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짧은 유희치고는 주제가 너무 무거운데. 밀레나는 속으로 앓으며 율을 보았다. 지목받은 율이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모듈이 범행 목적이라 상정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보안 수준입니다.”
“보안 수준이 어떻죠?”
“성도보다는 뚫기 쉬우니까요.”
“단순하지만 범행 장소를 물색할 때 가장 고려해야 할 사항이기도 하죠. 경비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첼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지만 모듈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둔 말고도 다른 곳이 낫지 않을까요?”
율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제국 변경에 위치한 정비고를 노리는 게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범인은 최신 기종의 모듈을 원했고, 성도만큼이나 뛰어난 개발력을 지닌 이곳 둔을 목표로 삼은 것이죠.”
상급자에게 최종 보고를 하듯 간결하게 말하는 율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범인의 신원을 예측해 보죠. 율 양의 가설이 옳다고 했을 때, 범인은 어디에 소속돼 있을까요?”
율은 평소의 쾌활한 목소리를 상당히 억누르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거병 모듈은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 겁니다. 단순히 돈이 목적이었다면 다른 걸 훔쳤을 테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예상할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좁아집니다. 저는… 연합왕국이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연합왕국과 휴전조약을 맺었죠. 그 덕분에 지금 이곳 둔에는 연합왕국의 상단들이 대거 들어와 있는 상태고요.”
“그렇기에 더 의심됩니다. 시기가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으니까요.”
“우연이 두 번이면 필연이다. 이런 건가요?”
율은 힘있게 네, 라고 대답했다.
“이 가설에 동의하는 학생이 있나요? 혹은 설명을 덧붙일 학생은?”
첼이 좌중을 돌아봤다. 이리엘데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의가 아니라 반대군요. 이리엘데 양, 좋아요. 말해봐요.”
“시기가 절묘하다고 했는데, 오히려 작위적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연합왕국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연합왕국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봅니다.”
율이 눈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이리엘데와 율,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 사이라 방금 발언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밀레나는 일단 들으라는 의미를 담아 홍차를 건넸다. 율이 식은 차를 단숨에 마셨다.
“연합왕국을 제외한다면 범인은 어디에 속한 자일까요?”
“말씀드리기에 앞서 첼 님께서 확언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이리엘데가 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첼이 대꾸했다.
“이 자리에서 오간 발언은 어떤 정치적인 의도도 없으며, 잠깐의 유흥일 뿐입니다. 만일 이번 대화로 인해 어떤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호하고 나아가 해결해줄 겁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테죠. 여러분은 스콜라 생도들이며 말의 무게를 잘 아는 친구들이니까요.”
첼이 선을 그어줬다. 이로써 보다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게 됐다.
“자, 이어서 말하세요.”
손짓을 받은 이리엘데가 입을 열었다.
“둔 군부, 혹은 관리국의 자작극일 수도 있습니다.”
“흠. 아주 파격적인 발언이군요.”
“이런 논의가 모든 발전의 기초라고 저는 믿습니다.”
첼이 미소를 지었다. 신흥과 시민 측 동기들은 눈에 띄게 좋아했고, 본토 쪽 동기들은 앓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해보죠. 관리국과 둔 군부, 둘 중 어느 쪽이 범인일 확률이 높죠?”
“전 관리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최근 성도 거병관리국에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첼 님도 아시겠지만 의회와 본토 쪽 귀족이 제명됐죠.”
“뼈 아픈 얘기군요.”
밀레나는 혀를 내두르며 이리엘데를 보았다. 의회의 얼굴 중 하나인 첼 앞에서 의회를 깎아내리다니. 다른 건 몰라도 뱃심 하난 인정해야 했다.
“거병 개발의 양대 산맥이 성도와 둔입니다. 그중 성도 관리국이 의회 손을 떠나기 일보 직전이죠. 의회와 본토 귀족은 불안했을 겁니다. 튤립전쟁으로 아잔탄스 가를 잃고 티안 가 역시 맥을 못 추고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신흥 귀족 세력이 움켜쥐고 있는 둔 관리국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첼이 이리엘데의 말을 정리했다.
