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첼이 눈웃음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중지에 낀 반지가 제대로 보인다.
은으로 만든 밴드. 문양이나 문구, 보석조차 박히지 않은 간결한 생김새였다.
첼이 반지를 빼서 손바닥에 올려놨다.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표면이 거칠었다. 제작을 잘못했는지 반듯한 원형이 아니었다.
사연이 있는 반지 같았다. 하자 있는 장식품은 대개 그런 법이니까.
밀레나는 첼의 표정을 살폈다. 저 반지에 깃든 이야기는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불행한 것일까.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실망하던 다른 동기들도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나티아 가 총집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알아둬서 손해 볼 건 없었다.
“참 볼품없는 반지죠. 내가 정치에 입문했을 당시에는 이렇게 끼고 다니지 못했어요. 품격을 떨어트린다며 욕을 먹을 테니까요.”
지당한 소리였다. 다른 귀족이 저 반지를 끼고 사교장에 나타났다면, 그 즉시 눈치를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첼은 귀족 신분도 아니었다. 눈 밖에 나는 일은 최대한 삼갔을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당당하게 끼고 다닐 수 있지만. 권력은 참 편리한 것이죠.”
첼이 반지를 다시 꼈다. 끼는 순간 밀레나는 반지 안쪽을 볼 수 있었다. 워낙 짧은 순간이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글귀가 적혀 있는 건 확인했다. ‘사람’이란 단어도 봤고.
“반지 안쪽에는 내 인생을 결정지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군요.”
첼이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리고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봐서 알겠지만, 이 반지는 장식품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굉장히 조잡하거든요. 이제 막 일을 배운 어린 세공사도 이것보단 잘 만들 테죠.”
과거를 되짚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멀게 느껴지던 첼이 이 순간만큼은 친밀하게 다가왔다. 동기들도 비슷한 심정이리라.
“어떤 남자가 웨인 홉이라는 꽤 큰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성실하기로 소문이 난 남자였어요. 이웃에게도 친절했죠. 마을의 중차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찾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첼이 수염을 매만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마을에서 아이 한 명이 실종됐죠.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어요. 외지인이 오가는 큰 마을에서 애가 사라지는 건 으레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한 명, 또 한 명. 그렇게 다섯 명이 사라졌죠. 그것도 단기간에.”
밀레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부모 없는 애들을 잡아다가 노역장에 파는 건 제법 있는 일이었다. 법으로 금지된 일이나 애들을 사고파는 게 근절된 건 아니었으니까.
영지관리처에서도 초기에는 시큰둥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아이는 값싼 노동력이며 수고를 들여 찾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테니.
하지만 다섯 명이 단기간에 실종됐다면 관리처에서도 조사를 나왔을 터였다.
“여러분도 예상했겠지만 관리처에서 진상을 조사하러 사람이 나왔죠. 실종자, 혹은 이탈자가 많아지면 세금에도 문제가 생기니까요. 근데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실종되는 아이가 늘어났어요.”
첼이 검지를 까닥거렸다. 숫자를 점검하듯이.
“열둘. 우리가 지하실에서 찾아낸 아이들의 숫자였죠.”
첼이 말을 멈췄다. 앞뒤 모든 걸 유추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지하실의 주인은 처음에 말한 ‘어떤 남자’일 것이다. ‘우리가’라고 했으니 관리처 조사 인원에 첼이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율이 입을 열었다. 찻잔을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이들은 괜찮았나요?”
“우리가 찾아낸 건 목뿐이었어요. 열두 개의 목.”
시체를 수없이 봐왔고 잔인한 것에 익숙해졌다지만, 이런 이야기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참담한 광경이었죠. 관리처에선 사건을 조용히 덮기로 했어요. 그 큰 마을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졌다는 것도 문젠데, 그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조사를 시작했다는 것도 문제였으니까요.”
“살인마는 잡았나요?”
밀레나가 질문했다.
“네. 다행히도 잡았죠. 그 남자는 아주 당당했어요. 지하실에서 시체를 발견했다는 말에도, ‘아 그렇습니까’라고 대답할 정도였죠. 우리는 그자를 데려다가 가뒀고, 훗날 판사가 그 마을에 왔을 때 재판을 요구했어요. 이견 없이 사형이 떨어졌고 그 남자는 사지가 잘려 산에 뿌려졌죠.”
있을 법한 이야기이자 결말이었다. 첼이 조용히 차를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이 반지는 그 살인자가 끼고 있던 겁니다.”
예상했던 바지만, 직접 들으니 놀라우면서도 꺼려졌다. 살인자의 유품을 몸에 지니고 있다라.
“그자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 나는 그자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판사에게 전할 문서를 작성해야 했거든요.”
첼이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때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넌더리가 난다는 것처럼.
“기존에 작성한 조서를 토대로 재차 질문을 했죠. 난 왜 죽였는지부터 다시 물었습니다. 그자는 답했죠. 가게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게 짜증이 났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밀레나는 율이 작게 뇌까리는 걸 들었다. 이토록 화내는 율은 처음 본다.
“죽은 아이의 숫자는 열둘. 나는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그자는 비슷한 답변을 내놓았죠. 거슬렸다, 신경을 긁었다, 아니꼬웠다, 염증이 났다. 그렇게 일곱 번째 살해 이유를 물었을 때였죠. 그자가 말했습니다. 그냥, 이라고.”
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살며시 보이는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첼은 분노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체념하고 있는 걸까.
“형이 집행된 후 나는 이 반지를 처분하기 위해 강가로 갔습니다. 살인자가 지닌 물건에는 저주가 깃들어 강가에 흘려보내지 않으면 화가 닥친다는 설이 있었거든요.”
