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6화 (29/558)

제56화

“내일 또 놀러 와!”

머리 위로 손을 흔드는 테리였다. 가하란도 “알겠어.”라고 크게 대답하며 손을 휘저었다.

“더 놀다가 오지.”

올란트가 말했다. 가하란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엄마 만나러 가는 거잖아요. 같이 갈래요.”

뒷말을 기다렸지만 올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하란의 손을 살며시 쥘 뿐이었다.

남문으로 가는 길을 따라 올란트와 걸었다. 낮아 보이던 성벽이 이제는 고개를 꺾어야 할 정도로 높아졌다.

도시를 경계 짓는 높은 벽을 따라 얼마간 더 걸었다.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의 걸음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증명패나 통행증은 미리 꺼내두시오!”

날이 바짝 선 창을 든 경비병이 옆을 지나다니며 외쳤다. 가하란은 올란트를 슬쩍 바라봤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증명패를 꺼내는 올란트였다.

“B150, 올란트. 외출 목적은 저번하고 같은 거요?”

줄이 줄어들고 이윽고 검사관 앞에 섰다. 검사관의 질문에 아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무 늦게 돌아오진 마시고. 다음!”

검문대를 벗어나 성문 밖으로 나왔다. 해자를 가로지른 다리 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끝도 없이 늘어선 거대한 짐마차를 보고 있자니 둔이 얼마나 큰 도시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아빠. 저 말은 덩치가 엄청나게 커요.”

“저건 아마도 은퇴한 군마일 거다.”

“루카 아저씨랑 탔던 말도 저만했어요.”

“그랬구나.”

가하란은 쉴 새 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몇 번이나 본 성벽 밖 풍경이지만 여전히 재미있었다.

예전에 아빠가 말하길, 성벽 안쪽 도시만 둔이라 부른다고 했다. 성벽 밖에 자리 잡은 이 넓은 마을은 ‘아웃라인’.

면적으로만 치면 둔보다 수배는 넓고 사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아빠, 저기 봐요!”

무리 지어 걷는 양 떼를 가리켰다. 주둥이가 긴 목양견이 바삐 움직이며 양을 한 방향으로 몰았다.

“툴도 할 수 있을까요?”

“가르치면 할 수 있을 거다. 툴도 목양견으로 길러지는 견종이니까.”

“근데 저 개처럼 날렵하게 움직이지는 못할 거 같아요. 툴은 둥글둥글하고, 통통하잖아요.”

“살 빼면 저 친구처럼 날렵해질걸?”

가하란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걸 올란트에게 질문했다. 아빠 저건요, 아빠 이건요. 아빠는 막힘없이 대답해 주었고, 모르는 게 생기면 공부해서 알려준다고 말했다.

“하늘석이다.”

가하란은 잠시 멈춰 섰다. 저 멀리 능선 위로 하늘석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방향으로 보건대 저녁에는 이 위를 지날 것 같았다.

“하늘석에는 정말 드래곤이 살까요?”

“그건 모르겠네. 용이 잠들어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직접 본 사람은 없으니까.”

가하란은 한쪽 눈만 뜨고 하늘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가려진 하늘석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언젠가는 가볼 거예요.”

“쉽지 않을걸.”

“에이, 아빠가 말했잖아요. 꿈은 크게, 또 많이 가져라.”

“그랬지.”

멀거니 하늘석을 구경하다가 이제 가자는 아빠 말에 걸음을 뗐다. 익숙한 산길로 들어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낙뢰를 맞아 새카맣게 타들어 간 이름 모를 나무 옆. 크기가 제멋대로인 비석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엄마가 잠들어 있는 곳은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 왔어. 당신 아들도 같이 왔고.”

바닥에 뉜 비석 앞에서 올란트가 입을 열었다. 가하란은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기다렸다.