“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을 저지른 겁니다. 성도와 둔, 두 관리국을 모두 빼앗긴다면 의회는 곤란해질 테니까요.”
“너무 과격한 수단이 아닐까요? 배후가 밝혀진다면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닐 텐데요.”
“그렇기에 미수로 그친 다음 자수한 겁니다. 예상하건대 범인은 범행 목적을 자백하지 않았을 겁니다. 조용히 처형당하고 나면 남는 건 둔 거병관리국의 관리 소홀 문제뿐이니까요.”
본토 쪽 동기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미엔이 손을 들었다. 첼이 말해보라며 발언권을 넘겨줬다.
“연합왕국의 개입을 억측이라 일축한 것치고는 너무 조잡한 가설입니다.”
“역사서를 들춰보면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즐비해. 궁지에 몰리면 이상한 판단을 내리는 게 사람이거든.”
이리엘데가 대꾸했다. 첼이 이리엘데에게 눈짓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흥분하지 말고 일단 들어보죠.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이건 잠깐의 유흥입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첼이 중재를 끝내고 미엔을 바라봤다.
“일단 위험도가 너무 높습니다. 모듈을 탈취하는 건 참작의 여지가 없는 극형으로 다뤄집니다. 연루된 자들은 사형을 면치 못하죠. 그런 위험한 일에 손을 댄 것치고는 얻는 기댓값이 너무 낮습니다.”
미엔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둔 관리국 수뇌부의 관리 소홀 문제로 여론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우선 수뇌부 교체가 확실시된다고 해도 그 자리에 반드시 본토 측 귀족이 올까요?”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겠죠. 관리국 인사는 황가와 의회의 협의를 통해 이뤄지는 거니까요.”
첼이 대답했다.
“또한 경비부 선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습니다. 책임을 끝까지 물어 수뇌부에 타격을 줄 수도 있겠지만, 면밀히 따지자면 정비고를 지키는 건 관리자의 일이 아니니까요.”
미엔이 이리엘데를 바라보며 발언을 끝냈다.
밀레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신경전을 벌이는 게 대단할 뿐이다. 피곤하지도 않나?
그건 그렇고, 이런 얘기를 꺼낸 첼의 의도가 한층 더 궁금해졌다.
두통이 일 정도로 고민 중이었다. 정말로 잠깐의 유희, 심심풀이일 뿐일까?
“세 사람 모두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어요. 빈약한 점도 있지만 타당한 점도 있었으니까요.”
첼이 중지에 낀 반지를 좌우로 돌렸다. 밀레나는 그 행동을 유심히 바라봤다. 버릇에는 당사자의 삶이 담겨 있다는 격언을 떠올리면서.
근데 중지에 낀 반지는 무슨 의미지? 멋 부리려고 낀 건 아닐 텐데.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밀레나 양.”
밀레나는 슬며시 시선을 올렸다. 첼과 눈빛이 맞닿았다. 반지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조금 놀랐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예.”
“다른 의견을 들어보고 싶군요. 범인이 만약 연합왕국 소속도 아니고, 파벌 싸움에 내던져진 제국 사람도 아니라면… 어디에 속한 자일까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율이 말했듯 모듈은 개인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막대한 설비와 상상 못 할 자금력, 거기에 뛰어난 인재가 갖춰져야 겨우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게 거병 개발이니까.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을 잠깐 떠올렸지만, 완성된 거병을 보유한 존재는 결국 인간뿐이었다. 쓸모도 없는 모듈을 타 종족이 훔쳤을 리도 없고.
인상을 한껏 쓰며 생각을 정리했다.
“모듈 자체가 목적이라면 두 곳을 제외한 세력은 떠올리기 힘듭니다. 만약 다른 세력이 존재한다면… 대전제를 바꿔야 합니다.”
“거병 모듈이 목적이 아니었다?”
“예. 그거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답이 없습니다.”
