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60화 (33/558)

제60화

조용하다.

며칠째 이어진 정적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신경이 쓰였다. 가하란은 아빠와 함께 만든 ‘교과서’에서 눈을 떼고 천장을 보았다.

깨진 컵을 닮은 정령, 날개가 한쪽뿐인 새 모양의 정령, 얼음 안에 불을 품고 있는 정령까지.

모두 수다 떨길 좋아하던 ‘떠버리 정령’이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 신경 쓰지 않고 말했잖아요.”

가하란이 말했다. 분명 들었을 텐데, 정령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바람 맞은 버들처럼 천장 중심을 기점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다.

관심 두지 말자, 가하란은 속으로 생각하며 교과서에 집중했다. 시야 끝자락에 걸쳐 있던 정령들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의식 저편으로 사라졌다.

“가하란. 오늘 아빠가 늦게 들어올 수도 있어. 룽네 누님에게 말해 뒀으니까 저녁 같이 먹고.”

올란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급한 일이 있는지 작업복을 옆구리에 낀 채 현관으로 걸어갔다.

가하란은 일어서서 아빠에게 다가갔다.

“일하러 가는 거예요?”

“일보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누굴 좀 만나러 가는 거야.”

“중요한 일?”

“지금은 말하기 그렇고, 결정되면 아빠가 다 말해줄게.”

“좋은 일이죠?”

“그럼. 좋은 일이지. 나한테도, 그리고 너한테도.”

올란트가 가하란 몸을 번쩍 들었다.

“언제 이렇게 무거워졌어.”

“애들은 원래 금방 큰대요.”

“더 크기 전에 더 많이 안아 줘야겠네. 아빠 볼에 뽀뽀해줄래?”

“그건 싫어요.”

“예전엔 잘 해줬으면서.”

아빠의 다부진 손이 등을 툭툭 두드렸다. 바닥에 내려온 가하란은 올란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찍 오면 안 돼요?”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리고 아예 못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알겠어요. 툴하고 같이 집 잘 지키고 있을게요.”

“외로우면 안소니 형님네 찾아가도 돼.”

다녀오마, 올란트가 가하란의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가하란은 현관문 밖에서 멀어져가는 올란트에게 손을 흔들었다.

9월 둘째 주. 아빠가 다시 바빠졌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관리국과 관련된 일이라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그래도 좋은 일이라고 하니 불안하지는 않았다.

거실로 돌아와 펼쳐놓은 도화지를 응시했다. 며칠 동안 이 앞에 붙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첫 페이지에는 거병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예전에 아빠와 함께 본 거병이었다.

아빠의 그림 실력은 언제 봐도 놀라울 정도였다. 테리 형은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추켜세우지만, 아빠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아빠가 만든 거병 모형을 앞에 두고 그림과 비교해봤다. 연필로 평면에 그린 건데 모형 못지않게 입체감이 두드러졌다.

아빠는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됐어야 하지 않을까,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가하란은 연필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거병 옆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몇십 번 읽어서 눈을 감고도 외울 정도지만, 계속 봐도 질리지 않았다.

“거병은 마법공학의 정수로 셀 수 없이 많은 부품으로 구성된다.”

가하란은 거병 모형을 양손에 쥐었다.

모형은 하나의 쇳덩어리로 만들어져 있지만, 실제 거병은 각 모듈로 나뉘어 제작되고 나중에 합쳐서 완성된다고 들었다.

몸체를 이루는 모듈은 마에스트로의 제작 방식에 따라 개수가 달라진다고 했다.

팔 한쪽을 하나의 모듈로 취급하는 거병이 있는가 하면, 팔 한쪽도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 구별하는 거병도 있다고 들었다.

가하란도 모형을 보며 임의로 구분 지어봤다. 만약 거병을 만들게 된다면 손목과 팔꿈치, 어깨를 기준으로 해서 세 모듈로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상상일 뿐이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히죽 웃으며 다른 부위를 살필 때였다.

푸른 눈동자가 눈앞에 솟아났다.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형태를 드러낸 거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앞다리를 휘저으며 떠다녔다.

“계속 그럴 거예요?”

가하란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왜 매번 눈앞에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걸까.

-네가 안 놀랄 때까지.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가하란은 거북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심술을 부려봤지만 손은 허무하게 거북을 통과할 뿐이었다.

헤엄치며 거실을 돌아다니던 거북이 거병 모형 옆에 내려앉았다.

-내가 인간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똑같은 걸 계속 보면 안 질려?

“안 질려요.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가하란은 자랑스럽게 교과서를 들어 올렸다. 넓은 도화지를 한 장씩 넘기며 거북에게 말했다.

“보세요. 또 다른 내용이 생겼죠? 아빠가 알려준 거예요.”

-그게 재미있냐?

“당연히 재미있죠.”

-조악한 쇳덩어리가 재미있다니. 너도 별난 놈이야. 그 아이만큼.

그 아이. 거북이 말한 그 아이는 아마 엄마일 것이다. 지난 며칠간 엄마에 관해 수없이 질문했지만, 거북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대답은커녕 아예 무시하고 다른 말만 했다.

이러면 떠버리 정령과 다를 게 없는데. 가하란은 입을 씰룩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이름은 언제 알려줄 거예요?”

-이름이 중요해?

“중요하죠.”

-왜 중요한데?

“그야… 부를 수 있으니까요.”

-못 부르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거나 바뀌나?

“그건 아니죠.”

-그러면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야. 단순히 편의성 때문에 붙여진 거지. 알 필요도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엄마 이름을 알고 계시잖아요. 가끔 부르기도 하고.”

-세핀느는 내가 관심이 있었으니까. 똑같이 생겨 먹은 인간들 사이에서 그 애만큼은 독특했거든.

