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62화 (35/558)

제62화

“그게 편견이라니까요.”

“편견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거라니까 그러네.”

“그 전제부터가 잘못됐어요. 개인이 부당한 일을 겪었다고 해서 그걸 근거로 전체를 매도하면 안 된다고요.”

“내가 보고 들은 걸로 판단하지, 그러면 뭘 근거로 판단을 해요? 아가씨가 귀족이라 생각이 그쪽으로 치우친 게 아닐까요?”

“아닐걸요?”

“맞을걸요?”

말을 쏟아내던 룽네가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왔다.

“무른 사과로 만든 사과잼이라 맛이 조금 떨어지긴 해도 나름 괜찮은데, 이것도 먹을래요?”

“음식은 마다하지 않아요.”

가하란은 빵을 입에 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사이가 좋은 건지, 싸우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이럴 땐 담백하게 물어보는 것이 좋다.

“저기, 둘 다 화난 거 아니죠?”

사과잼의 단맛을 느끼며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난 이 아가씨 너무 마음에 드는데?”

“나도 아주머니랑 마음이 잘 맞아서 좋아. 왜? 싸우는 것처럼 보여?”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밀레나가 빵을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빵을 먹던 밀레나가 슬쩍 미소를 짓는다.

미소의 깊이가 찜 요리를 먹었을 때보다는 얕고, 샐러드에 손을 댔을 때보다는 깊다.

“빵 맛있지?”

“어. 빵도 빵인데 사과잼이 맛있네.”

“샐러드랑 비교하면 뭐가 더 좋아?”

“굳이 비교하자면 이게 더 입에 맞긴 해.”

밀레나가 남은 빵을 입에 털어 넣었다. 살짝 부푼 뺨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뭐 재미난 일 생각났어?”

빵을 삼킨 밀레나가 말했다.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또 알게 됐거든.”

“뭔데?”

“맛 평가가 굉장히 솔직하다. 그리고 얼굴에 금방 드러난다.”

“부정할 수 없네. 근데 이런 자리니까 숨기지 않는 거야. 불편한 자리에서는 보통 이렇게 먹어.”

밀레나가 빵을 살며시 물었다.

아까와 달리 턱이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입가에 살며시 맺힌 미소를 끝까지 유지한 채 빵을 삼켰다. 아니, 삼킨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목 근육에 변화가 없었다.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여?”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며 묻는 밀레나였다.

“아니. 맛있는지 맛없는지 알아보기 힘들어.”

“편해 보이지도 않지?”

“응.”

“불편한 자리에서는 이렇게 먹을 수밖에 없어. 입에 안 맞아도 미소를 풀면 안 돼. 호스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어렵네.”

“어렵다기보다 답답한 거야. 편하게 먹으면 좋은데 서로 그게 안 되니까. 물론 항상 이런 식으로 먹는 건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불편한 자리에서만 이래.”

“누나가 말하는 불편한 자리가 정확히 뭐야?”

밀레나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천장을 좌우로 훑는 눈동자에 따분함이 깃들었다. 잠깐 떠올리는 것조차 지겹다는 듯이.

“다양한 예가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약점을 내보이면 위험해지는 자리?”

“가고 싶지 않지만 꼭 가야 하는 자리기도 하겠네?”

“그렇지. 그래도 나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편이야.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거절할 수 있으니까. 그게 안 되는 애들도 곁에 많아.”

“귀족으로 산다는 건 불편한 게 많네.”

“그만큼 누리는 것도 많고.”

밀레나가 룽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던 얘기 계속할까요? 무례한 귀족이 없다고는 안 할게요. 하지만 흔하지도 않아요.”

룽네도 포크를 휘휘 흔들었다.

“몇 번을 말하지만 내가 본 귀족들은 정말 하나같이 콧대가 높았다니까요. 자기가 귀족이라는 걸 표현하지 못하면 곧 죽을 것처럼 굴었어요. 아가씨가 그걸 봤어야 하는데.”

“그런 귀족을 어디서 만났는데요?”

“보통 시장에서 많이 보죠. 가판에 늘어놓은 상품을 보고 하자품이니, 여긴 못 써먹겠다는 둥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해서 속을 긁어요.”

“시장이란 게 이 골목 옆에 들어선 시장을 말하는 거죠?”

“맞아요.”

밀레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왜 그래요?”

“아주머니도 알겠지만, 귀족하고 시민은 생활권이 달라요. 둔에서는 서쪽 D구역이 귀족 거주지로 분류돼 있죠?”

“그래요. 거긴 귀족들 세상이죠.”

“그 안에도 시장이 있어요. 대개 사람을 부려 생필품을 조달하지만, 직접 구입하러 가는 분도 있어요. 취미 생활의 일환이죠.”

“얘기는 들어봤어요. 상시 열리는 시장과 상가 거리가 있다고. 갈 이유가 없어서 가본 적은 없지만.”

가하란도 올란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둔 서쪽에는 귀족들이 밀집해 있다고.

“근처에서 물건을 다 구할 수 있는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귀족은… 급이 떨어지는 귀족들일 거예요.”

“모자란 놈들만 우리한테 시비를 건다? 아가씨. 그것도 편견 같은데.”

“변호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제대로 교육받은 귀족이라면 이유 없이 시민을 건드리지 않아요.”

“어떤 교육을 받길래 그렇게 한다고 장담해요?”

밀레나가 말을 멈췄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잠시 맴돌았다.

“불쾌한 내용일 수도 있는데 말해도 괜찮겠어요?”

“재수 없는 귀족이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속이 뒤집어지겠지만, 아가씨는 괜찮아요. 빈정거리는 것도 없고, 얘기도 제대로 들어주니까. 무엇보다 내 음식을 맛있다고 해줬고요.”

