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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61화 (34/558)

제61화

“며칠 사이에 더 커진 거 같아. 착각이겠지?”

“요즘 많이 먹긴 했어.”

밀레나가 툴을 감싸 안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품에 안긴 툴이 혀를 길게 내밀고 헥헥거렸다. 땅에 살짝 닿은 뒷다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누나, 안 무거워?”

툴은 덩치가 컸다. 큰 만큼 무거웠고. 가하란은 툴의 몸무게를 견뎌내는 밀레나가 신기할 뿐이었다.

“이 정도는 가볍지.”

가볍지는 않을 텐데. 가하란은 혹시나 해서 툴을 넘겨받았다. 품에 안긴 툴이 잠깐 발버둥 쳤는데,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괜찮아?”

밀레나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 손을 잡았다.

“툴하고 산책 중이었어?”

“산책은 아니고 노는 중이었어.”

가하란은 너덜너덜해진 장갑을 보여줬다.

“이걸 쫓아서 뛰어오다가 날 본 거구나. 나도 던져봐도 돼?”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주었다. 둥글게 만 장갑을 밀레나가 힘껏 던졌다. 장갑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동네 어른들도 저렇게 멀리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 세게 던졌나.”

밀레나가 말하는 사이, 툴이 달려 나갔다. 꼬리가 신나게 흔들리는 걸 보면 멀리 날아간 장갑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툴은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괜찮아.”

돌아온 툴이 밀레나 앞에 장갑을 내려놓았다. 눈동자가 반짝였다. 얼른 던져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밀레나가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아까보다 더 멀리 장갑을 던졌다. 골목 끝자락까지 장갑이 날아갔다.

“마음껏 뛰어봐.”

장갑이 여름 하늘을 몇 번이나 가로질렀다.

귀가 펄럭일 정도로 힘차게 뛰던 툴이 어느 순간 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느리게 걸어왔다.

“들어갈까?”

가하란은 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툴이 장갑을 툭 뱉고는 집으로 걸어갔다. 만족을 모르는 툴이 오늘은 먼저 백기를 들었다. 하긴, 그만큼 뛰었으면 지칠 만도 해.

“더 안 해?”

밀레나가 터벅터벅 걸어가는 툴을 향해 외쳤다. 툴이 흘깃 보더니 이내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방금 쟤 눈빛을 보니 나한테 질린 거 같은데?”

“조금?”

밀레나가 활짝 웃었다. 가하란은 그 웃음을 가만히 지켜봤다. 확실히 동네 여자애들이 짓던 웃음과는 뭔가 달랐다. 뭐가 어떻게 다른지 말해보라고 하면 설명하긴 힘들지만.

“왜?”

밀레나가 물었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유를 말하려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가하란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댄 후 화제를 바꿨다.

“기록지 보러 왔어?”

“그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다른 이유? 밀레나를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툴하고 놀고 싶기도 했고, 너하고 얘기하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말끝을 흐린 밀레나가 허리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이걸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손에 이끌려 나온 건 붉은 봉투였다.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았다.

“연극 초대권?”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바로 맞히는 걸 보면.”

“누나랑 한 얘기는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래? 아무튼 받아. 난 약속한 건 지켜야 잠을 잘 수 있는 성격이거든.”

잠깐 주저하다가 이내 봉투를 쥐었다.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받네?”

“생각해 봤거든. 내가 안 받겠다고 하면 억지로 쥐여 줄 것 같아서 그냥 받았어. 내가 누나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 정도면 날 아주 잘 알고 있는 거야.”

봉투 질감이 매끄러웠다. 고급스러운 종이였다.

“열어봐.”

봉투 덮개를 들어 올렸다. 반듯하게 쓴 글씨가 보였다. 극단 샤르파르. 귀족 거주지인 도시 서쪽에서 얼핏 본 이름이었다.

초대권을 봉투에서 꺼냈다. 총 네 장이었다.

