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64화 (37/558)

제64화

“저 여관에 좀 다녀올게요.”

“거기서 저녁 먹을 거야?”

룽네가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가하란은 현관문을 밀면서 말했다.

“아니요. 저녁은 아줌마랑 같이 먹을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고. 마차 지나갈 때는 알지?”

“네. 조심해서 갈게요.”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귀족이 애용하는 신발가게. 향긋한 향이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점원들까지. 근처 시장에서는 체험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신발 가격을 들었을 때는 정말 아찔했었다. 용돈과 심부름해서 돈을 모은다고 해도 몇 년을 모아야 할 것이다.

막상 신을 수나 있을까? 아까워서 품고 다닐지도 모른다.

같이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옆에 있어서 잠깐 착각했다. 같은 세계에 사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정말 다르구나. 테리가 한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낯설었지만 그래도 밀레나가 어려워진 건 아니었다. 조심히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던 누나는 평상시 똑같았으니까.

뛰듯이 걷던 가하란이 걸음을 멈췄다.

언젠가 밀레나는 둔을 떠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쓸쓸했다. 오래 있어 달라고 떼쓴다면 누나는 들어줄까?

가까워진 사람이, 친구가 멀어진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알고는 있었다. 만났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아빠는 이별이 있기에 순간들이 소중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잠시 멈춰 섰다. 어느덧 루드 여관이 있는 거리까지 왔다.

품속에 넣어둔 연극 초대권을 재차 확인한 뒤 여관으로 뛰어갔다.

“안녕하세요.”

여관 카운터에 있는 안소니에게 인사했다. 점심시간이 끝나서인지 내부에 손님은 없었다.

“테리하고 제니는 잠깐 심부름 갔다.”

“금방 돌아오나요?”

“곧 올 테니 잠깐 앉아 있어라.”

길쭉한 카운터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1년 전만 해도 낑낑거리며 올랐는데, 이제는 쉽게 앉을 수 있었다.

“온 김에 저녁 먹고 가라.”

“아니에요. 룽네 아줌마랑 같이 먹기로 했어요.”

“그러면 이거라도 먹어라.”

안소니가 쿠키를 내어주었다. 생김새는 이상했지만, 맛은 좋았다. 손님용으로 내놓을 수 없는 걸 모아둔 모양이다.

“올란트는?”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했어요. 늦게 들어오신다고 했는데, 아예 안 들어오실 수도 있어요.”

“다시 바빠진 모양이구나. 여기저기서 찾을 테니 그럴 만하지.”

가하란은 쿠키를 반으로 쪼개며 물었다.

“아저씨. 월말이 되면 손님이 많겠죠? 그만큼 바쁠 테고요.”

“연합왕국 쪽 상단이 계속 들어온다면 아마 바쁘겠지. 한동안 통행이 불가했던 만큼 월말에도 밀려들 거다.”

안소니가 포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가게 바쁜 건 왜? 와서 도와주려고?”

“언제든 불러주셔요. 도와드릴게요.”

“그냥 해본 말이다. 일손은 우리 애들이면 충분해. 넌 심심할 때 와서 신나게 놀기나 해라.”

“그래도 정말 바빠지면 얘기해 주세요. 언제든 와서 거들게요.”

“기억은 해두마.”

안소니가 카운터에 손을 올리며 다가왔다. 아저씨 얼굴이 가까워진다.

“월말에 애들하고 놀게?”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생겨서요. 시간이 되면 테리 형이랑 제니랑 여기 가려고요.”

가하란은 연극 초대권을 꺼냈다. 안소니가 봉투 안에 든 초대권을 유심히 살폈다.

“이런 건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받았어요.”

누구한테 받았는지 설명하려니 좀 복잡했다. 고민하고 있자 안소니가 손을 저었다.

“출처가 궁금한 건 아니니까 괜찮다. 그보다 이런 곳은 격식을 차려야 할 텐데.”

“단정하게만 입고 가면 된다고 했어요. 신발은 발가락이 안 보이면 되고요.”

“구두야 맞춰둔 게 있으니까 상관없다. 제니 것도 있고. 초대권이 네 장이니 남은 한 명은 올란트겠지?”

“네. …죄송해요.”

안소니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그리고 난 연극같이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 가자고 해도 안 갔을 거다.”

가하란은 초대장을 돌려받은 후 안소니를 보았다.

“하루 정도는 괜찮다. 바쁘더라도 시간을 만들어 줄 테니까 애들하고 보고 와.”

“감사합니다.”

“감사는.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런 극장은 자주 데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안소니가 쌓아놓은 포대를 어깨에 이었다.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데 아저씨는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카운터 좀 보고 있어라. 손님은 안 올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네! 잘 지키고 있을게요.”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남은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창문 밖을 바라볼 때였다.

맑은 쇳소리가 났다. 현관 종이 앞뒤로 흔들리며 내는 소리였다. 손님이 온 것이다.

키가 제법 큰 남자였다. 허리에 두른 혁대에 칼집이 달려 있었다. 왼손에는 둥글게 휜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활대 같았다. 탄성이 좋은 활대는 활시위를 풀면 저런 식으로 말린다고 들었다.

남자가 카운터를 바라봤다.

어서 오세요, 가하란이 인사말을 꺼내기 직전이었다.

-희한해.

불쑥 솟아난 거북, 산페르가 시야를 가렸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나무 상자를 밟고 올라간 상태라 하마터면 뒤로 나뒹굴 뻔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가하란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앞을 갑자기 가로막다니.

-가만히 있어. 좀 이상해서 그러니까.

“뭐가요?”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 산페르였다. 얼쩡거리는 산페르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들이 한 명 더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남자가 말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걸어온 상태였다. 하지만 가하란은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산페르가 시야를 계속 가렸다.

