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여기야?”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간판을 보았다. 코엔 의상점. 도심지 가구거리와 맞닿아 있다고는 하나 이런 곳에 괜찮은 옷이 있으려나.
“여기 말고 내가 아는 곳으로 가자.”
가하란이 좋은 옷가게가 있다고 해서 일단 따라와 봤는데, 영 아닌 듯싶었다.
“아니. 여기가 좋아. 그리고 누나가 가려는 곳은 옷이 비싸잖아.”
“선물해줄게.”
“나도 돈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꾀죄죄한 주머니를 꺼내 들며 웃는 가하란이었다.
“얼마 있는데?”
가하란이 주머니를 열어주었다. 주머니 안을 들여다봤다. 제국중앙은행에서 발행한 찌그러진 은화가 두 개, 어딘지 모를 대상단에서 발행한 은화가 한 개, 반쪽짜리 은화가 또 한 개.
이 정도면 나름 입을 만한 옷 한 벌과 신발을 살 수 있으리라. 그래 봤자 기성품이지만.
“써도 되는 돈이야?”
“내가 모은 거야. 책 사려고.”
“그러면 책을 사. 옷하고 신발은 내가 선물해 줄 테니까.”
“돈이 있는데 왜? 아까 누나가 그랬잖아. 나랑 누나는 평등하다고.”
“…됐다. 일단 들어가서 보기나 하자.”
고집이 제법 세다. 가하란을 따라서 가게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길게 늘어선 행거가 반겨주었다. 손님맞이를 위한 공간 따위는 없었다.
가하란이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밀레나는 입구 근처에 놓인 옷을 살펴봤다.
박음질은 괜찮았지만 역시나 원단이 좋지 않았다. 형태도 어설픈 게 많았고.
몸을 가리는 것에만 충실한 옷이었다. 멋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안쪽에서 가하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가게 주인과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니 여기로 왔겠지.
천천히 걸으며 다른 옷들도 살폈다. 어릴 땐 치장을 유모에게 맡겼지만, 스콜라에 들어간 후부터는 직접 몸단장을 했다.
지겨운 훈련복과 제복을 벗는 날이면 마음에 드는 옷을 사서 입어 보곤 했다. 활동성이 좋은 옷을 주로 구매했지만, 때때로 단출한 드레스에도 눈길을 줬다.
옷장 구석에 박혀 있는 드레스 한 벌이면 여기 있는 옷을 몇 벌이나 살 수 있을까. 아마 절반은 살 수 있지 않을까?
“원단사 표시도 없고.”
손에 잡히는 옷들을 전부 살펴봤다. 그 어디에도 원단사 마크가 없다. 이렇게 엉망이 된 옷은 어디다 수선을 맡겨야 하지?
더 살펴봤자 마음에 드는 옷은 안 나올 것 같았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행용 망토가 몇 벌 걸려 있고, 그 끝에 가하란이 있었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턱을 당겨 인사했다.
“친구와 같이 왔다고 해서 골목 친구인 줄 알았더니….”
노파가 다가왔다. 이제보니 한쪽 다리가 의족이었다.
“쵸리안에서 만든 옷인 듯한데, 맞나요?”
의외였다. 원단사 마크가 안쪽에 있어서 쉽게 알아볼 수 없을 텐데.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이 일을 업으로 삼은 지 50년이니 못 알아보면 안 되죠. 그나저나 여기엔 아가씨 같은 분께 어울리는 옷이 없을 텐데요.”
“내가 아니라 저 애 옷을 사러 왔어요.”
“그렇군요.”
노파가 가하란을 보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노파가 옷 무더기 사이로 사라졌다.
“자, 받아라.”
돌아온 노파가 옷 몇 벌을 가하란에게 주었다.
“저번에 말했던 옷이다. 아마 맞을 거다. 조금 클 수도 있지만, 어차피 금방 자랄 테니까.”
밀레나는 가하란 옆으로 다가가 옷을 살펴봤다. 유행이 지난 것들이지만 품질은 꽤 좋았다. 이런 곳에서 취급할 만한 옷이 아니었다.
“한 벌이면 돼요.”