“나도 아주머니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 가감 없이 말할게요.”

밀레나가 식탁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시민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 배워요. 참고로 순화해서 말한 거예요.”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어요. 그래서요?”

“다 큰 어른과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가 있다고 쳐요. 근데 그 둘이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심각하게 싸운다면, 아주머니는 그 어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철없다고 생각하겠죠. 유치하게 애하고 왜 진지하게 싸워요.”

“그렇죠? 거기에 그 어른이 애들 앞에서 자랑질까지 해요. 넌 이런 거 없지? 난 이런 거 있다, 하면서요. 정말 몰상식하고 볼품없어 보이겠죠?”

룽네가 팔짱을 끼더니 크게 웃었다.

“기분은 더러운데 웃기긴 하네요. 귀족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를 애 취급해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해요. 시민은 계도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쓰이는 말이니까요.”

“높으신 분들은 우릴 그렇게 보는구나. 그러면 이해가 되네요. 애들 놀이터에 찾아와서 생떼 부리는 놈들이 얼마나 유치해 보일지, 감이 잡혀요.”

눈물까지 찍어내며 웃던 룽네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웃음이 남긴 여운이 사라지고 냉랭한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가하란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분위기가 안 좋게 변하고 있었다.

누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아가씨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우리를 가르쳐야 할 모자란 사람들로 봐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도 생각했어요. 나에게 예절을 가르친 선생들이 상식이자 기본이라며 그런 내용을 말해 줬으니까요.”

밀레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대화한 이후로 생각의 틀이 바뀌었어요. 신분이 모든 걸 대변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단순한 개념을 그때 접했거든요.”

바람 소리마저 멎어 주방이 조용해졌다. 가하란은 포크를 쥐고 일부러 앞접시를 살짝 쳤다. 쨍한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전 누나가 좋아요. 근데 귀족이라서 좋은 건 아니에요. 아줌마도 좋아해요. 물론 시민이라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두 사람이 좋아요. 그렇다고요.”

헤벌쭉 웃으면서 남은 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밀레나가 잽싸게 빵을 낚아채 갔다.

“내거야.”

“누나!”

“귀족이라 우대받을 것도 없고, 시민이라 천대받을 것도 없어. 평등. 이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하지도 않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적어도 너와 나 사이는 평등하다고. 그러니까 이건 내가 먹을게.”

“억지야.”

“넌 아주머니랑 이웃이라 자주 먹을 거잖아. 난 아니고. 그렇죠?”

룽네가 밀레나의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잼 남은 게 있는데 좀 드려요?”

“빈손으로 왔는데 그런 거까지 받으면 안 돼요. 나중에 선물 들고 와서 당당하게 받아 갈게요.”

“우린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데.”

“난 신경 써요.”

“귀족이라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웃음 짓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는 두 사람이었다.

“사실 조금 걱정했어.”

가하란은 감춰뒀던 마음을 꺼내 들었다.

“무슨 걱정?”

밀레나가 빵을 반으로 뜯으며 물었다. 빵 반쪽이 가하란 접시에 올랐다.

“누나가 저번에 그랬잖아.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다고. 룽네 아줌마는… 좋으신 분이지만 거침없으시거든.”

룽네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대책 없는 아줌마는 아니야. 괜찮을 거란 확신이 있으니까 이렇게 대했지.”

“정말요?”

룽네를 도와 접시를 치웠다. 밀레나는 창가 근처로 가 밖을 보고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햇볕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배가 불러서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아가씨, 몇 번이고 이 골목을 찾아왔잖아. 그러는 동안에 문제를 단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어. 게다가 오히려 경고해 주기도 했지. 귀족을 대할 땐 조심하는 게 좋다고.”

“그랬었죠.”

밀레나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주변 이웃들이 대놓고 경계심을 보였다. 누나는 이웃 어른들을 차분한 어투로 타일렀었고.

“사실 올란트한테도 얘기를 들었어.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할 줄 아는 아이라고. 그래서 네가 같이 밥 먹고 싶다 했을 때 거절하지 않은 거야. 따로 얘기해보고 싶기도 했고.”

괜한 걱정이었구나. 역시 어른들 행동에는 다 근거가 있었다.

가하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접시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올게요.”

“말로만 하지 말고 꼭 와요. 아직 내놓지 못한 음식이 잔뜩 있으니까.”

잘 가라고 인사하는 룽네를 뒤로하며 골목 초입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마주친 이웃 어른들은 밀레나를 슬쩍 쳐다볼 뿐 경계하지는 않았다.

“얻어먹었으니 답례를 해야지.”

“안 그래도 돼. 그냥 주신 건데.”

“세상에 그냥은 없어. 받았으면 돌려줘야 해. 그게 이치야.”

“누나는 그런 면이 조금 답답해.”

“문제 생기는 것보단 나아. 일단 옷부터 보러 가자. 그리고 신발 산 다음에 아주머니 드릴 선물도 사고.”

가하란은 걸음을 멈췄다.

“옷? 무슨 옷?”

“무슨 옷이긴. 네가 입고 갈 옷이지. 올란트 씨, 아니, 아저씨는 괜찮을 거야. 아마 갖고 계실 테니까.”

아저씨와 아주머니. 편해진 호칭이 마음에 들었다. 누나와 조금 더 가까워진 걸까.

그러다 불쑥 테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여자애는 귀족이야.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먼 사람이니까 잊는 게 좋아.

“왜 멀뚱히 서 있어.”

밀레나가 불렀다. 가하란은 웃으면서 갈게, 라고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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