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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52화 (25/558)

제52화

구태여 편지까지 보낸 꼼꼼함에 혀를 내두르다가, 과연 첼이라는 생각에 납득했다.

“그나저나 이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밀레나는 편지의 마지막 문단을 소리 내어 읽었다.

“가하란과 좋은 친구가 돼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당께 안부 인사를 부탁합니다. 오랜 벗이지만 통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이런 사적인 편지에 가하란 이름이 쑥 튀어나온 것도 희한했다. 관계가 더욱 의심스러워진다.

편지 중간에 ‘곧 알게 될 테니’란 대목도 있었다. 알게 된다는 건 귀족 사회에 소문이 돌 정도로 중요도가 있다는 뜻. 가하란과 올란트의 출신 성분이 한층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자당께 안부를 전해달란 말 역시 의외였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구나.

벗이란 단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다.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서야 상대방의 지위와 관계를 생각해 삼가는 단어인데.

정치계 거물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지킬 수는 없다.

밀레나 역시 어머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현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방랑의 대가에게 인사를 전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부탁이었다.

밀레나는 편지를 잘게 찢었다. 외투를 걸친 다음 1층 라운지로 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동기들 몇 명이 한데 모여 술을 즐기고 있었다. 시민 쪽 애들이었다.

시선이 날아들었다. 알은척만 하고 벽난로로 걸어갔다. 포도 넝쿨이 조각된 벽난로에 찢은 편지를 던졌다.

편지가 금세 재가 됐다. 머릿속 기억도 저 편지처럼 말끔히 잊기로 했다. 평소처럼 행동할 것이다. 가하란을 찾아가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거고.

“한잔하지? 아! 어려서 좀 그런가?”

동기 중 하나가 말했다. 뭉툭한 코를 가진 록씬이었다.

“나이 먹어서 좋겠어.”

한마디 하고 옆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귀족 영애한테 너무 무례했네. 게다가 이런 싸구려 술은 취향에 안 맞을 테고. 괜한 말 해서 미안해. 혹시 마음 상한 건 아니지? 혹시라도 날 법정에 세울 생각이라면….”

밀레나는 걸음을 멈췄다. 주절대던 록씬도 입을 다물었다. 입술이 절로 비틀렸다. 록씬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록씬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파리를 좇는 것처럼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인다.

밀레나는 록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술기운에 투덜대는 건 너무 유치하지 않아?”

“내가 또 뭘 투덜댔다고.”

“네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괜히 나한테 시비 걸지 마. 아니면 뭐 이걸 빌미로 파벌끼리 힘 싸움 해보게? 미안한데,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어. 본토 귀족, 신흥 귀족, 시민. 셋이 뭔 짓거리를 하든 나한테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괜찮아.”

눈을 씰룩거리던 록씬이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네 말대로 괜한 시비를 걸었네.”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록씬이었다. 신분이 다르다고는 하나 결국 다 같은 스콜라 생도였다. 성격이 개차반인 동기가 있을지언정, 머저리는 단 한 명도 없다.

밀레나는 풀어놓은 머리카락을 한데 묶었다. 평소였다면 이대로 방으로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줘봐.”

“마시게? 너 술 안 좋아하잖아.”

“권할 때는 언제고. 맛만 볼 거야.”

록씬이 으쓱거리며 작은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코에 대고 향을 맡았다. 과실주 특유의 단내는 전혀 없고 코를 탁 쏘는 매캐한 냄새만 났다.

“이게 뭐야?”

“뭐긴. 술이지.”

“냄새가 이상한데. 잘못 만든 거 아니야?”

“싸구려 양조주라 그래. 그래도 맛은 나쁘지 않아.”

의심의 눈초리를 한번 보낸 후 마셨다. 강한 탄산과 향으로는 찾지 못했던 은은한 단맛, 그리고 시큼한 끝맛.

“술 맞아?”

“도수가 낮아. 취하려고 마시는 게 아니니까. 시원하게 목 축이는 정도?”

“찾아서 마실 정도는 아니지만, 네 말대로 나쁘지도 않네.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좋고. 술 이름이 뭐야?”

“크박. 상류층에서는 접하기 힘든 귀한 술이지.”

“좋겠어. 하류층이라.”

눈웃음 짓는 록씬을 바라볼 때였다. 뒤쪽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시민 파벌의 리더인 브리테가 술병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허전하다 싶었어.”

브리테를 보며 말했다.

“어쩐 일로 네가 여기에 껴 있어?”

“얘한테 물어봐.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브리테가 록씬에게 눈짓을 줬다. 록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술만 마시면 그러는 버릇, 고치는 게 좋을 거다. 애초에 크박 마시고 취하는 게 정상은 아니지만.”

한 소리 한 브리테가 밀레나를 응시했다. 밀레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눈치 안 줘도 돼.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서기 직전이었다. 브리테가 술병을 탁자에 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왕 온 김에 얘기나 좀 하자. 너랑 이런 식으로 마주해본 기회가 없었으니까.”

브리테가 술병을 앞으로 밀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고 귀찮으면 가도 돼.”

밀레나는 앞에 놓인 술병을 훑은 다음 브리테 쪽으로 다시 밀었다.

“이거 말고 아까 마셨던 거 줘. 크박이었나?”

“싸구려라 입에 안 맞을 텐데.”

“그런 편견은 대체 누구한테 교육받는 거야? 시민들을 단체로 모아놓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거야? 싸구려든 뭐든 맛있으면 돼. 귀족이라고 입 안 구조가 다른 건 아니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브리테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말대로 편견이긴 하네.”