“남는 거라 괜찮아. 도톰한 건 겨울에 입으면 되니까 챙겨두고.”
가하란도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웃음을 보였다.
“입으면 귀엽겠네.”
밀레나가 말했다.
“귀여운 것보단 멋있는 게 좋은데.”
“네 나이에 멋있는 건 힘들지 않을까?”
가하란의 앞 머리카락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가하란이 입을 씰룩거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할머니. 이거 다 해서 얼마예요?”
동전이 든 주머니가 다시 등장했다. 노파가 눈을 깜빡이다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 말했잖니. 선물로 주겠다고. 그러니 그냥 가져가.”
“그럴 순 없어요.”
“그럴 수 있어. 군소리 말고 얼른 가져가.”
“저번에 할머니께서 그러셨잖아요. 일했으면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저도 염치없는 애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하지만 그건 공짜로 얻은 옷이라 괜찮아. 무엇보다 돈 계산은 어른들 세계에서나 꼼꼼하게 따지는 거야. 알겠니?”
노파가 가하란의 볼을 쥐고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밀레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도 한번 꼬집어볼까.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가하란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받아.”
“아가씨께서 잘 아시는군요.”
가하란이 옷을 품에 안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입을게요.”
“그래. 나중에 쓸 만한 옷이 생기면 또 선물로 주마.”
“이것도 충분해요. 몇 년은 입을 수 있을 거예요.”
“1년만 있어봐라. 네가 훌쩍 커서 그 옷은 못 입게 될 테니까.”
곁으로 다가온 가하란이 옷을 보여주며 질문했다.
“누나. 이 정도면 극장에 가도 괜찮을까?”
“쫓겨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름 좋은 옷이니까.”
말하면서 노파를 흘깃 보았다. 원단사 마크도 있고, 가격을 제대로 받는다면 대상단 은화 세 개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걸 공짜로 받았다면서 가하란에게 선물로 주다니.
노파가 검지를 입술에 대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는 게 있어도 비밀로 해달라는 뜻이리라.
이런 게 시민들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낮은 울타리가 만들어낸 정’이라는 걸까.
“누나. 잠깐만 할머니랑 얘기할 게 있어서 그런데….”
“얘기 나누고 나와. 밖에 있을 테니까.”
오래된 가죽과 천이 내는 쿰쿰한 냄새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눈앞으로 관료들이 지나갔다. 복장과 넥타이 색깔을 보건대 행정처 관료 같았다.
관료들이 한 가게로 줄지어 들어갔다. 밀레나도 아는 곳이었다.
요정의 안뜰. 황제조차 예약이 힘들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스토랑.
얼마 전 미엔이 가져온 디저트의 맛이 입 안에서 살아났다. 요정의 안뜰 요리는 한입 크기로도 황홀함을 선사했다.
저런 곳에 왜 관료들이?
식사하러 가는 건 아닐 것이다. 표정들이 다들 굳어 있었으니까.
속으로 부디 별문제 아니길 기도했다. 맛있는 음식점이 별거 아닌 이유로 문을 닫는다면 너무나도 서글플 것이다.
“누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가하란 오른손에는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옷을 싸맨 것 같았다.
시선이 왼손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종이가방을 쥐고 있었다. 가하란이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이거.”
“이게 뭔데?”
“누나한테 주는 선물.”
“나한테?”
선물이란 말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받았다. 가하란이 방긋 웃으면서 보챘다. 얼른 확인해 보라고.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종이가방 안쪽을 살폈다.
“손수건… 아니, 스카프네.”
흰색 바탕에 테두리가 붉은 스카프였다. 귀퉁이에 자수가 놓여 있었다. 강아지? 아니면 고양이? 엉성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할머니한테 물어봤어. 선물로 뭐가 좋을지.”
“그래서 이걸 산 거야?”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조악한 자수에 헐거운 짜임새. 연회석에서 이걸 선물로 받았다면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너 스카프를 선물로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아니. 주면 안 되는 거야?”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입술 사이로 풋 하고 소리가 나왔다.
“고마워. 이거 잘 쓸게.”
