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여기 어깨 쪽 장갑에 새겨진 문양은 뭐야? 엔첸세의 상징은 아닌 거 같은데.”
율이 사진 속 거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점검 중인 거병의 모습과 함께 엄마가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밀레나는 거병의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우정 표시야.”
“우정 표시?”
“나도 속사정은 몰라. 엄마가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니까. 나도 궁금해서 며칠 동안 물어봤는데, 엄마는 친한 친구들끼리 새긴 징표라고만 말해줬어. 그게 누구인지, 어떤 이유에서 이런 문양을 정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예전 같았으면 뭔가 심오한 뜻이 있을 거라고 믿었겠지만, 너희 어머니 성격상 별 의미 없을 수도 있겠네.”
“그럴 가능성이 크지.”
율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근데 왜 하필 파이 모양일까. 이거 누가 봐도 파이잖아.”
“파이 맞아. 정확히는 사과파이.”
“사과파이? 지인 중에 요리사가 있었던 걸까? 그분이 만든 사과파이가 워낙 맛있어서 이렇게 생긴 걸지도.”
“엄마라면 그러고도 남아.”
“국보급으로 취급받는 거병에 사과파이 그림이라. 왠지 해학적이라 마음에 들어.”
율이 사진첩을 계속 넘겼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같은 사진을 반복해서 보는데, 표정은 점점 더 밝아졌다.
“안 질려?”
“어떻게 질려. 필렌 님과 블루아이가 동시에 찍혀 있는데.”
“네가 우리 엄마를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네.”
“몰랐으면 이제라도 알아둬. 알아뒀다가 나중에 슬쩍 언급해주고. 동기 중에 율이라는 애가 있는데 엄마를 엄청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나면.”
밀레나가 웃으면서 찻잔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라운지 입구에 서서 이쪽을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시선이 잠깐 마주치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는 얼굴은 아닌데. 밀레나는 갸웃거리다가 남자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율. 널 아는 사람인가 본데?”
밀레나는 율을 툭 치면서 말했다. 사진첩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율이 “어?” 하면서 머리를 들었다.
“뭐야.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율이 남자를 보자마자 한 소리였다. 테이블 반대편까지 걸어온 남자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일 때문에 둔에 들렀다가 소식을 접했어. 스콜라 생도가 아직 둔에 남아 있다고. 네 생각이 나서 인사차 들렀지.”
말을 끝낸 남자가 밀레나를 바라봤다.
“쿠엔 바르체입니다.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의례적인 사과라 밀레나는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율. 난 이만 가볼게. 얘기 나눠.”
“잠깐만!”
율의 눈매가 반달로 휘었다. 짓궂은 웃음이었다. 이렇게 웃는 율은 골치 아픈 일을 불러오곤 했다.
“아까 내가 말했지? 괜찮은 사촌이 한 명 있다고.”
“설마….”
“걔가 얘야. 만난 김에 잠깐 어때?”
율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쿠엔이 끼어들었다.
“괜히 어색하게 만들지 말고 보내 드려. 실례되는 일은 자중하라고 몇 번 듣지 않았어?”
처음 보는 남자지만 방금 그 대사는 마음에 들었다. 밀레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몇 번 들은 정도로는 안 고쳐질걸요?”
“제가 좀 더 타이르겠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율이 쿠엔에게 손짓했다.
“앉아. 밀레나, 앉혀도 되지?”
쿠엔이 눈빛으로 의중을 물어왔다. 밀레나는 잠시 고민했다.
방으로 돌아가 늘어지게 잠을 자거나, 아껴둔 소설을 읽는 것도 좋지만 잠깐의 대화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무엇보다 ‘바르체’란 가문명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밀레나 엔첸세입니다.”
이름을 들은 쿠엔이 작게 엔첸세, 라고 중얼거렸다.
“만나 뵙기 힘든 분을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저는 운이 좋네요.”
쿠엔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스콜라 훈련장에 오시면 자주 볼 수 있을 거예요.”
“하하, 그렇긴 하죠.”
쿠엔이 손을 살짝 들어 지배인을 불렀다. 쿠엔이 차를 주문하는 동안 율이 밀레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바르체가 뭘 하는 집안인지는 알고 있지?”
“모를 리가 있나.”
“그러면 됐어. 아, 첫인상은 어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
“너무 깐깐하게 보진 말아줘.”
“깐깐하게 볼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그냥 얘기만 잠깐 하다가 올라갈 거니까.”
“그러지 말고 자세히 봐봐. 진짜 괜찮은 애니까.”
율을 보며 으쓱거렸다.
“휴일인가 보네요.”
주문을 마친 쿠엔이 입을 열었다. 밀레나는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이렇게 여유를 즐기고 있죠.”
“율이 옆에 있으면 여유를 즐기기 어려울 텐데요.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이라.”
“다행히 오늘은 얌전히 있어 주네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적당히 말을 섞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차례였다. 구태의연한 인사치레를 길게 이어나가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거병 개발 건 때문에 둔에 오신 건가요?”
바르체.
대대로 거병 관련 사업을 이어온 가문이었다. 황가와 의회의 허락을 받은 몇 안 되는 민간업체로, 제국의 거병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이름이었다.
