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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57화 (30/558)

제57화

“오랜만에 격식 차리려니까 힘드네. 차라리 훈련받는 게 낫겠어.”

“누가 아니래.”

옆에 있는 동기들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밀레나는 턱을 들고 제복 칼라에 달린 단추를 풀었다. 멋만 추구한 복장이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다들 수고 많았다.”

휴리우스 교관이 휴게실 문을 열며 말했다. 단정하게 누른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는데, 교관 역시 자리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이제 끝난 건가요?”

문 바로 옆에 있던 미엔이 질문했다.

“일단은.”

“뒤에 뭐가 더 남았나 보네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옷 갈아입지 말고 잠깐 대기해.”

휴리우스가 “인상 좀 펴라.”라고 말하며 문을 닫았다.

“만나야 할 사람이 더 남았나?”

“사령관님까지 봤으니까 더는 없을 텐데.”

밀레나는 미엔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일정 없이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오늘 공식행사가 갑자기 생겼다.

둔 군부를 이끄는 수뇌부들과 짧게 점심을 먹은 것이다.

“둔에 와서 근 한 달이 넘게 대기하다가 이제야 겨우 얼굴을 봤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밀레나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답을 구하려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동기들 중 사정을 파악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소문을 듣긴 했는데.”

이리엘데가 입을 열었다.

“소문?”

“신빙성 없는 소문이긴 하지만.”

“소문이란 게 원래 그러잖아.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나야 말하는 건 크게 상관없는데, 본토 쪽 어느 분께서 불편해하실까 봐 그러지.”

이리엘데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미엔이 있었다. 두 사람이 냉랭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밀레나는 손을 들어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려버렸다.

“신경전 하기엔 너무 피곤한 날 아니야?”

밀레나가 말을 끝내자마자 브리테가 거들었다.

“교관님께서 말씀하셨잖아. 행사가 끝난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이따가 또 실실 웃어야 할 텐데 둘 다 괜찮겠어?”

밀레나는 브리테를 바라봤다. 눈웃음 지으며 으쓱이는 그에게 엄지를 살짝 세웠다.

“좋아, 말해줄게. 대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나도 책임 못 질 소문이니까.”

이리엘데가 운을 뗐다.

“관리국에 문제가 생겼대.”

“보안 단계가 격상할 정도면 큰 사고라도 난 건가?”

밀레나는 먼발치에서 본 거병관리국을 떠올렸다.

“크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서 문제지만. 거병 모듈을 누군가 빼돌리려 했어.”

이리엘데는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휴게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사실이야?”

밀레나가 정적을 깨트렸다.

“소문이라니까 왜 사실을 찾아. 나도 들은 얘기야. 출처는 밝힐 수 없지만.”

“네 귀에 들어올 정도면 어느 정도 신용할 만한 소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재차 말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진짜 골치 아파.”

골치 아픈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거병 모듈을 노린 범행이라니. 사형을 바닥에 깔고 들어가는 범죄였다.

“그런 정신 나간 놈들이 둔에 있다라.”

브리테가 한마디 했다. 이리엘데가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리고는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발랄한 톤으로 말했다.

“떠드는 건 좋은데 나한테 뭔가 물을 생각은 마.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니까.”

이리엘데가 홍차가 든 잔을 들었다. 대화에서 물러나겠다는 표시였다.

“그 정도 사건이면 계엄이 내려졌을 텐데? 그런 명령은 없었잖아.”

“없었지. 보안 단계가 4단계로 올라갔었지만, 계엄은 아니었어. 물자통제까지 간 걸 보면 모듈이 탈취당한 게 아니라….”

“미수에서 그쳤나 보네.”

동기들이 하나둘 가설을 내놓았다.

“미수에 그친 상태에서 진전이 없었다면 보안 단계는 유지됐을 테지?”

“아마도.”

“지금 보안 단계는 2단계니까,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봐야 하나?”

“2단계까지 내린 거면 주동자를 잡았다고 봐야겠지.”

“로운. 위에서 별다른 얘기 없었어?”

모두의 시선이 로운에게 옮겨졌다. 로운은 난처한 기색을 약간 내보이며 말했다.

“이 정도로 통제된 정보는 내가 접근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렇긴 하지.”

로운은 머쓱하게 웃은 후 쿠키를 입에 물었다. 로운의 아버지가 성도 거병관리국 국장과 친밀한 사이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진 거고.

“너는 뭐 들은 얘기 없어?”

“전혀. 우리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해주겠어?”

“시리오스, 넌? ‘준 독서회’의 참석자잖아. 들은 거 없어?”

구석에 있던 시리오스가 다리를 꼬았다.

“독서회가 열린 건 우리가 성도에 있을 때잖아. 시기적으로 봤을 때 그때 둔은 아무 문제 없었을 거야.”

“하긴. 그때 문제가 터졌다면 견학 자체가 취소됐겠지. 그렇다면 최근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서로 아는 정보들을 교환해 가며 사건 정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온갖 설이 난무하며 이야기에 살이 붙어갈 때쯤, 미엔이 입을 열었다.

“근데 무엇 하나 확실한 거 없잖아. 애초에 모듈 도난 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가설에 불과하고.”

그때였다. 누군가가 휴게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밀레나는 바닥에 꽂혀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노인의 목소리였다. 밀레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며 팔을 붙잡은 율에게 눈짓을 준 다음 동기들을 향해 말했다.

