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못 보던 건데.”
밀레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뒤를 보았다. 율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이 스카프, 원래 하던 거 아니지?”
“어. 선물받은 거야.”
“스카프를? 뭐야. 드디어 약혼자가 생긴 거야?”
율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율이 입은 펑퍼짐한 상의가 잠깐 부풀어 올랐다가 꺼졌다.
“친구한테 받았어.”
“연애도 좋지. 친구부터 차근차근 연정을 쌓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아. 집안끼리 인사는 했고?”
“난 친구라고 했을 텐데. 왜 멋대로 살을 붙여.”
“진짜 그냥 선물받은 거라고? 스카프를? 그 친구라는 놈은 대체 누구야? 설마 여자?”
“마음껏 상상해.”
찻잔을 다시 들었다.
교육도, 훈련도, 행사도 없는 느긋한 날이었다. 다음 주부터 바빠진다고 하니 여유를 만끽해놔야 했다.
“너 말이야, 약혼자도 없고 만나는 남자도 없지?”
율이 지배인에게 차를 부탁한 뒤 말을 걸어왔다.
“알면서 왜 물어.”
“그러면 우리 쪽 사람 만나볼래? 제법 괜찮은 사촌이 한 명 있는데. 나이도 그다지 차이 안 나. 지금 열여섯일걸?”
“관심 없어.”
“언제까지 관심 없을 건데. 너랑 안면을 튼 지 이제 3년인데, 너 그동안 사교장에 얼굴 비춘 적 거의 없잖아. 따로 나가는 모임 있어?”
“그런 거 나갈 시간에 체력단련이나 할래. 필요하다면 나가긴 하겠지만, 대부분 불필요하잖아.”
밀레나는 찻잔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차향이 좋았다. 블랜딩한 찻잎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좋은 짝 다 사라지고 이상한 놈하고 결혼해야 할 지도 몰라.”
“정 없으면 안 하면 되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엔첸세란 이름값을 지닌 가문이 후손을 안 남기면 그것도 손해야.”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해. 누가 정말 안 한대?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면 나도 식 올릴 거야.”
“그러니까 미리미리 생각해 둬야지. 엔첸세를 탐내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 가문명 버리고 네 옆으로 들어올 남자를 줄 세우면, 막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을걸?”
밀레나는 턱을 괴며 율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넌? 파혼하고 나서 계속 혼자잖아.”
“갑자기 아픈 곳을 찌르네.”
율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날씨가 습해서 그런지 율의 머리카락이 여느 때 보다 더 곱슬곱슬했다.
“열일곱. 적령기긴 해. 우리 집안 어른들이 날 예뻐해 줘서 눈치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경은 쓰이지.”
본토 귀족 사회에서 열일곱이면 성대한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약혼식을 올리고 1년에서 3년 사이에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율은 약혼식 직전에 파혼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집안끼리 원만하게 정리된 걸 보면 큰 문제는 아니었으리라.
“말이 나온 김에 물어봐도 될까?”
“파혼한 이유?”
“어.”
“스콜라를 그만둘 것. 이게 약혼식 조건이었어. 그쪽 집안은 여자가 군과 관련된 걸 좋게 안 보는 모양이더라. 가문명을 이어받고 내조하는 걸 바라는 눈치였어.”
“그러기엔 네 재능이 아깝지 않아?”
율은 길쭉한 신장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싸움꾼이었다. 지구력이 약해 난전으로 이끌고 가면 승리를 거둘 수 있지만, 그 과정이 절대 쉽지는 않았다.
전투도 전투지만, 율의 진가는 전술에서 나왔다. 팀장이 전략을 제시하면 율은 전략을 완성시킬 전술을 제공했다.
산발적인 모의 전투 훈련이 있을 때면 다들 율을 섭외하려고 안간힘을 쓸 정도였다.
“난쟁이. 이제 날 인정하는 거야?”
율이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길쭉이.”