“모듈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범인은 무엇을 위해 모듈을 훔치려 했을까요?”
밀레나는 어머니에게 들었던 일화를 떠올렸다.
“…화려한 불꽃.”
“화려한 불꽃?”
“네. 세간의 이목을 한순간에 집중시킬 화려한 불꽃. 어머니께서 예전에 해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북부 칼랑족을 찾아갔을 때 있었던 일인데….”
밀레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동기들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어머니 얘기니까.
어머니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들었지만, 대답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일화를 꺼내 들었으니 시선이 쏠릴 수밖에.
되도록 삼가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바루새’라는 특이한 새를 봤다고 했습니다. 바루새는 군집을 이루는 새인데, 일정 주기가 되면 선택된 새가 몸에 불을 두르고 하늘로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며 말을 이었다.
“불꽃을 품은 깃털들이 밤하늘에 흩뿌려지는 광경은 넋을 놓게 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해요. 그 화려한 불꽃에 매료된 온갖 동물들이 밤길을 헤집으며 불꽃 밑으로 모여드는데, 그때 주변 일대가 난장판이 된다고 합니다.”
첼이 흥미롭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밀레나는 말을 계속했다.
“온순한 동물도 그 밤의 불꽃을 보게 되면 난폭해진다고 합니다. 모여든 동물들이 이빨을 세우고 서로를 물어뜯게 되는 거죠.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동이 트면, 일대는 동물 사체로 가득해지는데… 바루새들은 그걸 먹고 커가는 겁니다.”
신비하면서도 혐오감이 드는 얘기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모여드는 동물 중에는 바루새의 천적도 섞여 있다고 했습니다. 가장 화려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적을 제거하는 것. 어쩌면 이번 사건의 목적은 둔으로 시선을 모으는 것 자체일 지도 모릅니다.”
“밀레나 양의 말대로라면 사건은 이제 시작이겠군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어머니께서 해준 말이 기억에 남아 이번 일에 대입해 본 거고요.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의 소속은….”
“솔직히 말해 모르겠습니다. 단지 바루새처럼 이목을 끌어야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만 예측해볼 뿐이죠.”
얘기를 끝마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대답이 궁색했나, 하는 걱정이 잠깐 들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얘기 잘 들었어요. 바루새 얘기는 흥미로웠고요. 자신을 불살라 천적을 불러내고, 동족의 먹이로 만든다. 동물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군요.”
첼이 말하면서 다시 반지를 매만졌다.
“자, 깊게 들어가면 유희가 아닐 테니 거병에 관한 건 이쯤하고. 이번엔 내가 질문을 받아볼까 합니다.”
질문을 받아주겠다는 말에 동기들 눈빛이 달라졌다. 평소에는 그림자조차 보기 힘든 사람에게 질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혹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밀레나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딱히 질문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이 토론의 의미를 물어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가하란과의 관계를 물을 수도 없고.
“다들 묻고 싶은 게 많은가 보군요. 시간이 허락된다면 모두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순 없으니….”
첼과 시선이 마주쳤다. 밀레나는 슬그머니 왼쪽으로 눈동자를 옮겼다가 다시 앞을 봤다. 첼은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밀레나 양.”
“예.”
“가장 관심이 없어 보이니 질문할 기회를 드리죠.”
동기들의 시선이 한순간 쏠렸다. 굉장히 짓궂으신 분이네, 밀레나는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첼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생도들 사이에서 정치 구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본토, 신흥, 시민.
난 그 어디에도 발을 거치지 않은 상태기에 발언권을 준 것일 테고.
미엔이 열렬히 눈빛을 보냈다. 브리테는 눈썹까지 씰룩이며 눈짓했고, 이리엘데는 입을 뻐끔거렸다.
다들 바라는 질문이 있을 터였다.
밀레나는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가 시원하게 말했다.
“총집사님께서 중지에 끼고 계신 그 반지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호기심이나 풀어보자. 밀레나는 다른 동기들에게 산뜻한 미소를 선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