아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향초를 켜 비석 옆에 두고 준비해온 꽃송이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곳에 올 때면 아빠의 웃음은 펑펑 우는 것만큼이나 울적해졌다. 차라리 울면 나을 텐데,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아빠가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엄마는 너처럼 글자 읽는 걸 좋아했어. 그게 책이든, 아니면 거리 광고 문구든 상관없이 글자가 있으면 일단 멈춰서 다 읽곤 했지.”

향초가 반쯤 타들어 갔다. 가하란은 올란트 몸에 기댄 상태로 말을 들었다.

평소에도 종종 엄마에 대해 말해주는 아빠였지만, 길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아주 짧게 지나가는 투로 말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아빠는 엄마와의 추억담을 아낌없이 꺼내놓았다.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괜히 간지럽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만 갈까?”

올란트가 말했다. 짧고 얇은 향초가 거의 다 탔다.

“더 있다가 가도 돼요.”

“늦기 전에 가야지. 밥도 먹어야 하고.”

아빠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비석을 볼 때였다.

-또 왔네. 안 본 사이에 더 큰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인간은 엄청 빨리 자란다니까.

정수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 2m 정도에서 작은 거북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거북이?”

아주 작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간 봐온 정령들은 이 세상의 물건 혹은 동식물을 닮았지만, 다른 부분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령은 강가에서 때때로 보이는 거북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가하란?”

정리를 끝마치고 움직이던 아빠가 무슨 일이냐며 말을 걸었다. 가하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말하는 정령과 얽혀서 좋을 게 없었다.

할아버지를 괴롭히던 정령도 그렇고, 집을 찾아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정령도 그렇고, 말하는 정령은 하나같이 이상했다.

그러니 무시했다. 목소리를 못 들은 척 괜히 하늘을 쓱 살핀 다음 아빠를 향해 움직일 때였다.

-너, 내가 보이는구나? 혹시 목소리도 들려?

거북이 따라왔다. 가하란은 애써 무시했다. 눈앞을 헤엄쳐 다녀도, 빙글빙글 돌아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금방 지쳐서 떨어져 나가겠지. 외면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검문대 앞이었다. 밖으로 나올 때 보았던 검문관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별다른 질문 없이 증명패 확인만으로 검문대를 통과했다.

“많이 걸어서 힘들지?”

“조금요.”

“이리 와. 아빠가 업어줄게.”

아빠 등에 업혔다. 조금 높아진 시야로 주변을 돌아봤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거리가 황혼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집이 어딘데?

잊고 있던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하마터면 놀라서 쳐다볼 뻔했다.

곁눈질로 슬쩍 확인했다.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가하란은 계속 못 본 척했다. 거북 너머에 있는 상가에 눈길을 주며 괜히 딴소리도 했다.

-나 보인다는 거 알아. 근데 목소리까지 들리는 거 같네. 인간의 셈법으로 치면 7년 만인가?

끈질긴 정령이었다. 숨을 고르고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했다. 떠버리 정령을 의식 밖으로 밀어낼 때처럼.

집중하지 않으면 정령의 기척은 옅어진다. 이제 거북을 닮은 정령도 의식 바깥으로 밀려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하늘에 둥실 떠 있던 다른 정령들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이내 안 보였다.

-여기는 뭔가 바뀐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네. 인간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거북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정령들과 달리 형태를 유지한 채,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리둥절한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거북은 여전히 하늘에 뜬 채 따라오고 있었다.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어디 가세요?”

“크론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배 많이 고프면 먼저 먹어도 돼.”

“아니에요. 기다릴게요.”

올란트가 집을 나섰다. 가하란은 툴을 옆구리에 끼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벽을 통과해 집 안을 돌아다니던 거북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푸른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바라본다.

시야를 가리는 통에 고개를 몇 번이나 꺾었는지 모른다. 무시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언제까지 안 보이는 척할 수도 없고.

“왜 따라온 거예요?”

결국 질문하고 말았다. 무심히 바라보던 거북이 빙글 돌았다. 배딱지를 보이며 헤엄치는 거북은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대단한 이유는 없어.