밀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율이 작게 웃었다. 그 사이 지배인이 차를 가져왔다.
“한 잔 더 부탁할게요.”
밀레나는 빈 찻잔을 밀며 말했다. 지배인이 묵례하며 찻잔을 들고 물러났다.
“파혼하고 난 뒤에는 한동안 조용하다가 요즘 다시 얘기가 들어와. 개중에는 가문명을 자기가 이어받겠다고 하는 남자도 있어. 3등 귀족이지만, 나름 괜찮아 보여.”
“3등 귀족이면 너희 집안 어른들 눈에 안 찰 텐데?”
“내가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에는 받아주실걸. 카르벤 이름을 내가 잇는다면 어른들도 좋아할 테고.”
율 카르벤. 가문의 이름을 잇느냐, 버리느냐. 등급 있는 귀족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선택해야 할 문제였다.
“그 남자하고 잘해보려고?”
“일단 몇 번 더 만나 보려고. 서로 바라는 게 뭔지 아직 제대로 말 않았으니까. 권위를 원하는지, 가정을 바라는지, 아니면 사랑을 갈망하는지.”
“사랑이라.”
단지 좋아서, 사랑해서 결혼하는 귀족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남녀 간의 정보다 우선시되는 게 많기에 사랑이 뒷전으로 밀릴 뿐.
“너희 어머니는 어떠셔? 네 나이가 지금 열 살이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했을 것 같은데.”
밀레나는 말없이 율을 응시했다. 율이 슬그머니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겠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그냥 친구로서 궁금했을 뿐이야. 네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물론… 너희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도 아주 조금 궁금하고.”
“아주 조금?”
차를 마시며 되물었다. 율이 입을 씰룩거리다가 대답했다.
“많이, 엄청, 진짜, 정말로 궁금하다. 됐냐?”
밀레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얘기가 나오면 딱 잘라 말했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근데 지금은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 가하란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순진한 꼬마.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말을 돌리거나 감추는 법이 없던 아이. 밀레나는 손을 머리 뒤로 돌려 스카프를 매만졌다.
“친구. 우리가 친구였었나?”
그 말을 하자마자 율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눈썹이 살짝 위로 들리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안해. 내가 괜히 말을 걸었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어머닌, 아니, 엄마는 내 의사를 존중해줘.”
밀레나는 율의 손목을 붙잡았다. 일어섰던 율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하기 싫은 거 아니었어?”
율이 질문했다.
“다른 애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면 저리 가라고 했겠지.”
“그러면 방금 그건 뭐야? 우리 친구였었나, 하고 싫어하는 투로 말했잖아.”
“농담인데.”
“뭐?”
“친구끼리 놀리는 것도 못 해?”
밀레나는 씩 웃어 보였다. 율이 빤히 바라보다가 뚱한 표정을 짓는다.
“너 어디 아파?”
“아니. 멀쩡해.”
“아니야, 아픈 게 분명해.”
위아래로 흘겨보던 율이 차분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내가 아는 밀레나 엔첸세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상한 농담도 안 했고.”
“그냥. 스콜라에서 진흙밭을 3년이나 같이 굴렀는데, 이렇게 친구라고 말해본 적이 있었나 싶어서. 그게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론 살갑기도 하고.”
율이 팔짱을 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방금 처음 친구라고 말해본 것 같네.”
“그렇지?”
“그러게. 희한하네. 친구. 이렇게 말로 꺼내 보니 뭔가 쑥스럽다. 매번 동기, 동기 해서 그런가?”
“그럴지도 몰라.”
율의 눈이 갸름해졌다. 기발한 전술을 발견해 냈을 때처럼.
“스카프를 준 사람. 그 사람이구나? 네가 좀 변한 이유.”
“뭐가?”
“네가 먼저 친구라고 했잖아. 친구한테 받았다고. 뭐야? 그냥 친구 아니지?”
