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어릴 땐 마냥 엄마가 좋았어. 다들 그렇지 않아? 아니라고? 뭐, 어쨌든 난 좋았어.
엄마가 집으로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유모 손을 붙잡고 창가에 앉아 계속 밖을 봤어.
유모는 날 뜯어말리며 이젠 자야 한다고 했지만 난 듣지 않았지. 기억이 약간 가물가물한데 한밤중에 혼자 저택 바깥으로 나간 적도 있다고 해.
유모 속을 많이 썩였지. 보고 싶다, 우리 유모. 이제는 아프지 않은 곳에서 잘 쉬고 있겠지.
아무튼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난 엄마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어.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말이야.
엄마는 그런 날 옆에 앉혀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줬어. 지금 생각하면 다섯 살짜리 꼬마한테 해줄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엄마도 참.
무슨 얘기였냐고?
시시콜콜한 것부터 지금 생각해도 오싹한 것까지 전부 다. 엄마는 당신이 겪은 걸 전부 얘기해줬어.
난 그걸 이해하면서, 때론 이해 못 하면서 꾸역꾸역 들었고. 듣는다는 것 자체가 좋았거든. 참고로 엄마 목소리는 이리엘데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좋아. 군인이 아니라 성악이나 연극을 했어도 성공했을 거야.
왜 그렇게 봐? 정말이라니까.
은퇴하시고 어느 날 갑자기 무대에 올라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엄마는 가창력도 좋으니까.
물론 다방면으로 대단한 엄마지만, 거병기사의 재능이 가장 도드라진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당대의 엔첸세가 1등 귀족의 지위를 획득한 건 엄마가 거병기사였기 때문이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스콜라에 들어와 거병기사를 목표로 삼은 것도 엄마의 영향이 커.
기사로서의 권위나 혜택, 정치적인 입지보다 더 중요했던 건 엄마를 따라잡고 싶은 도전 욕구였어.
내가 스콜라 시험을 치르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휴가를 얻고 날 가르치셨어.
어땠냐고?
말도 마. 차라리 파난 교관한테 일대일로 수업받고 말지, 그때로는 안 돌아갈 거야.
존경하는 엄마지만 그것과 별개로 무자비한 구석이 있거든.
내가 그때 여섯 살이었어. 배운 게 있어서 아는 건 많지만, 그걸 이해한 시기는 아니잖아.
스콜라 시험이 어렵다는 말은 들었어도 그게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감을 못 잡았지.
엄마는 날 가르치겠다고 선언한 뒤에 이렇게 말했어.
‘앞으로 1년 안에 네가 뿌리를,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면 스콜라 얘기는 없던 걸로 할 거야.’
율. 그때의 내가 지금의 너랑 똑같은 눈빛으로 엄마를 봤어. 엄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 뒤로 상냥하게 날 보듬어주던 엄마는 없어지고, 악랄한 교관이 우리 집에 살게 됐어.
악랄하단 표현도 많이 순화한 거야. 그때 엄마는 정말 무서웠거든.
근데 웃기지 않아?
마나라는 게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영역이잖아. 스스로 개척하고 깨닫는 수밖에 없는데, 엄마는 그 어려운 길을 나한테 강요한 거야.
뭐. 결국 마나를 알게 됐고 스콜라에 합격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엄마도 참….
덕분에 동기 중 최연소로 들어가긴 했지. 육체가 해야 할 일을 마나로 조금씩 대체하면서 간신히 시험에 통과했고.
총수님께서 다섯 살에 스콜라에 들어갔다고 했으니, 나도 엇비슷한 건가?
알았어. 그냥 해본 소리야. 그렇게 째려보지 마. 나도 총수님과 날 비교할 만큼 염치없지는 않아.
어쨌든.
너도 예전에 나한테 질문했었지?
교관들이 가르쳐주지도 않은 신체술을 어떻게 배웠냐고. 이제 알겠지? 답은 우리 엄마야. 엄마 밑에서 지독하게 구르니까 배우게 되더라고.
마나와 달리 신체술은 배울 수 있는 영역이니까.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화가 나네.