“빨리 복장 제대로 갖춰. 로운, 입에 묻은 가루 털고. 율은 신발 끈 다시 묶고. 안칸은 잠 깨고.”

눈치 빠른 동기들은 이유를 묻지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밀레나도 풀어놨던 단추를 다시 잠그고 숨을 크게 마셨다.

“첼 총집사님이 밖에 계셔.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휴게실의 느긋한 공기에 늘어져 있던 동기들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지금 문을 열겠습니다.”

밀레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옆에 있던 미엔이 조심스럽게 문을 당겼다.

얼마 전 가하란 집에서 본 첼이 문밖에 서 있었다.

“쉬는 데 방해했나 보군요.”

“아닙니다!”

동기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콜라 생도 신분으로 이곳에 모였으니 군기를 다잡고 상급자를 대하는 게 최고의 예우였다.

“휴리우스 교관이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는 걸 내가 말렸습니다. 점심 내내 시달렸을 텐데 나까지 한몫 거들 순 없으니까요.”

첼이 휴게실로 한 걸음 들어왔다. 동기들은 질서정연하게 벽 쪽으로 의자를 몰아 공간을 만들었다.

꽤 넓은 휴게실이라 북적대는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은 피곤하겠지만.”

첼이 미소를 지었다.

“일단 그 갑갑한 단추를 풀까요? 나도 넥타이를 풀 테니.”

첼이 목에 맨 넥타이를 푸는 사이 미엔이 의자를 가져와 첼 옆에 두었다.

공식 행사가 있을 때 생도 대표로 나서는 건 항상 미엔이었다. 따로 정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표 격이 됐다. 신흥 귀족과 시민 측 동기들이 불만을 내비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대표 격이라고 해도 정치적인 득을 가져가는 건 아니니까.

“고마워요.”

첼이 의자에 앉으며 손짓했다. 앉으라는 제스처였다. 밀레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의자에 앉았다.

오늘 행사에 첼이 참석한다는 얘기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온갖 상상으로 머릿속이 뒤엉키는 동안 첼은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괜히 긴장감이 더해진다. 밀레나는 첼의 입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떤 주제가 저 안쪽에서 뛰쳐나올까.

하지만 몇 초가 지나도 첼은 빙긋 웃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경직된 동기들 사이에서 먼저 반응한 건 브리테였다.

목을 콱 조이는 상의 단추를 풀고 조끼를 벗었다. 밀레나도 서둘러 단추에 손을 댔다.

동기들이 긴장을 덜고 한결 편안한 자세를 취하자, 그제야 첼이 말문을 열었다.

“한결 낫군요. 참 답답한 제복이죠?”

“익숙해져서 이젠 괜찮습니다.”

브리테가 대답했다.

“그게 익숙해지다니 정말 놀랍네요. 난 아직도 넥타이를 맬 때면 답답해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꿈꾸곤 하죠. 관료 사회의 상징인 이 몹쓸 물건은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하고.”

첼이 손에 든 넥타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털털한 모습에 한순간 긴장감이 날아갔다. 몇몇 동기는 작게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로운 군. 오늘이 첫 공식 행사였죠?”

이름이 불린 로운이 움찔했다.

“예, 예.”

“내가 긴장할 필요 없다고 해도 여러분한테 별 소용은 없겠죠. 그래도 편히 대해줬으면 좋겠군요. 오늘 이 자리에 온 건 그저 여러분들과 얘기하고 싶어서니까요.”

동기들 중 몇 명이나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까.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냥’, ‘별 의미 없이’라는 말을 권력가가 사용했다면 더욱 주의해야 했다.

“눈빛들이 신중해지는군요. 압니다. 스콜라에 새로운 생도들이 들어올 때마다 이런 자리를 가졌고, 그때마다 여러분들은 나를 그렇게 바라봤죠. 정치 생리를 워낙 잘 아는 여러분들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죠.”

첼이 차를 부탁했다. 미엔이 홍차를 준비해 가져다줬다.

“고맙군요.”

첼이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여러분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의미를 파악하려 애쓸 테니, 아예 다른 얘기를 해보죠. 여러분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것으로.”

찻잔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잔 받침에 내려앉았다.

“밖에서 여러분이 나누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들었습니다.”

대화 내용을 들었다는 말에 밀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이리엘데의 표정이 한순간 굳는 게 보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는 건 여러분도 알 자격이 있다는 거니까요.”

“그 말씀은….”

밀레나는 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둔에는 아주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추측대로 거병 모듈과 관련된 문제였죠.”

첼이 고개를 살며시 움직였다. 이리엘데가 있는 방향이었다.

“거병 모듈이 밀반출될 뻔했습니다.”

소문이 사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동기들이 재빨리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범인은 잡혔습니까?”

브리테가 질문했다.

“다행히도 잡혔습니다. 아니, 잡혀줬죠.”

미묘한 단어였다. 잡혀주다니. 자수했다는 건가? 대체 왜?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자수한 거군요.”

미엔이 말했다. 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행 동기나 목적을 알 수 있을까요?”

율이 고개를 살짝 내밀며 물었다.

“범행 목적. 여러분 말이 나온 김에 한번 얘기해 보죠. 범인이 무슨 목적으로 이번 일을 벌였는지 추리해 보는 겁니다.”

“저희가요?”

“그래요.”

첼이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리며 말했다.

“율 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범인은 어째서 이곳 거병관리국을 노렸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할 뿐이니 가감 없이 얘기해 봐요. 잠깐의 유희라 생각하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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