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이 정도면 나름대로 설명이 됐을 거야. 본토, 신흥, 시민. 당파 싸움에 날 끌어들일 생각은 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 눈을 보고 똑바로 말하고. 만약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밀레나는 비스킷 한 조각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맛있는 음식을 가져와. 그러면 일단 말은 들어줄 테니까.”
“훈련 때 보면 가리는 거 없이 먹던데.”
브리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살려면 뭐든 먹어야지. 너희들이 말하는 비싼 입맛은 아니지만, 어설프게 만든 걸 좋아하지는 않아.”
“기회가 되면 찾아가야겠어. 물론 괜찮은 음식을 들고.”
“내가 항상 반길 거란 기대는 하지 말고. 알다시피 난 휴식을 중요시하거든. 노크해도 대답이 없으면 이렇게 생각해.”
밀레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내 침묵은 대개 그런 의미야.”
“기억해 둘게.”
브리테가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악수했다. 동기들의 눈빛이 한결 순해졌다.
“그렇다고 너무 친한 척하지는 말아줘. 본토 애들한테 시달리긴 싫으니까.”
“게네들이 널 쥐고 흔들 수나 있고?”
“귀찮은 건 귀찮은 거야. 말이 나온 김에 사이좋게 지내. 스콜라를 졸업하고 나면 그땐 시의에 따라 서로 피를 보게 될 거잖아? 앞으로 지겹게 다툴 날만 남았는데, 적어도 여기선 사이좋은 척이라도 해줘.”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신선하네.”
“나라고 양옆에서 으르렁대는 걸 좋아하겠어?”
밀레나는 크박이 든 술병을 손으로 낚아챘다.
“이건 가져간다. 귀족 모욕죄는 이걸로 용서해줄게.”
록씬이 하하 웃으면서 입에 맞으면 더 가져가라고 말했다.
“한 병이면 충분해. 갈게. 그리고 적당히 마셔.”
“귀족 영애의 충고를 한 귀로 흘릴 순 없지. 우리도 이것만 마시고 일어설 거야.”
“시민답게 잘 알아듣네.”
유쾌한 웃음이 나왔다. 역시 계급은 단순한 구분일 뿐이다. 귀족이라 해서 말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니고, 시민이라 해도 답답한 것도 아니다.
“근데 아까 뭘 태운 거야?”
브리테가 질문했다. 밀레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가며 대답했다.
“러브레터.”
“굉장히 끔찍한 물건이군.”
“누가 아니래.”
크박이 든 술병을 휘휘 흔들며 라운지를 벗어났다.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밟았다. 걸음을 멈춘 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미엔 때문이었다.
층계참에 서 있는 미엔을 흘깃 본 다음 옆을 지나칠 때였다.
“난 너를 존중해.”
“고마워. 존중해줘서.”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혼란을 주는 건 곤란해.”
“혼란?”
미엔이 계단 난간에 기댔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린다.
“아잔탄스가 사라지고 나서 본토 귀족의 입지가 약해지고 있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 얘기를 지금 여기서 하겠다는 거야?”
“못 할 게 뭐 있어. 밀레나, 난 네가 우리 그룹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 그룹? 본토 애들끼리 잘 뭉치고 있잖아. 거기에 나까지 끼울 필요가 있어?”
“있지. 엔첸세란 이름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밀레나는 머리를 살짝 긁었다. 이미 수없이 말해서 이젠 신물이 나는 얘기를 또 반복하려 한다.
“우리 가문명이 엔첸세인 거 맞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이름인 것도 맞고. 하지만 난 엔첸세 보단 밀레나가 날 더 대표한다고 봐. 전에도 말했을 텐데?”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널 볼 때 밀레나보단 ‘밀레나 엔첸세’라고 봐.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렇겠지. 근데 그게 중요해? 타인의 생각까지 내가 어떻게 할 마음 없어. 보고 싶은 대로 보라고 해. 대신 나한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강요하면 곤란해. 나는 밀레나니까. 엔첸세는 뒤에 따라붙은 이름일 뿐이야.”
미엔의 입술이 굳게 맞물리며 닫혔다.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애라 그런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괜히 미안해진다.
밀레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브리테하고 별말 안 했어. 그냥 동기들끼리 시시콜콜한 잡담 했을 뿐이야.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다른 때였다면 괜찮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교관님의 눈이 있을 때는 그래도 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되도록 접촉을 피해줘.”
“왜 그렇게 안달이 났어. 내가 아는 미엔은 이 정도로 조바심 내는 사람이 아닌데.”
미엔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신흥 귀족과 시민. 양측의 결속이 날이 가면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어. 행정2국 알렝 님께서 다리를 놓아준 걸지도 몰라.”
국장 알렝 바르베. 성도의 행정국을 움켜쥐고 있는 실세였다. 시민들 편에 선 귀족으로도 유명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 그분은 원래 시민을 위해 힘써왔어.”
“본토 귀족이었던 아잔탄스가 멀쩡했다면 괜찮았겠지.”
미엔이 눈을 살며시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신흥이 본토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어. 가장 먼저 티안 가가 축출될 거야.”
“거긴 어쩔 수 없지. 게스할트 님께서 돌아가셨으니까.”
군부의 기둥 중 하나이자, 티안 가의 당주였던 게스할트가 죽은 것도 꽤 지난 일이 됐다.
티안 가의 세력이 약화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같은 1등 귀족이라고 하나 엔첸세는 권력 다툼에서 항상 한 발 떨어져 있었으니까.
“티안 가의 재건은 물 건너갔어. 게스할트 님 대신 가주가 된 귀부인은 능력이 없고, 그 딸인 아리엘 역시 바깥으로 나돌고 있어. 가문이 휘청거리는 때에 여행이라니, 미친 거지.”