파리를 내쫓는 척하며 손을 휘저었지만, 산페르는 비켜주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일단 인사했다. 손님이 당황하지 않도록.

“주인은 어디 가고 네가 카운터를 보고 있니?”

“안소니 아저씨라면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말한 다음 고개를 푹 숙였다. 눈앞에 자리를 튼 산페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제발 비켜 달라고.

“무슨 문제 있냐?”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괴상한 거북 정령이 눈앞에서 아른거려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앞에 있는 손님은 무슨 생각 중일까. 이상한 꼬마라고 여길까? 아니면 수줍음이 많다고 생각할까?

“구치, 우리 애 괴롭히지 말라고.”

안소니의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어설픈 미소를 지은 후 몸을 숙여 카운터를 벗어났다.

“아저씨! 내일 다시 올게요!”

“애들 곧 돌아올 텐데, 조금만 기다리지 그러냐.”

“아니에요.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내일 다시 와서 테리 형한테 말할게요.”

집요하게 앞을 가리는 산페르 때문에 안소니의 표정조차 살피지 못했다.

허둥대며 여관을 벗어났다. 건물 벽을 끼고 돌아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산페르가 둥실 떠올라 눈앞에서 멀어졌다. 가하란은 고개를 쳐들었다.

놀라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앞이 안 보이니까 답답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따지듯 질문하려다가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산페르는 나쁜 정령이 아니었다. 떠버리 정령을 물리쳐 주기도 했고, 엄마와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한동안 지켜 주겠다는 말까지 했고.

분명 눈앞을 가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러셨어요?”

차분하게 질문했다.

-거슬리는 잔향이 있었어. 그 인간족, 뭔가 있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너한테 하나하나 설명해줄 이유는 없는데.

“적어도 왜 못 보게 했는지는 말씀해 주세요.”

-네 눈을 통해야지만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 눈앞을 가린 게 아니라, 잠깐 시야를 빌린 거야.

가하란은 눈을 깜빡이다가 두 손으로 눈 주변을 매만졌다. 시야를 빌린다고?

“아저씨.”

-왜?

“집에서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혼자 여기저기 막 다니셨으면서.”

-방금 말했을 텐데. 제대로 보기 위해서 네 눈이 필요했다고.

산페르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좋아. 이건 설명해줄게. 내 본체는 이 ‘층’이 아닌 안원에 존재해.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 현신하는 것조차 상당한 제약이 따르지.

산페르가 입을 크게 벌렸다. 하품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이 뜨인 자’가 곁에 없으면 제대로 이동조차 못 해. 마음먹으면 할 수는 있지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야. 그래서 세핀느 곁에 머물렀지. 그 아이가 죽고 땅에 묻힌 후로는 계속 그곳에 있었고.

눈이 뜨인 자.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령사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라고 타챠가 말해줬다.

-난 지금 너한테 의탁한 상태야. 내가 이 층에서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거지. 참고로 조금 졸릴 수도 있어.

“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품이 크게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신이 멀쩡했는데, 지금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가하란은 뺨을 살짝 치면서 물었다.

“정리해 볼게요. 아저씨가 제대로 움직이려면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고 나면….”

하품을 크게 했다. 졸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잠이 오고요.”

-꼭 잠이 오는 건 아니야. 약간 피곤한 정도에서 그칠 수도 있어. 방금은 확인할 게 있어서 좀 오랫동안 네 눈을 빌려서 그래. 이 정도면 설명이 됐지? 더 묻지 마.

가하란은 고개를 털면서 말했다.

“중요한 걸 말씀해주지 않으셨잖아요. 그 아저씨가 거슬리는 이유요. 무슨 냄새가 나길래 그래요?”

-몰라.

“네?”

-모른다고. 그래서 희한해. 제대로 봤는데도 모르겠어. 뭔가 있는데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네. 어쩌면 그 인간족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쪽에 문제가 있는 걸지도.

머리 위에서 헤엄치던 산페르가 자취를 감췄다. 뭐 하나 제대로 설명해주는 게 없다.

“아저씨! 산페르!”

허공에 대고 불러봤지만, 사라진 정령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다 또 불쑥 등장하겠지.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몸을 축 늘어지게 만들던 잠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악의가 없다는 건 확실했다. 부실하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알려줬으니까.

가하란은 골목에서 빠져나와 루드 여관을 바라봤다.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안소니가 남자 손님을 ‘구치’라고 불렀었다.

테리가 말해줬던 유명한 사냥꾼인 걸까?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첫 대면이 참 어색하게 끝났다.

다시 찾아간다고 해도 또 산페르가 튀어나와 방해할 것 같았다.

“산페르. 듣고 있죠? 나중에 제대로 알려주세요.”

-또 마주치게 된다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 * *

“애한테 무슨 짓 했어?”

안소니는 오랜 친구를 보며 말했다. 물론 그랬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생긴 건 좀 험상궂으나 정이 많은 친구니까.

“내가 애들 상대로 뭘 하겠어. 그냥 날 보더니 고개를 숙이더라고. 부끄러웠던 모양이야. 아니면 내가 무서웠거나.”

“걔가? 그런 성격은 아닌데. 아니지. 자네 몰골을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몰골이면 자넨… 아니야. 괜히 상처 주긴 싫으니 여기까지만 말해야겠어.”

소리 죽여 웃던 친구가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안소니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다.

“구치. 자네 친구 랜더는 오늘도 성문으로 간 건가?”

“어.”

“대체 누굴 기다리는 거지? 뭐 들은 거 있나?”

“만나야 할 사람. 그렇게만 말했어. 뭐, 알아서 하겠지.”

구치가 손을 흔들며 위로 올라갔다. 안소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저녁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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