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일어서서 왼쪽 발에 체중을 실어보세요.”
올란트 말에 코엔이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가하란은 코엔 옆에 서서 팔을 살며시 붙잡아줬다.
“할머니, 어때요?”
가하란은 코엔의 왼쪽 발을 보며 물었다. 회색 의족이 쇠 마찰음을 냈다.
“확실히 편해졌어.”
“다행이네요.”
코엔이 올란트를 바라봤다.
“걸어봐도 되는 건가?”
“천천히 걸어보세요. 가하란, 할머니 부축해드려.”
할머니에게 어깨를 빌려준 상태로 보폭을 맞춰 걸었다. 불편해 보이던 걸음걸이가 차츰 나아졌다. 제자리로 돌아온 코엔이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았다. 의족이 아직은 불편한 모양이었다.
“많이 아프세요?”
가하란은 다리와 의족의 연결 부위를 조심스럽게 주무르며 물었다.
“아프진 않아. 근데 힘이 들긴 하네.”
후, 숨을 짧게 토해낸 코엔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게 어디니.”
가하란의 귀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기는 코엔이었다. 간지러워서 살며시 웃음이 나왔다.
“계속 움직이셔야 편해질 거예요. 당분간 지팡이를 쓰시다가 통증이 완화되면 놓는 걸로 해요.”
가하란은 아빠의 설명을 귀담아들었다. 이런 거 하나하나가 귀중한 정보였다.
“몇 년째 쓰던 의족인데 왜 갑자기 말썽인지 모르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편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사람 몸이 시간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데, 그 미세한 차이가 통증을 만들어내요.”
“내 몸은 변하는데 쇳덩이는 안 변해서 그런 건가?”
“예. 그런 거죠.”
코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귀찮게 해서 어째.”
“또 그런 말씀 하신다. 하나도 안 귀찮으니까 불편해지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올란트가 설명을 끝마치며 가하란에게 눈짓을 주었다.
“할머니, 잠깐만 의족 풀게요.”
전용 도구를 사용해 의족 상부를 조이던 연결쇠를 풀었다. 뭉툭한 다리가 드러났다. 절단면을 감싼 덮개를 풀고 붉게 달아오른 피부에 연고를 발랐다.
“아빠가 이번에 새로 만든 연고예요. 의족 착용하시기 전에 꼭 바르셔야 해요. 덜 쓸리고 덜 짓무를 거예요.”
“전에 쓰던 것도 좋았는데.”
“그거보다 조금 더 좋아요.”
의족을 다시 연결했다. 중심을 잡으며 일어선 할머니가 만족스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막둥이. 언제 이렇게 손이 야무지게 여물었을까. 아빠보다 낫네, 나아.”
할머니의 손이 얼굴에 닿았다. 양 볼을 살짝 쥐고 가볍게 비틀다가 놓는다.
“아빠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배울 게 산더미예요.”
마지막으로 올란트가 접합부를 살폈다. 가하란도 집중해서 아빠의 시선을 좇았다. 어딜 살피는지, 무엇을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지, 무엇을 염두에 둬야 하는지 되새김질하면서.
“이제 됐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아빠가 말했다. 점검이 끝난 모양이다.
“고생은 내가 했나. 자네랑 우리 막둥이가 했지.”
코엔이 주머니를 꺼냈다. 보자마자 올란트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뭘 괜찮아. 일했으면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한 거야. 날 염치없는 노인네로 만들 생각은 말아.”
반들반들한 은화가 주머니에서 나왔다. 코스루 대상단이 발행한 은화 같았다.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 없어요.”
“시내 교정점에 가면 이거의 배는 줘야 하는데, 실력은 자네보다 못해. 친절하지도 않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자네한테 이걸 보여주겠어. 다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야.”
올란트가 재차 거절하자 은화가 가하란 앞으로 왔다. 가하란은 손을 내저었지만, 코엔은 가만히 있으라면서 은화를 조끼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걸로 아빠랑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리고 나중에 우리 가게도 꼭 찾아오고. 너한테 맞는 옷이 몇 벌 있으니까 선물로 주마.”
