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5화 (28/558)

제55화

“아빠! 빨리요!”

가하란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머리에 인 바구니가 왼쪽으로 기우뚱거렸다.

“갈 테니까 안에 든 거 안 쏟아지게 조심해.”

“알겠어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빠와 같이 시내를 걷는다는 게 이렇게나 즐거운 일이었다니.

옆으로 다가온 올란트가 바구니 손잡이를 쥐며 물었다.

“그냥 아빠가 들게.”

“제가 들게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바구니를 머리에서 내리고 품에 안았다. 몸통보다 살짝 작은 바구니라 안는 게 조금은 버거웠다. 그래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라 힘차게 걸음을 뗐다.

“안소니 아저씨가 좋아할 거예요.”

바구니 안에는 잘 다듬은 나이프와 포크, 이름이 각인된 그릇, 거기에 찻잎을 담은 병이 들어 있었다.

아빠와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염장한 킬레니 들여가세요.”

“닳아서 못 쓰는 가죽화 매입합니다. 매대에 있는 물건하고도 교환 되니까 일단 오세요.”

장날이라 거리가 떠들썩했다. 평소보다 가판 연 사람의 수가 많았다.

“여기까지 사람들로 들어찬 건 처음인데.”

올란트가 말했다.

“룽네 아줌마가 말해줬는데 연합왕국에서 상단이 들어왔대요. 그래서 더 북적거리는 거고요.”

“보안 단계가 완화돼서 출입 허락이 떨어진 모양이구나.”

사람들로 만들어진 벽을 이리저리 피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저 멀리 목적지가 보였다. 루드 여관의 간판이 앞뒤로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관 문을 열면서 외쳤다. 아빠와 같이 와서인지 괜히 들떴다. 손님으로 가득 찬 테이블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테리가 보였다.

손을 들어 알은척하려 했지만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통에 인사도 못 했다.

“왔구나.”

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안소니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안소니는 아무 말 없이 올란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몸은 멀쩡한 것 같고.”

“제가 몸 하나는 튼튼하잖아요.”

“그 입도 문제없는 것 같고. 그러면 됐다.”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올란트를 안는 안소니였다. 가하란은 잠깐 기다린 다음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요.”

“이게 뭐냐?”

“아빠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저 챙겨 주셨잖아요. 아빠랑 같이 준비해 봤어요.”

“…가하란. 너 내 아들 하는 게 어떻겠냐?”

농담과 함께 바구니를 받는 아저씨였다. 가하란은 웃으면서, 동시에 아빠 아들 할 거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일단 여기 앉아서 기다려라. 보다시피 사람이 갑자기 몰려서 바빠.”

“저도 도울게요.”

가하란은 카운터로 달려갔다. 익숙한 동작으로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간 다음 제니가 만들어 준 전용 앞치마를 둘렀다.

그냥 있어도 된다는 안소니 말에 고개를 한번 내저은 다음, 테리에게 다가갔다.

“형, 나 왔어.”

“엄청 바쁠 때 왔네.”

“그래서 도우려고. 뭐 하면 돼?”

“3층 정리 좀 해줘. 3호부터 6호. 그리고 8호. 혹시 짐이 있으면 내버려 두고 침구만 정리하면 돼.”

“알겠어.”

3층으로 올라가며 올란트를 바라봤다. 안소니와 함께 주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3호부터 6호. 그리고 8호.”

기억해둔 걸 되뇌며 객실 정리를 시작했다. 자주 하던 일이라 어려운 건 없었다.

금세 8호실까지 정리를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베개의 모양을 잡고 있는데 테리가 들어왔다.

“벌써 다 했어?”

“어. 1층은?”

“식사 마무리하는 시간이라 바쁜 거였어. 지금은 손님 몇 명 없어.”

테리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제니보다 훨씬 낫다. 걔가 정리하면 좀 엉성해.”

“제니도 잘해. 근데 제니는 어디 갔어? 심부름?”

“어. 손님 데리고 요정의 안뜰로 갔어. 구치 아저씨랑 같이 오신 분인데….”