“또 멋대로 상상하네. 코흘리개한테 받은 거야.”
“코흘리개? 몇 살인데.”
“일곱 살. 아마 맞을 거야.”
“진짜 애네. 근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너도 애잖….”
밀레나는 포크로 젤리를 쿡 찍은 다음 율을 향해 치켜들었다.
“애, 뭐라고? 계속 말해봐.”
“내가 뭐라고 했어? 잘못 들었겠지. 스콜라 동기끼리 나이 언급은 불문율인데, 내가 설마 널 애라고 했겠어? 열 살이나 일곱 살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했겠냐고.”
“이거나 먹어.”
포크를 앞으로 쑥 밀었다. 율이 젤리를 덥석 물었다.
“그 일곱 살 귀여운 친구는 어디 가문인데? 아니면 유명한 관료 집안인가? 그것도 아니면 군부 쪽?”
“둔에 태어나고 자란 시민.”
“그냥 시민?”
“어.”
“요즘 휴일에 혼자 밖에 나가서 놀더니, 걔를 만난 거였구나?”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살이랑 놀아주려면 피곤할 텐데. 나도 경험이 있잖아.”
“그렇지도 않아. 말이 꽤 통해.”
“그건 네가 아직 애라서….”
“한 번만 더 그러면 젤리 대신 그 입술을 찍어버릴 거야. 참고로 이건 농담이 아니라 경고고.”
“경고라면 무시할 수 없지.”
율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근데 말이 꽤 통한다는 게 어떤 의미야?”
“말 그대로야. 교육을 잘 받았어. 성질을 부리기보단 침착하게 대화로 이끌어 가고.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말이야. 물론 애다운 면도 많긴 하지만.”
“둔은 교육기관이 잘 갖춰져 있으니까. 성공한 상인의 아이인가?”
“너무 많이 묻지 마. 그냥 시민이라고만 알아둬.”
율이 스카프를 유심히 바라봤다.
“한번 봐도 돼?”
“이거?”
문제 될 건 없으니 풀어서 보여줬다.
“음, 불량품에 가깝네.”
“불편한 자리에 하고 갈 수 있는 선물은 아니지.”
“이런 걸 선물로, 그것도 스카프를 골라서 줬다면 둘 중 하나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거나, 너무 잘 알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야. 스카프를 선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몰라. 그래서 편하게 하고 다닐 수 있고.”
밀레나는 구석에 수놓아져 있는 동물을 가리켰다. 여전히 고양인지 강아지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이다.
“이것도 나름 귀엽고.”
“이게 귀엽다고? 이 엉성한 게?”
“잘 봐봐. 미술은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개성도 중요하잖아.”
“개성적이긴 하네. 너무 개성적이라 뭘 표현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개인가? 고양이? 호랑이? 아니면 마수?”
“아무리 그래도 마수는 아니겠지.”
스카프로 다시 머리를 묶었다. 며칠 사용했을 뿐인데, 오랫동안 몸에 지녀온 물건처럼 편했다.
“선물은 마음이 중요한가 봐.”
“중요하지. 근데 마음보다 중요한 게 더 많아.”
율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그보다 너희 어머니 얘기 좀 해줘.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놓칠 순 없지.”
“아까 말했잖아. 엄마는 날 존중해 준다고.”
“그건 알겠으니까 어떤 분이신지 얘기해줘. 근데 또 엄마라고 하네. 원래 편하게 불렀어?”
“집에서는. 근데 스콜라에 들어간 후부터는 말투를 바꿔보려고 노력중이야. 나도 결국은 엔첸세의 일원이니까.”
“하긴. 어쩔 수 없지.”
밀레나는 턱을 살짝 들었다.
엄마.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도전 욕구가 생긴다.
엄마는 세상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어른이자, 사랑하는 가족이며, 동시에 반드시 이겨내고 싶은 우상이었다.
“엄마는 내가 넘어야 할 벽이야.”
그렇게 서두를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