“뭘 보고 싶은데요?”

-내가 다 설명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여긴 우리 집이에요. 멋대로 들어왔으면 적어도 대답은 해줘야죠.”

-나한테 영토권을 주장하는 거야? 그러면 안 될 텐데.

그때였다. 한동안 안 보이던 떠버리 정령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솟구쳤다. 땅을 뚫고 올라오고, 지붕을 통과해 내려왔다.

순식간에 시장터가 됐다. 가하란은 손으로 귀를 막아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귀를 틀어막았다.

“저기요! 좀 조용히 해주세요!”

외쳐봤자 소용없었다. 거북을 중심에 두고 정령들이 원을 그렸다. 소음이 점점 더 커진다. 정령세계로 이끌려 갔을 때와 비슷했다.

의식을 분산시켰다. 낮에 먹은 음식을 떠올리고, 길가에서 본 이름 모를 벌레를 생각했다.

모든 걸 이해하려 들지 마.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예리한 소리가 의식을 비집고 들어와 흔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위험해질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려던 때였다.

-저 인간족 아이가 시끄럽다잖아.

거북의 음성이 집 안을 휩쓸었다. 온갖 소음으로 떠들썩하던 집이 정적을 되찾았다.

바글바글하던 떠버리 정령들도 모습을 감췄다. 가하란은 엉거주춤 서서 난로 위를 유영하는 거북을 보았다.

-다들 너한테 관심이 많네. 겨우 뜨인 눈으로 안원(安原)에 다녀온 것이 그리도 신기한가? 하긴, 대부분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데 혼을 보존한 채 돌아왔으니 신경 쓰이겠지.

“…안원이 뭔가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궁금증은 참기 힘들었다.

-너희들이 정령세계라 부르는 곳. 우리들의 고향, 우리들의 안식처, 우리들의 묘지. 네가 보고 온 그곳이 안원이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은 것 같았다. 핀들론 할아버지 곁에 있던 정령들 중 하나가 저 단어를 썼었다.

거북이 툴 머리에 내려앉았다. 툴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코를 바짝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앞다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다른 정령들은….”

-시끄러워서 다른 곳으로 보냈어. 그렇다고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 주변에서 구경 중이겠지.

날 도와준 건가. 가하란은 거북을 유심히 바라봤다.

-닮았네.

거북이 말했다.

“네?”

-닮았다고. 세핀느, 그 아이와.

낯선 정령이 엄마의 이름을 언급했다. 경계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친근감이 느껴졌다.

“우리 엄마를 아세요?”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인간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은 너무나도 상이하니까.

엄마를 아는 정령.

거북이 둥실 떠오르더니 가하란 머리에 앉았다.

-한동안 옆에 있어 줄게. 시끄러운 놈들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지금까지 만나온 정령과 많이 달랐다. 혼자 떠들지도 않고, 이상한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말투에서는 온정이 느껴진다. 가하란은 이와 비슷했던 정령을 떠올렸다. 산처럼 거대했던 쥐. 목숨을 구해준 친절한 정령.

“혹시 산테라는 정령을 알아요?”

-그놈이 널 구해준 모양이구나. 그러니 안원에서 죽지 않았겠지.

아는 것 같았다. 거북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그다지 안 친한 이웃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과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 아빠가 돌아온 것이다. 가하란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북이 모습을 감추었다.

“가하란! 아빠가 뭘 가져왔게?”

올란트가 들고 온 물건을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도화지예요?”

“그래. 너 주려고 크론한테 부탁해 놨어.”

“거기다 뭘 그릴 거예요?”

신이 나서 되물었다.

“그림보다는 글을 쓰게 될 거야. 가하란,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지?”

“네!”

“그럼 됐어. 여기다 아빠가 아는 것들을, 기초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들을 적어줄게. 이게 네 첫 교과서가 될 거야.”

아빠가 도화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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