“예. 개발뿐만 아니라 납품 의뢰도 몇 개 있어서 여기까지 왔죠.”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이 부수적인 정보도 덧붙이는 쿠엔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좀 더 일찍 들어왔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둔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
밀레나는 율과 시선을 교환했다. 모듈 탈취 건을 쿠엔이 알고 있는 건가?
“말씀하셔도 됩니다. 모듈 관련 건은 우리 가문도 알고 있습니다. 보안 단계가 내려가 여러분에게도 전파됐겠죠.”
“역시 바르체네요. 그런 기밀도 전부 알고 있고.”
“거병과 연관된 일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죠.”
쿠엔이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안경집을 꺼냈다.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낸 후 안경을 썼다.
“시력이 더 안 좋아진 거야?”
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안 내력이라 어쩔 수 없나 봐.”
쿠엔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밀레나를 바라봤다.
“사실 저도 스콜라 생도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허약해서 시험조차 치르지 못했죠. 게다가 눈도 이 모양이고. 가업을 안 잇고 전장을 누비는 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사람 일이란 게 뜻대로 되는 게 없네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약점을 감추지 않고 전부 드러냈다. 자신감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도 율에게 시달리지 않았을까?
“혹시 율이 이런 말 하지 않았나요? 괜찮은 사람이 있으니까 한번 만나 보라고.”
“그 말 지겹도록 들었죠. 밀레나 씨도 설마….”
“예. 방금 전까지 들었어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 들먹였나 보네요.”
“정확해요.”
“불편한 자리가 될 뻔했네요.”
밀레나는 율을 힐끔 본 다음 말했다.
“오지랖 넓은 친구 때문에 불편해질 뻔했지만, 서로 관심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겠네요.”
“마음이 통했군요.”
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그러지 말고 서로를 자세히 보라니까. 난 두 사람이 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밀레나는 쿠키가 담긴 그릇을 든 다음 율한테 들이밀었다.
“과자나 먹고 있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쿠엔도 접시에 젤리를 덜어 율 앞으로 밀었다.
“이것도 먹고. 다과상은 말끔히 비우는 게 예의라고 하니까.”
“그런 예의 들어본 적도 없거든?”
율이 꿍얼대면서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블루아이는 잘 있나요?”
쿠엔이 찻잔을 들며 얘기했다.
“잘 있을 거예요. 격납고 문을 안 연지 꽤 돼서 확실하진 않지만. 예전에 블루아이를 정비할 때 같이 오셨나요?”
“아니요. 가고 싶었지만 배워야 할 게 많아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블루아이 점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래도 다음 오버홀 때는 참관할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제가 블루아이를 이어받게 된다면 그땐 쿠엔 씨가 담당정비관으로 오시겠네요?”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율이 포크를 가볍게 흔들며 끼어들었다.
“블루아이를 물려받는 게 네가 아닐 수도 있잖아. 필렌 님께서 은퇴하시면 다른 거병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걸.”
“반드시 이어받을 거야. 황제 폐하께서 선언하게끔 만들 거고.”
거병은 국가 단위에서 관리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몇몇 거병은 황제의 윤허하에 개인이 소유한 상태였다.
블루아이도 그중 하나였고.
물론 소유권이 계속 유지되는 건 아니었다. 소유권자가 죽거나 권리를 상실하면 다시 성도 거병관리국으로 귀속될 것이다.
전략병기가 사유지 격납고에 있는 게 위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기동하려면 어차피 거병관리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애초에 연료인 마나응축봉은 개인소유가 불가능하며, 개인이 만들 수도 없다.
거병을 저택에 두는 건 일종의 명예인 것이다. 보호 감찰을 위해 관리국 인사가 상시 대기하는 걸 생각하면 좀 불편한 명예이기도 하고.
“추후에 뵙게된다면 그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쿠엔이 말한 뒤 차를 마셨다.
밀레나도 같이 차를 마시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율을 바라보는 쿠엔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안경 너머에 있는 쿠엔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밀레나와 시선이 맞닿았다. 쿠엔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양해를 구하는, 침묵을 부탁하는 몸짓이었다.
단숨에 이해됐다. 약점을 드러내던 첫인사,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
율을 보러 왔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단지 감춰진 감정이 더 있을 뿐.
아니, 이렇게 노골적인데도 모른다고?
밀레나는 한심한 눈빛을 담아 율을 바라봤다. 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쿠키를 포크로 찍고 있었다.
“율.”
“왜?”
“너 시내 한 바퀴만 뛰고 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눈치 없이 왜 이래. 무슨 뜻인지 알잖아.”
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얘기 나눠. 난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니까 나 올 때까지 기다려. 알겠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둘이 어딜 가야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율이 쿠엔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웃음이 나오는 응원이었다. 쿠엔이 안경을 벗은 다음 얼굴을 쓸어내렸다.
율이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다음 말을 꺼냈다.
“남의 연애사 참견하는 것도 관심 없고, 아니, 관심 없는 정도를 넘어 싫어하는 편이에요. 근데 이번에는 말해야겠네요. 율을 좋아하시죠?”
쿠엔은 주저 없이,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대놓고 표현하고 있죠.”
“그러니까요. 처음 보는 저도 알아챘는데, 율은 뭐 하는 거예요?”
쿠인에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차라리 물어보는 게 어때요? 약혼식도 없던 일이 됐으니 시기도 나쁘지 않고.”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쿠엔이 안경다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쉽지 않다? 밀레나는 식은 차를 음미하며 쿠엔의 말을 기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