밀레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지역마다 차리 방식은 다르겠지만, 사형수 유품에 손대지 않는 건 비슷하리라.
“다른 물건은 다 던져버리고 손에 이 반지만 남았죠. 마저 버리려던 찰나 안쪽 문구가 눈에 들어온 겁니다.”
첼이 다시 반지를 뺐다. 그리고는 밀레나를 향해 내밀었다.
“궁금증은 직접 푸는 게 좋겠죠? 꺼림칙하다면 내가 읽어주죠.”
“아닙니다. 제가 보겠습니다.”
밀레나는 반지를 받아서 안쪽 글귀를 확인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옆에 앉은 율이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
밀레나는 깔깔해진 입천장을 혀로 살짝 긁은 후에 말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이렇게 적혀 있어.”
“미친놈인가?”
율의 격양된 목소리를 들으며 반지를 돌려주었다. 첼이 손에 쥔 반지를 잠시 살펴보다가 손가락에 꼈다.
“선함을 믿는다. 나는 이 글귀를 보고 반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평생 이 반지를 지니게 됐죠.”
첼이 모자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밀레나도 몸을 일으켰다.
“나도 사람이 선하길 바랍니다. 당연한 것이죠. 악인을 바라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한 호흡 뜸을 들인 후 첼이 말했다.
“선하길 바라지만, 선함을 믿지는 않습니다. 웃기는 말이죠? 모순적이기도 하고. 바라지만 믿지는 않는다. 이게 나라는 인간을 가장 대표하는 말이 되겠군요.”
첼이 돌아서서 걸음을 뗐다. 미엔이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짧게나마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니 깊은 이야기는 그때 다시 나누도록 하죠.”
미엔의 수신호에 맞춰 군례를 올리기 직전이었다.
“군례는 됐습니다. 군인이 아닌지라 부담스러우니.”
첼이 웃으면서 말한 뒤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밀레나는 한동안 자리에 앉지 못했다.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오랜 행군을 끝낸 것처럼 탈진하듯 자리에 쓰러졌다.
“뭐였지?”
“그러게.”
“무슨 의도였던 걸까? 이것도 시험인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다들 한마디씩 꺼냈다.
밀레나는 양손으로 마른세수했다. 조용히 찾아왔다가 다시 조용히 물러난 태풍을 되새김질하면서.
* * *
첼은 벤치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햇빛이 강합니다.”
“괜찮네.”
못 참을 정도로 덥지 않았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지, 종종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했고.
“벌써 9월이군.”
“예.”
“자네 생일이 9월 언제였지?”
“28일입니다.”
“내가 잊을 수도 있으니 28일에 가까워지면 귀띔이라도 해주게. 선물을 잊지 않도록 말이야.”
웃으라고 한 말인데 하브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웃는 연습은 잘하고 있고?”
“방금 웃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첼은 옅게 미소 지은 후 다시 수첩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브가 검은 우산을 펼쳐 햇빛을 가려주었다.
하얀 종이에 빛이 반사돼서 눈이 좀 시렸는데, 한결 나아졌다.
휴게실에서 봤던 생도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생도들에 대한 평가를 먼저 내렸다.
단편적인 내용이라 적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첼은 속지를 찢어낸 다음 하브에게 넘겼다.
“부탁하겠네.”
“오늘 밤에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리 급한 건 아니니까 따로 할 일이 있다면 미뤄도 되네. 각 가문에 전달하려면 어차피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식사한 다음이라 그런지 몸이 나른해진다. 첼은 하브에게 우산을 치워도 된다고 말했다.
“자네도 옆에 앉게. 날씨가 제법 좋아. 이런 날은 기꺼이 시간을 허비할 수 있지.”
자리에 앉은 하브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내 옆에 붙어 있는 거 피곤하지 않나?”
“피곤합니다.”
“하하. 원한다면 다른 곳을 알아봐 줄 수도 있네. 내 자리를 이어받는 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지 어느덧 8년입니다.”
“그렇게나 오래됐나?”
“예.”
“어쩔 수 없이 자네가 내 뒤를 이어야겠군.”
첼도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잠의 손길이 얼굴을 시작으로 전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첼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눈을 떴다. 먼저 보인 건 우산살이었다. 검은 우산이 햇볕을 막아주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하브가 물었다.
“깨우지 그랬나.”
“한 번 깨웠습니다.”
“정신없이 잤나 보군. 몇 시지?”
“2시 50분입니다.”
“한 시간이나 기절했군.”
“피곤하시면 더 있으셔도 됩니다.”
“아닐세. 더 있다가는 내 허리가 잘못될 것 같으니, 이만 들어가지.”
하브가 건넨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첼은 하브를 보며 말했다.
“자네 생일선물로 이건 어떤가?”
첼이 중지에 낀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하브가 곧바로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왜?”
“전 지식처럼 무게가 없는 걸 좋아합니다. 그 은반지는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
“그런가?”
첼은 낮게 웃은 다음 이어서 말했다.
“그냥 해본 말일세. 사실 이건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누구한테 줄 것 같은가?”
“가하란. 그 아이한테 주실 생각이시죠.”
“8년이란 세월이 길긴 길군.”
첼은 제자리에 서서 허리를 좌우로 비틀었다. 뚜둑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근데 정말로 받을 생각 없는 건가?”
“주신다면 곧바로 강가에 던질 겁니다.”
“매정한 친구로군.”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걸었다.
제국을 이끌어갈 청년들과 담소를 나눴으니, 이젠 제국의 늙은 여우들과 너저분한 대화를 할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