸고 한 게임 하시죠.”

“그냥은 줄 수 없다, 이건가요?”

“지든 이기든 드리긴 할 겁니다. 제가 이기면 현물로 드리죠. 아, 장신구나 장갑이 좋겠군요. 어떠신가요?”

“장갑이 좋겠네요. 마침 훈련 때 쓰는 개인 장갑이 떨어졌거든요. 보급품은 아무래도 손에 안 맞아서.”

“좋습니다.”

밀레나는 체스 기물을 정리하며 물었다.

“만약 제가 이긴다면요?”

“그때는 현물이 아니라 절 한 번 써먹을 수 있는 권한을 드리죠.”

“디저트 심부름 같은 거 시키면 되겠네요.”

그 말을 들은 쿠엔이 눈웃음 지었다. 밀레나는 검은색 폰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상담료치고는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훈련 때 쓰는 장갑은 몇 켤레를 사도 부담되지 않으니까요. 백 켤레까지도 괜찮습니다. 근데 흑으로 하실 겁니까?”

밀레나는 폰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흑이 불리하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알고 있어요.”

쿠엔이 안경을 매만진 다음 흰색 퀸을 쥐었다.

“근데 전 장갑이 아니라 권한을 받을 건데, 진짜 괜찮겠어요?”

“전 장갑 선에서 끝낼 겁니다.”

“자신 있나 보네요. 하긴, 그러니까 체스판을 가져왔겠죠?”

“어차피 율이 돌아올 때까지 밀레나 씨와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상담도 끝났고, 멍하니 있을 순 없으니 체스로 시간을 보낼 겁니다.”

“진부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네요. 후회하실 거예요. 제가 바르체에게 할 부탁은 장갑 백 켤레보단 비쌀 테니까.”

“재차 말하는 거지만, 상담료는 장갑으로 지불할 겁니다.”

기물 배치가 끝났다.

밀레나는 폰을 앞으로 밀면서 입을 열었다.

“오프닝을 했으니 이제 무를 수 없어요.”

* * *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저긴 밀레나와 쿠엔이 앉아 있던 자린데.

앞을 가로막은 동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불쌍한 희생양을 구경 중.”

“희생양?”

동기가 자리를 터줬다. 테이블에 놓인 체스판이 눈에 들어왔다.

밀레나는 여유롭게 차를 즐기고 있었고, 쿠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됐다.

쿠엔은 어릴 때부터 체스를 잘 뒀다. 체스마스터를 초빙해 교육받을 정도로 열정적이기도 했고.

아마 체스를 두자고 한 것도 쿠엔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설마 내기를 걸진 않았겠지.”

율은 눈을 갸름하게 뜬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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