단호한 눈빛에 가하란은 항복하고 말았다. 배시시 웃은 다음 은화를 아빠에게 건넸다.
“이거 안 받으면 할머니가 혼낼 것 같아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올란트가 돈을 받은 후 코엔에게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여기 오면서 룽네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자네 큰일을 치렀다며?”
“오해가 생겨서 잠깐 조사만 받았어요. 지금은 다 해결됐고요.”
“세상천지에 자네처럼 순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조사를 해.”
“이제 다 끝나서 괜찮아요.”
할머니가 눈동자를 살며시 굴렸다. 시선이 가하란에게 닿았다. 정말 괜찮은 거냐, 하고 묻는 눈빛이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요즘 도시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옆 가게에 행정처 관료가 들이닥치더니 다 뒤집어엎었어. 대체 이 도시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할머니 말에 아주 잠깐이지만 아빠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아빠가 군부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가하란은 군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붙잡힌 것인지 묻지 않았다.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면 아빠가 말해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막둥이도 일곱 살이 됐구나. 행정처에서 일은 정해줬고?”
“전 아빠한테 배우기로 했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너희 아빠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 잘 배워둬. 네가 좀 더 크면 이 할머니가 유명한 교정점에 널 소개해줄 테니까.”
“아니요. 전 거병 기술자가 될 거예요.”
“거병?”
코엔이 눈을 깜빡이다가 올란트를 바라봤다.
“아빠한테 배운다는 게 그쪽이었어?”
“저희 아들, 보통내기가 아니죠?”
“뭐, 꿈은 크면 클수록 좋다고 하니까. 그래도 먹고살려면 잔기술을 익혀두는 게 좋아. 아니지. 막둥아,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이 할머니한테 와. 가게 점원으로 고용해줄 테니까.”
코엔이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지팡이를 잡았다. 가하란은 골목 초입까지 코엔을 배웅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점심 먹을까?”
“네!”
밖이라고 해봤자 집 앞마당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쫄래쫄래 쫓아온 툴에게 사료를 챙겨준 다음 아빠가 만든 벤치에 앉았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쓸고 갔다.
가하란은 바람에 실려 둥실 떠오른 정령들을 바라봤다. ‘떠버리 정령’들은 다른 모임이 있는지 다 사라지고, 멍하니 떠다니는 정령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하늘에 뭐라도 있어?”
올란트가 옆에 와서 앉았다. 움푹 들어간 접시에 으깬 고구마와 삶은 고기가 들어 있었다.
“저 비밀이 하나 생겼어요.”
“비밀?”
“네.”
“아빠한테 말해줄 수 있는 비밀이야?”
먹기 좋게 자른 고기가 눈앞으로 왔다. 가하란은 포크를 넘겨받은 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아빠가 삶은 고기는 마법을 부린 것처럼 부드러웠다.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만 말하라고 해서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언제 그런 비밀이 생겼을까. 아빠는 너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타린족 아저씨가 집에 왔었다는 거 기억하시죠?”
“기억하지. 네가 얼마나 자세히 말해줬는데.”
아빠가 으깬 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가하란도 포크로 고구마를 조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생긴 일이에요. 저 정령이 보여요.”
아빠가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가하란은 손을 움직여 아빠의 턱을 살며시 밀었다.
“정령이 보인다고?”
“네.”
“그러면 방금 보고 있던 게….”
가하란은 포크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에 하나, 저쪽에도 하나. 그리고 저기도. 오늘은 평소보다 수가 적어요. 다른 곳으로 놀러 간 것 같아요.”
“아빠 눈에는 안 보이네. 어떻게 생겼니?”
“말로 설명하기 힘들게 생긴 애가 대다수예요. 아, 저쪽에 있는 애는 닭하고 비슷해요. 근데 날개에 숟가락처럼 생긴 팔이 달려 있어요.”
“그거참 이상하게 생긴 닭이네.”