“구치 아저씨?”

“넌 모르겠구나. 우리 아빠 친구. 아무튼 구치 아저씨랑 같이 온 분이 팁으로 은화를 줬거든.”

테리가 자기도 받았다면서 반질반질한 은화를 꺼내 들었다.

“제국은행에서 발행한 거네. 대상단이 아니라.”

제국은행에서 발행한 거라면 은화 중에 가치가 가장 높았다. 저런 걸 팁으로 줄 사람이면 얼마나 부자인 걸까?

“좀 희한한 손님이야. 뭔가 어리숙해 보이면서도 되게 날카로워 보이고. 아무튼 이렇게 큰돈을 받았으니 서비스는 제대로 해야지. 그래서 제니가 직접 길 안내를 나선 거고.”

“은화를 팁으로 주고 요정의 안뜰까지 간 걸 보면, 귀족일 수도 있겠네.”

“그건 아닐걸? 귀족은 이런 곳에 짐을 풀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수행인도 없었고. 사냥꾼하고 여행 다니는 귀족은 상상할 수 없지.”

“사냥꾼? 그 구치 아저씨를 말하는 거지?”

“맞아. 제법 유명한 사냥꾼이셔. 미개척지도 가봤다고 했고.”

미개척지를 다녀온 사냥꾼. 호기심이 샘솟았다. 사냥꾼이라면 대륙 전역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말을 걸어봐.”

“귀찮아하시지 않을까?”

“좀 무뚝뚝해 보이긴 해도 좋으신 분이야. 우리도 잘 챙겨주시고.”

테리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형 말대로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 한가로워 보였다.

“와서 간식 먹어라.”

안소니였다. 잰걸음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릇에 가게 이름을 새긴 거 너라면서?”

“제가 다 한 건 아니에요. 아직 어려워서.”

“그 정도면 어지간한 어른보다 낫다. 아무튼 잘 쓰마. 선물 고맙다.”

가하란은 배시시 웃었다.

“근데 제니는 아직 안 왔어요?”

테리가 가게 안을 살피며 말했다.

“곧 오겠지.”

안소니가 올란트에게 턱짓을 했다.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먹고 있어.”

가하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서는 올란트였다.

“아저씨 이제 괜찮은 거지?”

올란트와 안소니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테리가 물었다.

“어.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안 그래도 아빠가 계속 걱정했어. 나보고 너희 집 자주 찾아가 보라고 했고. 뭐, 부탁 안 해도 계속 갔겠지만.”

“고마워, 형.”

“뭘. 동생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야.”

테리가 킥킥 웃으면서 비스킷을 쥐었다.

“참, 아빠는 우리가 은화 받은 거 모르니까 말하면 안 돼.”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넌 눈치는 있는데 표정에 다 드러나잖아.”

“다들 그러더라. 내가 표정을 못 숨긴다고. 그건 아닌데.”

“아니긴. 딱 보면 티가 나는 얼굴이야, 넌.”

“그건 내가 형한테 숨기는 게 없어서 그래. 아니, 사실 숨기는 게 있어. 근데도 형은 눈치 못 챘잖아.”

“나한테 숨기는 게 있었어? 뭔데?”

가하란은 입을 꾹 닫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테리가 입을 씰룩거리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됐고, 오늘 내 방에서 놀다 가. 아빠한테 체스 배웠는데 너한테도 알려줄게.”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금방 가야 해.”

“왜? 무슨 일 있어?”

“엄마 만나러 가.”

테리가 코를 한번 찡긋거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체스는 다음에 알려줄게.”

“알겠어.”

“근데 제니는 왜 이렇게 안 와? 이 시간이면 안뜰까지 두 번은 왔다 갔다 했겠다.”

“오늘 장 서는 날이라 시장 구경 간 거 아닐까?”

“걔 은근히 겁 많아서 혼자 시장 구경 안 가. 뭔 일 있나.”

“그 구치 아저씨랑 같이 간 거잖아? 그러면 별문제 없겠지.”

“그렇긴 해.”