여섯 살짜리가 잠깐 교육받은 걸로 의기양양해서 스콜라 얘기를 꺼냈으면, 현실을 직시하도록 차분하게 설명해 줘야지.
어떻게 그 어린애한테 다짜고짜 훈련을 시켜?
내가 원해서 엄마가 가르친 게 아니냐고?
맞긴 해.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미안. 그때 일을 기억하면 나도 모르게 격해져. 엄마도 그 당시 일은 약간 미안한지, 그때 얘기만 꺼내면 말을 돌리셔.
유일한 약점 같은 거지. 엄마한테도 물어봤어. 당시에 왜 그렇게 했냐고.
뭐라고 하셨게?
‘내 딸이라면 응당 해낼 줄 알았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어.
응? 왜 웃냐고?
어쨌든 인정받은 거니까.
우리 엄마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
나도 헷갈릴 때가 많아. 각종 무훈으로 접한 엄마는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군부의 정점이자 냉철한 군인인데, 내가 아는 엄마는 따뜻하고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거든.
엄마를 보고 싶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유모 장례식 때 한 번, 그리고 몇 달 뒤에 한 번 본 뒤로는 나도 편지로만 소식을 접하고 있어.
글쎄. 나도 엄마가 어디서 뭘 하는지 자세히 몰라. 군부의 비밀 작전을 수행 중일 수도 있고, 태평하게 여행 중일 수도 있어.
올해는 안식년이니까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모험 중일지도.
이러다가 불쑥 찾아와서 나한테 잘 있었냐고 인사할지도 몰라.
엄마라면 그러고도 남지.
* * *
대체 얼마 만일까. 다른 사람한테 엄마에 관해 주절주절 떠든 건.
“나와 함께 있던 엄마는 그런 느낌이었어. 그리고 스콜라에 들어와 알게 된 엄마는 또 다른 사람이었지.”
밀레나는 차로 목을 축였다. 차가 식으면서 단맛과 신맛이 강해졌다. 이것도 나쁘진 않네.
“네 얘기를 들으니까 더욱더 뵙고 싶어진다. 가끔 스콜라에 얼굴을 비추신다는데, 올해는 오시려나?”
율이 말했다.
“나도 몰라. 아까도 말했지만 엄마는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시거든. 엄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손에 꼽을걸?”
“최근 국경에서 봤다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
“국경?”
“‘볼로스’ 쪽이라는데, 일단 소문일 뿐이니까.”
“볼로스라면 연합왕국하고 맞닿은 곳이네. 설마 연합왕국으로 넘어가신 건가?”
“외교단이 출발했다는 소식은 없으니, 만약 넘어가셨다면 개인적으로 가신 거겠지?”
“엄마라면 그러고도 남지.”
휴전협정도 맺었고 상단들도 오고 가는 시기인 만큼, 연합왕국으로 넘어가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아니지. 엄마는 문제가 되려나?
“만약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
“여행 목적이라면 문제 될 건 없지. 아무리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라고 해도 지금은 휴전 중이니까. 오히려 예우하면 예우했지, 적대하진 않을 거야. 연합왕국도 너희 엄마를 무례하게 대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한때는 엄마 이름보다 저 호칭을 더 많이 들었다.
덕분에 푸른 기사의 딸이라는 재미없는 이름으로 한참 불렸고.
“너희 어머니께서 타시던 거병 말이야. 그거 자택에서 보관 중이라는 설이 있던데, 진짜야?”
“이젠 비밀 축에도 끼지 못하는 얘기 아니야? 다 아는 사실인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러면 어릴 때 그 거병을 가까이서 봤겠네? ‘블루아이’ 말이야.”
“봤지. 그걸 조종해보는 꿈도 엄청나게 꿨고.”
의회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저택 격납고 안에는 여전히 블루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거병을 정비하면서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이게 다시 움직이는 날이 안 올 거야, 라고.
“이번 견학 과정 끝나고 나면, 나 좀 초대해 주라.”
“뭐?”