“이렇게나 많이?”

“초청 공연은 원래 넉넉하게 줘. 날짜랑 시간 보이지? 그때 맞춰서 가면 돼.”

“두 장이면 되는데.”

“주변 사람 아무나 데려가도 돼. 없으면 아빠랑 둘이 가고 남은 초대권은 버려.”

“이런 걸 어떻게 버려.”

가하란은 초대권을 봉투에 넣고 조심스럽게 덮개를 닫았다.

“아, 주의할 점이 하나 있어.”

“주의할 점?”

“복장을 신경 써야 해. 초청극인 만큼 까다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정하게 입어야 해. 복장이 엉망이면 출입 못 하게 막거든.”

가하란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때 묻은 티가 눈을 아프게 찔렀다.

“이 옷은 안 되겠지?”

“아마도. 뭐 묻은 거야 세탁하면 되지만, 목이랑 팔 쪽이 헐거워진 건 수선해야 해. 그리고 신발도. 발가락이 보이는 형태는 그쪽에서 용납 안 해.”

가하란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가락이 보이는 게 문제가 되는구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다른 신발 있어?”

“겨울에 신는 털신 있어.”

“그것도 좀 그런데. 다른 건? 구두 한 켤레 정도는 있지 않아?”

“그건 열 살 생일 때 어른들한테 받는 거잖아.”

“아, 그래?”

밀레나가 가볍게 인상을 썼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문제인데.”

“그냥 가서 보면 안 되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출입 자체가 불가능할 거야. 은근히 깐깐하거든.”

가하란은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나, 이거 그냥 가져가.”

“안 돼. 주기로 약속한 건데 어떻게 그래.”

“나중에, 나중에 내가 가서 볼게. 생각해 보니까 지금 하는 연극은 별로 재미없을 거 같아. 그냥 누나랑 얘기하면서 노는 게 더 좋아.”

아쉬움을 토로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 그렇다면 선물 준 사람이 마음 쓰지 않도록 행동하는 편이…….

“가하란.”

“어?”

“내 얼굴 똑바로 보고 말해봐. 너, 이 연극 정말로 안 보고 싶어?”

가하란은 밀레나의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표정을 감추는 건 자신 있었다. 거짓말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다그치는 눈동자를 향해 준비된 말을 꺼내려 했다. 입술은 떨어졌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가하란은 벙긋거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보고 싶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렇지? 그러면 어쩐다.”

잠깐 고민하던 밀레나가 골목 초입을 바라봤다.

“오늘 바쁜 일 있어?”

“아니.”

“그럼 나하고 어디 좀 가자.”

밀레나가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앞장섰다.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뗄 때였다.

“가하란! 점심….”

룽네 아줌마였다. 룽네는 외치다 말고 밀레나와 가하란을 번갈아 보았다.

“밥 먹을 시간인데 어딜 가려고.”

가하란은 제자리에 우뚝 섰다. 룽네는 다른 건 다 용서해줘도, 밥을 거르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화내는 룽네 아줌마는 정말 무섭다.

“가하란한테 사줄 게 있어요. 점심은 이따가 먹을 테니 걱정 마세요.”

밀레나가 말했다. 룽네가 팔짱을 끼고 턱을 당겼다. 미간이 꿈틀거린다.

가하란은 잽싸게 밀레나의 손을 붙잡았다.

“누나. 밥은 먹어야 해.”

“뭐?”

“점심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러면 같이 먹자. 아줌마! 누나랑 같이 먹어도 돼요?”

밀레나가 손을 빼며 말했다.

“밥? 지금? 내가?”

거기까지 말한 후 룽네의 집을 바라봤다.

“저기서?”

“점심 안 먹었다며. 같이 먹자. 룽네 아줌마가 해준 요리는 진짜 맛있어. 저번에 먹은 토르티야도 아줌마가 해주신 거야.”

“기억하고 있어. 맛도 좋았고.”