“닭하고 비슷한 거지 사실 하나하나 따지면 닭하고도 달라요. 일단 부리가 되게 길고요, 벼슬도 화려해요. 날개는 나뭇가지를 닮았고요.”
“그런 정령들이 여기저기 있는 거고?”
“네. 아빠한테도 보여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말하고 나니 속이 개운해졌다. 사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였다. 타챠의 경고가 없었다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둔에서 이걸 아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어요.”
“테리와 제니도 몰라?”
“감추느라 혼났어요. 테리 형은 정령에 관한 이야기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알려주고 싶었는데 꾹 참았어요.”
“우리 아들, 입이 근질거렸을 텐데 잘 참았네.”
아빠가 대견하다고 말하며 어깨를 살짝 움켜쥐었다.
“그거 말고도 또 있어요.”
“또?”
“저 정령세계를 보고 왔어요.”
“정령세계?”
가하란은 광활했던 정령세계의 하늘을 떠올렸다. 여러 색으로 층층이 빛나는 신비로운 세계.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곳이자,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위험한 장소.
당시 기억을 되짚어가며 천천히 설명했다. 기절하듯 깊은 잠이 들었고, 기묘한 정령세계에 도착하게 됐다고.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소리에 파묻혀 제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마 그대로 몇 분만 더 있었다면 아마 전 없어졌을 거예요.”
아빠가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가하란은 경직된 표정을 풀면서 말했다.
“그때 커다란 쥐가 도와줬어요. 눈이 루비처럼 붉은 쥐였어요. 산보다 더 커 보였는데, 타린족 아저씨 말로는 그 쥐가 산의 영령이라고 했어요. 이름이… 산테. 산테였어요.”
말을 끝낸 가하란은 아빠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빠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빠?”
“가하란. 다시는 그곳에 가면 안 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일 거예요. 저번에는 우연히 떠밀려 간 거고요.”
“그래도 아빠랑 약속해 줬으면 해. 두 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왜요?”
“위험하니까. 네가 말했듯이 정말 위험한 곳이니까.”
아빠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우물쭈물하다가 손가락을 걸었다.
“알겠어요. 만약 갈 수 있게 되더라도 안 갈게요.”
영롱하게 빛나던 하늘이 그립기는 하지만, 약속했으니 기회가 오더라도 거절할 것이다.
아빠가 약속을 내걸 때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실망한 티가 얼굴에 확 나네.”
“진짜 멋진 곳이거든요. 아빠한테 꼭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약속을 평생 지키라는 건 아니야. 일단은 조심하란 뜻이지. 아빠가 정령세계에 관해 공부하고 알아볼게. 네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말이야.”
“정말요?”
“물론 아무것도 못 알아낼 수도 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니까. 만약 내가 아무것도 못 알아낸다면, 그땐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러니까 당분간은 조심하는 거다. 알겠지?”
가하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비밀이 또 있는 건 아니겠지? 아빠한테 감추고 싶은 게 있으면 감춰도 좋지만.”
“저도 다 말하는 건 아니에요. 아빠가 모르는 것도 많아요. 정령에 대해서만 말해주는 거예요. 아! 정령 중에는 말하는 애들이 있어요.”
“너한테 말을 걸어?”
“네. 정말 너무 시끄러워요. 알아듣게 말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하나도 못 알아먹을 정도로 이상한 말만 해요.”
“지금도 너한테 말을 걸고 있고?”
도리질을 쳤다. 떠버리 정령들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널 괴롭히거나 그러진 않고?”
“못된 말 하는 정령도 있었어요. 근데 이젠 괜찮아요.”
거대한 매에게 찢겨 사라진 정령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끔찍한 순간이라 아빠한테 말하기 꺼려졌다. 말하면 걱정할 테니까.
미소를 짓고 아빠를 바라봤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구나.”
“……네.”
“나중에 말하고 싶어지면 그때 말해. 아빤 기다릴 수 있으니까.”
마지막 남은 고기가 입으로 들어왔다. 우물우물 씹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지렁이를 닮은 정령이 머리 위로 지나간다. 가하란은 정령을 잠깐 바라보다가 빈 그릇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