“너희 집으로 나 좀 초대해 주면 안 될까? 블루아이를 실물로 볼 수 있다면 뭐든 할게. 진짜야. 네 수발도 한 이틀 정도는 들 수 있어.”
“초대하라고 강요하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야?”
율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렇게 절박한 율을 보는 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스콜라 정규 연회에 같이 갈 파트너가 없다며 도움을 요청했을 때고.
“보여주는 건 어렵지 않아. 저택으로 온 손님들에게 자주 공개했으니까.”
“그렇지? 그럼 나도….”
“하지만 엄마가 허락해야 해.”
“응?”
“못 들었어? 엄마가 허락해야 한다고. 그 기체는 내 소유가 아니잖아. 지금도 오토마타에 등록된 건 딱 한 명이야. 바로 우리 엄마. 그러니 소유자의 허락 없이는 접근할 수 없어.”
“멀리서 보는 건?”
“격납고 문을 투시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봐.”
“네가 열어주면 되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블루아이라고. 꼭 보고 싶어.”
밀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나도 격납고는 멋대로 못 열어. 엄마의 서재도 멋대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곳만큼은 손댈 수 없어. 거긴 엄마의, 아니, 필렌 엔첸세의 공간이니까.”
엄마의 이름을 언급하자 율이 고개를 떨궜다.
“필렌 엔첸세의 공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밀레나는 시무룩해진 율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보고 싶어?”
“당연하지. 블루아이가 어떤 기체인데.”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밀레나는 이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에 넣어둔 자그마한 사진첩을 들고 다시 라운지로 내려갔다.
저 멀리서 율이 고개를 내빼고 기다리는 게 보였다. 잠깐이지만 툴이 생각났다. 머리털이 곱슬곱슬한 것도 조금 닮긴 했네.
“사진첩?”
율이 말했다. 다들 하나씩 갖고 있을 테니 금방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설마 블루아이 사진이 있는 거야?”
“있으니까 가져왔지. 잠깐만.”
사진첩에 둘린 띠를 풀었다. 첫 장에는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성도에서 본 공식 사진하고 느낌이 다르네. 실례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너희 어머니 되게 장난꾸러기 같으셔.”
“실례가 아니라 정확히 본 거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인데도 아름다우시네. 근데 옆에 있는 이 귀여운 애는 누구야?”
“누구겠어?”
“동생? 아니면 언니?”
“사진첩 덮어도 될까?”
율이 손을 내저었다.
“알겠어, 그만 놀릴게. 근데 어릴 땐 되게 귀여웠네. 지금은 뭐, 까탈스럽기만 하고. 5, 6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도 몰라.”
밀레나는 눈웃음 지으며 다음 장을 들췄다. 오랜만에, 그것도 친구와 함께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여기 있네.”
율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뺨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밀레나는 머리를 살짝 기울여 율의 머리를 툭 쳤다. 율이 배시시 웃으며 조금 떨어졌다.
“이게 교보재로만 접하던 푸른 거병이구나. 조잡한 데생이 아니라 실제 사진.” 율의 눈이 풀려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오는데, 내버려 두면 침까지 나올 것 같았다.
“기동하지 않아도 눈이 푸른빛을 내네.”
“특수한 염료를 발랐대. 그래서 마나가 돌지 않아도 저런 빛을 내고.”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야간작전에 유용하다거나, 아니면 좀 더 멀리 볼 수 있다거나.”
밀레나는 옆머리를 귀 쪽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멋.”
“멋?”
“엄마가 말해줬어. 원래는 투명한데 멋이 없어서 푸른 염료를 발랐다고.”
“진짜야? 전술적인 이유 없이 그냥 멋 때문에 색을 칠했다고?”
“안 믿기지? 근데 믿어야 해. 그게 진실이니까.”
“그럼 붉은 염료를 발랐으면…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가 아니라 붉은 기사였겠네.”
“아마도 그렇겠지?”
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렴 어때! 그래도 내 우상이자 영웅인 건 변함없는걸. 다른 사진 또 없어?”
“있어. 잠깐만.”
밀레나는 미소 지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