“엄마가 어땠는데요?”

슬쩍 물어봤지만 거북은 다시 침묵을 택했다. 유영하는 거북을 지켜보다가 혀를 짧게 내밀었다. 놀리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거북이었다.

“할 거 없으면 이거 같이 볼래요?”

가하란은 도화지를 가리켰다.

-네가 중얼거리는 걸 계속 들었더니 나도 이제 다 알아.

“그러면 탈로스가 뭔지 아세요?”

-대답하기 귀찮아.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사실 모르는 거죠?”

거북이 몸을 뒤집으며 떠다녔다. 가하란은 오기가 생겼다. 도화지를 들고 거북 옆에 섰다.

“탈로스는요, 거병의 뼈대예요. 거병을 이루는 중요한 금속 역시 탈로스인데, 보통은 뼈대를 칭하는 말이에요.”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가하란은 거북 얼굴에 대고 계속 말했다.

“거병은 크게 세 가지 구성요소로 나눌 수 있어요. 첫 번째는 방금 말한 뼈대인 탈로스. 두 번째가 뭔지 아세요?”

거북이 주방으로 이동했다. 따라가며 계속 말했다.

“액상 근육이에요. 사람 몸에 흐르는 피 같은 거래요. 이게 각 모듈을 관통하며 운동에 필요한 힘과 정보를 전달한대요.”

툴이 컹컹대며 코를 쳐들었다. 혼자 놀지 말고 같이 놀아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 달라붙은 툴과 함께 난로 쪽으로 날아간 거북을 쫓았다.

“세 번째는 오토마타예요. 오토마타는 사람이 거병을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처리장치래요. 오토마타의 도움 없이는 뛰어난 기사도 거병을 조종할 수 없대요. 신기하죠?”

-온갖 장비와 지원이 있어야지만 겨우 한 발 떼는 쇳덩이와 내 옆에서 어떤 도움 없이도 조잘대는 인간 하나. 네가 보기엔 뭐가 더 신기하냐?

“거병이요.”

-그렇겠지.

거북이 창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갔다. 가하란도 창틀을 밟고 폴짝 뛰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에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끈적끈적했던 여름 공기도 제법 산뜻해졌다.

-쇳덩이보다 이런 게 더 신비롭지.

거북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쭉 빼 창공을 올려다봤다.

“거북이 아저씨.”

-들을 때마다 헛웃음만 나오는 호칭이야.

“이름을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

-…산페르. 그게 내 근본에 각인된 이름이다.

“산페르.”

아무 생각 없이 그 이름을 되뇌는 순간, 가하란 눈앞에 푸른빛이 찾아들었다.

한순간 바뀐 정경에 가하란은 눈만 깜빡였다. 깊은 물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답답하거나 숨 쉬기 곤란한 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포말이 일었다. 하얀 거품들이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주변 일대를 휘감았다.

불현듯 병실이 떠올랐다. 핀들론 할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병실이.

그곳에서 만난, 초록색 눈동자를 지녔던 여자도 이런 식으로 주변 풍경을 바꾸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땐 꽃이 만발했고, 지금은 물속에 들어왔다는 거지만.

물결 같던 푸른빛이 한순간 사라졌다. 가하란은 손으로 옷을 더듬었다. 바싹 마른 상태였다. 젖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금 뭐였어요?”

-인간족의 관념을 빌려 말하자면, 내 권역이라 할 수 있지.

“권역이요? 그게 뭐예요? 저도 할 수 있는 건가요?”

-내 이름을 알려줬으니 난 답할 만큼 답한 거다. 나머진 알아서 궁리해.

거북, 산페르가 사라졌다.

“산테, 산페르.”

가하란은 뇌리에 남은 이름을 되뇌었다. 거대한 쥐의 이름과 거북의 이름이 비슷했다.

그다지 안 친한 이웃이라고 했었지? 같은 동네에 살면 이름도 비슷해지는 걸까?

정령세계, 안원의 법칙을 아무것도 모르니 유추해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산페르 아저씨. 듣고 있죠? 듣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 아저씨 말대로 저 혼자 생각해 볼게요. 찾아볼게요. 나중에 제 생각이 맞는지만 대답해 주세요. 답은 알고 싶거든요.”

-그러든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는 게 확실했다.

살가운 정령은 아니지만, 해를 끼치는 정령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쪽에 가까웠다.

친절을 베푸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뿐이었다.

“엄마에 대해서도 나중에 말해주세요. 저 꼭 듣고 싶어요.”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가하란은 씩 웃어 보인 후에 집으로 들어갔다.

툴이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혼자 떠드는 거 아니야. 네가 못 보는 정령이 내 옆에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돌돌 뭉친 장갑을 물고 오는 툴이었다. 혼자 놀지 말고 같이 놀자는 뜻이리라.

침이 잔뜩 묻은 장갑을 쥐고 밖으로 나왔다. 길게 뻗은 골목길을 향해 힘껏 던졌다.

툴이 네 다리를 빠르게 교차하며 뛰어나갔다. 덩치는 커졌어도 민첩함을 잃지 않았다. 아빠 말대로 훈련을 시키면 날렵한 목양견이 될 것이다.

“툴! 어디 가!”

장갑을 물고 돌아와야 할 놈이 장갑을 내버려 둔 채 저 멀리 뛰어갔다.

동네 친구들하고 놀 건가? 자주 있는 일이라 걱정하지는 않았다. 영리해서 마차가 다니는 길까지 나간 적도 없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알아서 돌아올 것이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집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컹컹, 거리며 툴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뛰쳐나갔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뒤에 사람 하나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가하란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밀레나가 툴과 함께 나란히 뛰어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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