“남의 가문까지 신경 쓰고, 넌 참 대단해.”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쪽 애들 다 그래. 아잔탄스에 이어 티안. 본토가 쇠약한 만큼 신흥이 치고 들어올 거야. 자리가 위태로워진다고.”
“스콜라 내에 정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건 규칙 위반이 아니지만, 정도가 심하면 교관들이 눈치를 줄 거야. 그건 알고 있지?”
미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도로서 본분에 충실하고 싶지만, 우린 스콜라 생도 이전에 본토 귀족의 핏줄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매번 말하는 거지만 엔첸세는 이런 일에서 항상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니까.”
“그럼에도 엔첸세가 본토의 주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어. 너희 어머니께서 이룩한 명성이 본토 귀족의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엄마는, 아니, 어머니께선 군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뒤따라온 명성 따윈 신경 쓰지도 않으셨고.”
“정치에선 그 모든 게 이유가 되고, 그 모든 게 명분이 돼.”
계단 아래쪽이 시끄러워졌다. 시민 측 동기들이 웃고 떠들며 계단을 오르다가 미엔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러브레터의 주인공이 설마 이 친구였어?”
브리테는 선이 굵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여기 층계참은 지금부터 귀족 소유가 됐으니까, 시민 여러분은 얼른 올라가 주세요. 자, 어서.”
밀레나는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명령에 따르죠.”
브리테가 눈인사하며 계단을 올랐다. 다른 동기들도 씩 웃으면서 지나치다가 미엔을 볼 때는 눈을 흘겼다.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시민한테 빈틈을 보이면 바로 이용당해.”
발소리가 멎자마자 미엔이 말했다.
“미엔, 잘 들어. 너 지금 너무 예민해. 동기끼리 그냥 인사했을 뿐이야. 너도 그냥 받아주면 되고.”
“그게 아니라니까!”
목소리가 높아졌다. 밀레나는 고개를 살며시 들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사람은 없다.
“흥분하지 마. 너 그런 캐릭터 아니야.”
“밀레나, 정신 차려. 지금부터 결속을 다지지 않으면 본토는 정말 끝장나. 윗세대가 이룩해놓은 걸 잃지 않으려면 우리가 노력해야 해.”
“노력이란 단어를 그렇게 쓰는 거 나 안 좋아해.”
“밀레나.”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부름이었다. 이쯤 되면 물어봐야 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평소의 너라면 여기서 대화 주제를 바꿨어야 해. 근데 오늘은 지나칠 정도로 물고 늘어지고 있어. 내가 이런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미엔이 계단 위쪽을 바라봤다. 복도를 훑는 눈길이 조심스럽다.
“오늘 본가에서 소식이 왔어. 성도 거병관리국 제1개발실 실장과 3연구소 소장 자리에 인사발령이 났어.”
두 자리 모두 의회와 본토 귀족의 입김이 닿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거기에 새로운 인물이 배정됐다는 건….
“3연구소는 황제 쪽, 1개발실은 신흥 귀족 쪽 사람이야.”
“의회가 한발 물러선 거구나.”
“튤립 전쟁에서 패한 대가지. 의회가 움켜쥐고 있던 관리국조차 신흥 귀족한테 자리를 내줬어.”
정치에 무관심한 밀레나도 작금 벌어진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가속화될 거야. 한번 빼앗긴 주도권은 되찾아오기 힘드니까. 1등 귀족 회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어.”
“상황이 안 좋다는 거 알겠어.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어. 어머니가 그래 왔듯 나 역시 기존 엔첸세의 방침을 지킬 거야.”
미엔이 한 걸음 다가왔다.
“시대가 바뀌고 있어.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난 뒤 의회의 힘은, 본토 귀족의 힘은 줄어들기만 했어. 황가가 이토록 득세한 건 몇십 년 만에 처음이야.”
“지난 몇십 년간 의회가 권세를 잡고 있었으니, 이젠 황가 차례가 된 거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해. 그게 편할 테고.”
“넌 어려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를 뿐이야.”
“선은 넘지 말자. 동기 사이에 나이는 없다는 거 잊지 말고.”
미엔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밀레나는 목석처럼 굳은 미엔 품에 술병을 안겨주었다.
“방으로 돌아가서 이거나 마셔. 네가 차기 가주이며, 지금도 여러 일을 맡고 있다는 거 알아. 어른들이 너한테 거는 기대감도 있겠고, 어쩌면 스콜라 생도들을 휘어잡으라고 명령 받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런 뉘앙스가 있었다는 건 부정 안 하네.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해. 시민을 꺼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해 줄게. 하지만 이해 이상의 무언가를 나한테 기대한다면….”
밀레나는 눈에 힘을 주고 털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그땐 스콜라 동기가 아니라 미엔 샨 솔리안으로 대해줄 거야. 알지? 엔첸세는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거.”
밀레나는 후, 하고 숨을 짧게 내쉬었다.
“동기한테 고민을 털어놓는 거라면 종종 들어줄게. 내가 한가할 때 찾아와.”
“넌 항상 바쁘잖아. 가만히 있어도 바쁘다고 하는 애가 너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밀레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가 다시 뒤돌아섰다. 그리고 미엔에게 줬던 술병을 홱 낚아챘다.
“생각해 보니까 이건 그냥 내가 마실래.”
“줬다 뺏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나이 많은 네가 이해해. 내가 어려서 뭘 모르거든.”
“나이 얘기는 미안해. 감정적이었어.”
“알면 됐어.”
2층으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미엔이 말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해.”
“너도 참 끈질기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물려받은 걸 지켜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야.”
밀레나는 미엔을 곁눈으로 바라본 후 걸음을 뗐다. 물과 기름을 섞는 게 차라리 쉽겠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