밀레나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근데 말이야, 식사 초대는 굉장히 민감한 일이야. 이런 식으로 멋대로 정해버리면 저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어. 그건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고.”

“아줌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

“그, 그래?”

“잠깐만.”

가하란은 집 앞에 서 있는 룽네를 바라봤다.

“아줌마! 같이 먹어도 되죠?”

“나야 상관없다만, 그쪽에 있는 귀족 아가씨가 괜찮을지 모르겠네. 우리 집에는 은접시 따위는 없으니까.”

룽네가 들어오라는 손짓과 함께 돌아섰다. 가하란은 갈게요, 라고 외친 다음 밀레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나, 가자.”

머뭇거리는 누나의 손을 붙잡고 움직였다. 잠시 버티던 밀레나가 서서히 걸음을 뗐다.

“아무리 그래도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가는 건….”

“아줌마가 초대한 건데? 아까 들어오라고 손짓했잖아.”

“그게 그런 뜻이야?”

“응. 귀족은 달라?”

“아무리 가벼운 자리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찾아가는 일은 드물어.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실례거든.”

“그러면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겠네.”

가하란은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활짝 열린 현관을 지나치자마자 매콤한 냄새가 마중 나왔다. 냄새를 맡자마자 무슨 요리인지 알아차렸다.

“개루어찜이죠?”

큰 냄비를 들고 나오는 룽네에게 질문했다. 룽네는 대답 대신 냄비 안쪽을 보여줬다.

예상한 대로 개루어찜이었다. 먹음직스러운 빨간색 사이사이로 생선 흰 살이 보인다. 마디가 굵은 면도 소스와 잘 버무려져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밀레나가 룽네 앞에서 인사했다. 룽네는 국자를 가만히 든 채 밀레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깍쟁이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네요.”

“그렇게 보였나요?”

“내가 본 귀족들은 대개 그랬으니까요. 아무튼 앉아요.”

가하란은 둘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같이 오지 말았어야 했나?

“평소에 먹던 게 아니라 입에 안 맞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맛만 있다면 뭐든 잘 먹어요. 맛없어도 잘 먹고.”

밀레나가 자리에 앉았다.

가하란은 룽네를 도와 접시를 식탁에 놓고, 음식을 덜었다. 매콤한 향이 한층 더 강해졌다.

“저번에 해준 음식은 잘 먹었어요.”

밀레나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룽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 음식을 언제 먹어봤어요?”

“가하란한테 토르티야를 준 적 있죠? 그때 같이 먹었어요.”

“손으로 집어 먹어야 해서 불편했을 텐데요.”

“나름의 재미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손으로 집어 먹는 걸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훈련 때는 음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밀레나가 음식을 떠서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는 걸 빤히 쳐다보자, 밀레나가 눈을 씰룩였다.

알고 보니 가하란뿐만 아니라 룽네도 집중해서 보는 중이었다.

“안 먹어요?”

밀레나가 음식을 삼킨 다음 말했다.

“이것저것 따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요?”

“따져야 속이 시원하다면, 원하는 대로 따져줄 수도 있어요. 그런 거 못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 음식은 입에 맞아서 맛 자체로는 흠잡을 곳이 없어요.”

밀레나가 식탁보를 들어 올리다가 멈칫했다.

“이걸로 입 닦는 게 아닌가 봐요?”

“우린 싸구려 냅킨을 써요. 귀족들과는 다르게.”

룽네가 냅킨을 건넸다.

“잘 닦이기만 하면 가격이 무슨 상관이에요.”

밀레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룽네가 냄비를 들고 돌아왔다.

“더 먹을래요?”

“주신다면 기꺼이 먹죠.”

“양이 좀 많은데.”

“걱정 마세요. 어디 가서 입이 짧다는 소리는 안 들으니까.”

눈에 힘을 주고 보던 룽네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가하란은 그 표정을 보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줌마도 누나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마음껏 들어요.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더 말하고.”

국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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