브리테가 큼지막한 잔에 술을 부었다. 잔 안에 엉성하게 깎은 얼음이 들어 있었다.

“크박은 원래 작은 잔이 아니라 이런 무식하게 큰 잔에 따라 먹어야 하는 거야. 애들도 마실 만큼 도수가 낮으니까. 아, 너도 애구나.”

“동기들끼리 나이 언급은 하지 않는다. 교관님 가르침이 부족했나 봐.”

열 살이면 다 큰 거 아닌가? 밀레나는 한마디 덧붙이려다가 그만뒀다. 그 말을 하면 진짜 애 같아 보일 테니까.

“우리하고 어울리는 거 불편하지 않아?”

록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밀레나는 대답을 잠시 보류하고 일단 잔을 들었다.

찬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늦더위를 날려 보내는 시원함이다. 한 번에 쭉 들이켜라는 조언대로 단숨에 술을 마셨다.

“좋네.”

머리가 잠깐 찡했지만 그마저도 매력으로 다가왔다. 무식하게 큰 잔에 시원한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것도 가끔 해볼 만했다.

주도를 지켜야 하는 식탁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잔을 든 채로 록씬을 봤다.

“불편하냐고 물었지? 내가 역으로 질문할게. 내가 너희를 불편해해야 할 이유가 있어?”

“그야 넌 본토 귀족이니까. 그쪽 놈들하고 자주 어울려 다녔고.”

“그야 날 자주 찾는 게 게네들이니까. 툭하면 불러내는 것도 미엔이고. 잘 생각해봐. 너희가 날 초대한 적이 있어? 아마 없을걸. 단 한 번도.”

시민 쪽 동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동시에 브리테를 바라봤다.

“이 또한 편견이지. 안 그래?”

대답 없는 동기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왜 진작 너한테 말을 안 걸었을까.”

“이유야 많겠지. 일단 어려서 수준에 안 맞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을 테고. 어린데 성적이 좋아서 배가 아팠을 거고. 무엇보다 내가 밀레나 ‘엔첸세’였기 때문에 말 걸기 어려웠겠지.”

가문명인 엔첸세를 힘주어 말했다. 브리테가 술병을 흔들며 대답했다.

“일단 어리다고 무시한 적은 없어. 성적이 좋아서 좀 짜증 났던 적은 있지. 마지막으로 엔첸세라 거리감을 느꼈던 건… 부정하기 힘드네.”

“솔직한 대답 고마워. 나도 편견 아닌 편견을 듬뿍 담아 말해본다면, 이런 대회는 귀족보다 시민들하고 하는 게 편해. 귀족은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중요시하니까. 시민들은 직설적이고.”

“대단한 편견이군.”

안주라며 내온 햄을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짠맛이 강한 햄은 향이 옅은 크박과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았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넌 시민을 어떻게 생각해?”

브리테가 말하자마자 다른 동기들이 침묵했다. 잡담을 나누던 동기들이 하나같이 밀레나의 입만 쳐다봤다.

“봐봐, 직설적이잖아.”

밀레나는 눈을 씰룩였다.

“성향을 알고 대화하는 게 편하니까. 그래야 우리도 거리감을 조절할 수 있고.”

“참 어렵게들 산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그보다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술이나 마시고 가. 우리도 이런 재미없는 얘기는 안 할 테니까.”

밀레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천장을 보았다. 다른 때였으면 여기서 물러났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주던 가하란이 왜 생각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민은 우리가 계도해야 할 대상이며, 지켜줘야 할 노동계급이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동기들 눈동자가 냉랭해지는 걸 보았다. 밀레나는 동기들의 얼굴을 쓱 훑은 후 말했다.

“난 이렇게 교육을 받았어. 이런 사상이 본토 귀족 전반에 흐르고 있다는 걸 부정할 생각도 없고.”

“솔직하게 답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집을 찾아온 카운티에들에게 그렇게 배웠어. 예절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런 개념을 알게 됐지. 한때는 그게 당연한 사실이라고 여겼어.”

“한때라는 건….”

말끝을 흐리며 다음 대답을 요구하는 브리테였다. 밀레나는 얼음만 남은 잔을 보며 대꾸했다.

“카운티에의 가르침과 달리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 네가 옳다고 판단한 것이 옳은 거다. 남의 충고를 듣고 살기에는 세상은 너무 넓고, 삶은 너무 짧다.”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댔다.

“어찌 보면 무책임한 말이지만 난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이 좋았어. 그리고 스콜라에 들어와 그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고.”

록씬에게 시선을 던졌다.

“너희들이, 시민이 불편하냐고? 난 아무 생각이 없어.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지는 건 너무 고루해. 따분한 일이야. 하지만 너희가 나한테 흥미로운 걸 보여준다면, 난 너희를 기쁜 마음으로 찾아갈 거야. 계도? 지켜줘야 할 계급?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난 계급보단 개인을 중요시하니까.”

거기까지 말한 다음 잔을 들었다. 바닥에 남은 크박이 얼음물과 섞여 밍밍한 맛이 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귀족과 시민이 평등하게, 행복하게 같이 살자.’ 이런 마음은 아니야. 난 신흥 귀족이 주창하는 거에 동의하지 않아. 굳이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밀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라운지를 떠받드는 기둥 하나에 푸른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황가의 상징, 황제의 징표.

“실력을 가장 우선시한다. 폐하께서 한 말이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들어. 무책임한 평등은 별로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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