얘기하면서 간식으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남은 비스킷이 하나였다. 관심 없는 척하고 창문을 볼 때였다.

“자.”

테리가 비스킷을 내밀었다.

“형은?”

“난 이거 맨날 먹어.”

“거짓말. 이거 레티 제과점 거잖아. 비싸기로 유명한 곳.”

“그러니까 너 먹어.”

가하란은 비스킷을 받은 다음 반으로 쪼갰다. 테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작은 걸 쪼개? 뭔 맛인지도 못 느끼겠다.”

“이미 먹어서 무슨 맛인지 알잖아. 그러니까 자, 얼른.”

테리가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과자를 입에 넣었다.

“네가 그러니까 제니가 자꾸 나한테 뭐라고 그러잖아. 가하란이었다면 줬을 텐데, 가하란이었다면 웃었을 텐데.”

“제니는 나한테 이러던데? 오빠였으면 들어줬을 텐데, 오빠였으면 안 그랬을 텐데.”

“걔도 보통은 아니야.”

“그건 동의해.”

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나중에 제니랑 결혼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원래 다들 그렇게 결혼하잖아. 코첸 형이랑 알르 누나, 아켄 형이랑 마엘레 누나도 그렇게 결혼했고.”

“나 아직 어려.”

“누가 당장 하래? 그냥 마음 있으면 나한테 미리 말해두라고.”

“그러는 형은? 누구랑 결혼할 건데?”

테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사렐 누나 알지? 목소리 진짜 예쁘고, 노래도 잘하는 누나.”

“알지. 그 누나한테 반한 거야?”

“어. 내가 열 살이고 그 누나가 열다섯이거든? 앞으로 5년 뒤에 결혼할 거야.”

“그 누나가 허락은 했고?”

“노력해 봐야지.”

“나는 형의 그런 무모한 점이 좋으면서도 가끔은 한심해.”

“계획은 크게 잡는 게 좋다고 어느 영웅이 말했어.”

“근데 열다섯에 결혼은 좀 이르지 않아? 보통 열일곱에 하잖아.”

“2년 정도는 괜찮아. 우리 아빠도 엄마랑 열다섯 살 때부터 같이 살았대. 결혼식은 안 올렸지만.”

결혼. 머나먼 얘기라 와닿지도 않았다. 아빠가 종종 장난스레 말하기도 했지만, 결혼은커녕 눈에 들어온 여자애도 없었다.

“둔에서 일곱 살이면 반쯤 성인이야. 알고 있지?”

“아닐걸.”

“그냥 그렇다고 해. 너도 주변 잘 둘러보고 다녀. 집안끼리 따로 약속한 사이 없으면 좋은 사람은 직접 찾아다녀야 하니까.”

테리의 말을 듣다 보니까 불현듯 밀레나가 떠올랐다. 그 동그랗고 붉은 눈동자가 왜 지금 갑자기 생각난 걸까.

“뭐야? 그 표정은?”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 있어서.”

“누군데?”

“저번에 말했지? 웰턴 아저씨네 고양이를 잡아준 여자애.”

“가구거리에서 만났다던 귀족?”

“응.”

테리가 인상을 쓰면서 혀를 찼다.

“헛된 꿈 꾸지 말고 주변에서 찾아. 귀족은 무슨.”

“난 그냥 생각나서 말했을 뿐이야. 별 의미는 없어.”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났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있는 거라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형이 하는 말 잘 새겨들어. 괜히 관심 갖지 말고 싹 잊어. 어차피 다시는 볼 수 없는, 별 같은 존재니까 말이야.”

이미 몇 번이나 만나서 얘기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려다가,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표정도 잘 꾸몄다. 역시 테리는 알아보지 못하고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이것 봐, 숨기려 들면 나도 잘 숨길 수 있다니까.

가하란이 씩 웃었다.

“갑자기 왜 웃어.”

“나도 거짓말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넌 뭐든 잘하지만, 거짓말은 아닐걸.”

“글쎄.”

빤히 쳐다보던 테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가하란도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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