밀레나는 머리끈을 풀었다. 넘실대는 뒷머리를 다시 모은 다음 스카프로 가볍게 묶었다. 목에 두르고 다니기에는 날씨가 더웠으니까.
“어때? 괜찮아?”
선물을 준 당사자에게 질문했다.
“어. 예뻐.”
가하란이 말했다. 꾸밈없는 말이라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맞다. 신발은 샀어?”
“아니. 여기선 안 팔아.”
“그러면 신발은 내가 선물해줄게. 거절할 생각 마. 나도 이렇게 받았으니까.”
머뭇거리던 가하란이 알겠어, 라고 대답했다.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좀 서두르자. 나도 약속이 있거든.”
가하란을 데리고 가구거리를 가로질렀다.
“여긴 처음 와봐.”
서쪽 상업지구, D블록과 인접한 상가 밀집지로 들어서자마자 가하란이 한 말이었다.
“둔에서 컸다며? 여길 한 번도 안 와봤어?”
“어. 올 일이 없으니까. 안소니 아저씨가 여긴 되도록 가지 말라고 했거든. 치안관리병한테 붙잡힐 수도 있다고.”
“그래?”
귀족에게는 편의를 제공하는 관리병이, 시민한테는 무서운 군인일 수도 있겠구나. 밀레나는 주억거리며 걸음을 뗐다.
“여기야. 우리 본가 사람들도 여기서 주문 제작을 맡겨.”
르 데르리. 착용감뿐만 아니라 멋까지 고심하는 신발점이었다. 본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도 이곳 신발을 신었다. 어머니의 군화 역시 이곳에서 맞췄고.
“들어가도 돼?”
주춤거리는 가하란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싱그러운 향이 코를 스쳐 갔다. 접객용 라운지바에 손님이 두어 명 앉아 있었다.
“밀레나 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실무담당자 쇼렐이 마중 나왔다. 둔에 막 도착했을 때 인사차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먼저 알아봐 주며 다가왔었다.
“이 아이한테 맞는 신발을 부탁드리러 왔어요.”
“그러시군요.”
“이 옷과 어울리는 형태로 제작해 주세요.”
밀레나는 가하란이 들고 온 옷을 보여주었다.
“알겠습니다. 손님, 이쪽으로 오실까요?”
잔뜩 얼어붙은 가하란이 쇼렐에 이끌려 이층으로 올라갔다. 쭈뼛거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애는 애야, 밀레나는 점원이 제공한 음료를 마시면 잠시 기다렸다.
“누나. 나 여기랑 안 맞는 거 같아.”
이층에서 내려온 가하란이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잔뜩 지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웃음이 나온다.
쇼렐이 곁으로 다가왔다.
“완성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조금 서둘러 주세요. 얘한테 꼭 필요하거든요.”
“당연히 그래야죠. 저희 가게는 언제나 엔첸세의 주문을 가장 중요시하니까요.”
“고마워요. 아, 혹시 어머니 소식은….”
“아쉽게도 연락받은 것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대금은 평소대로 처리해 주세요.”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가하란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누나. 가격이 얼마인지 알려줄 수 있어?”
“그런 걸 왜.”
“너무 비싼 걸 받으면 안 되니까.”
돈에 대해서는 정말 깐깐한 애구나. 저렴하다 해도 안 믿을 것 같으니 가격을 알려주었다. 가하란의 입이 벌어졌다가 순식간에 오므라들었다. 엄청나게 놀란 얼굴이다.
“선물이니까 신경 쓰지 마.”
멍하게 서 있는 가하란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가게 밖으로 나와서 뒤를 돌아봤다. 가하란이 쇼렐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쇼렐이 이쪽을 쳐다본다. 밀레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주는 게 낫겠지.
잠시 후 가하란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누나, 이거.”
손바닥만 한 종이에 차용증이라 적혀 있었다.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중에 꼭 갚을게.”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면 나 신발 못 받아.”
“너 이쪽 방면으로는 진짜 고지식하구나.”
일단 받아두기로 했다. 어차피 돈을 돌려달라 할 생각도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차용증이었다.
“돌아가자. 너무 늦으면 안 되니까.”
밀레나는 스카프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