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1화 (349/558)

제51화

첼이 의자에 앉는 걸 기다렸다가 말했다.

“유렐 취조부장이 절 찾아왔어요.”

“알고 있다.”

“예상보다 빨리 알려진 거 같아요. 조용히 찾아온 걸 보면 떠벌릴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겠죠.”

“이미 예상했던 바다.”

다 알면서도 여길 찾아왔다는 건 모든 대비가 끝났다는 뜻이리라. 할아버지는 변수를 남겨둔 채 전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범인이 자수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얼마 전에 제 발로 찾아왔지.”

“수사망에 걸릴 것 같아 자수를 택한 건가요?”

“아니. 용의자 리스트에도 없던 인간이었다. 입 다물고 얌전히 있었다면 그 존재조차 몰랐겠지.”

첼은 눈을 갸름하게 뜨며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언짢은 표정이었다.

“반갑지 않은 진범인가 보네요.”

“괴상한 놈이거든. 신문이 의미가 없는 아주 괴이한 놈이야. 신념 덩어리. 그래, 그건 광신도지.”

“광신도요? 이번 사건에 사교도가 얽힌 겁니까?”

“제국법이 지정한 사교는 아니었다. 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분명 종교에 가까웠다.”

“중앙 성당에서 개입할 여지가 생겼네요.”

“이야기가 새어 나간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유일신 베리타스를 믿는 성교회. 성교회의 필두인 중앙 성당은 사교도라면 눈을 뒤집고 달려들 게 뻔했다.

“신념을 가진 자라면 이번 사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말했겠네요.”

“아쉽게도 별다른 단서는 얻지 못했다.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으니까.”

첼이 턱수염을 매만졌다.

“‘톱니바퀴가 마지막 역할을 위해 이곳에 왔다. 나는 나의 본분을 다했으니 이제 기다릴 뿐이다.’ 이게 그놈이 내뱉은 말이다.”

“그 외에 다른 말은요?”

올란트가 질문했다. 첼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숭고한 인간. 어처구니없게도 난 그 인간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의심의 티끌조차 없이 목적만을 이행하는 인간. 이번 사건을 획책한 단체에 그런 인간이 수도 없이 많다면… 제국은 전쟁보다 더한 고초를 겪게 될 거다.”

불굴의 신념으로 무장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올란트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배웠다.

이상에 취한 인간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건 신념을 배신하는 일. 그들에게 죽음이란 목표를 위해 헌신했다는 증거일 뿐이리라.

고통도 죽음도 기꺼이 감내하는 인간을 벼랑으로 몰 방법은 없다.

“이번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겠군요.”

“사령관도 그걸 걱정하고 있지. 외적으론 수사 종결을 알리며 둔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무엇 하나 명쾌한 게 없으니까.”

첼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인간은 결코 군체가 될 수 없으니까. 신념에 세뇌된 인간이 군집을 이뤘다면 돌출되기 마련인데, 아직까진 전조가 없다.”

“그래서 신경 쓰이네요. 역할을 다했기에 자수를 했다니.”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구나. 역할을 다해서 자수한 게 아니다. 자수까지가 계획 안에 있는 거지.”

“그렇군요.”

도시를 덮친 미증유의 사건이 이대로 마무리되길 바랐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둔은 앞으로도 시끄럽겠네요.”

“지금처럼 요란하지는 않을 거다. 보안 단계도 낮췄고 통행도 재개됐으니까. 물밑에서는 지금보다 더 바삐 움직이겠지만 잡음이 나진 않겠지.”

첼이 혀를 한번 찬 후에 말했다.

“무엇보다 그놈들이 도착하고 나면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이 나올 테니까. 둔도 금방 예전 분위기를 찾을 거다.”

“그놈들이라면… 특수감찰단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알고 있구나.”

“루카 형에게 들었어요. 제가 막 군부에 붙잡혔을 때 들은 얘기니, 지금쯤이면 도시 근방에 왔겠네요.”

“황가는 물론 의회에서도 주목하는 사건인 만큼 다른 일 제쳐두고 달려왔을 거다. 곧 그 면상을 보게 되겠지.”

“칼리고 단장은 여전하겠죠?”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서 모르겠다만, 아마 그 지랄맞은 성정이 바뀔 리는 없겠지.”

냉철한 할아버지조차 단장을 언급하는 부분에선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올란트는 소리를 낮춰 웃었다.

“제가 저택에 있을 때 두어 번 만나본 게 전부지만, 그것만으로도 단장님은 제 뇌리에 각인됐어요. 세상에 그렇게 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또 할아버지가 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거든요.”

“그 인간하고 수다 떨 수 있는 건 아마 자애로운 신뿐일 거다. 정말 저주받은 주둥이야. 듣고 있으면 머리가 절로 지끈거리니까.”

“그래도 재미는 있던데요?”

“넌 잠깐 봐서 그런 거다. 칼리고, 그놈하고 종일 붙어 있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오죽하면 그 입을 꿰맬 수 있다면 모든 걸 내놓겠다고 말한 귀족이 있을 정도니까.”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떠는 첼이었다.

조용했던 창밖이 시끄러워졌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올해도 비가 많이 오네요.”

“8월 마지막 주에는 항상 비가 왔지.”

“그랬나요? 전 몰랐어요.”

8월 마지막 주. 며칠 후면 9월에 들어선다. 군부에 붙잡혀 있다 나오니까 여름이 떠나가고 있었다.

“둔에 언제까지 머무르실 예정이세요?”

“원래대로라면 9월 초순에 다시 성도로 돌아가야 하지만, 여건이 이렇다 보니 늦으면 10월 초순까지 있을 것 같다.”

“가하란하고 많이 놀아주실 수 있겠네요.”

“시간이 나면 그렇게 하마.”

첼이 모자를 눌러썼다.

“가시게요?”

“가야지. 봐야 할 서류도 남았고.”

“하루 정도는 주무시고 가시죠. 제 방 침대 쓰시면 돼요.”

“그러면 넌 어디서 자게?”

“저야 바닥에 이불 깔고 자면 되죠.”

“이제 막 풀려난 손자 놈을 또 바닥에서 재울 순 없지. 젊다고 해서 몸을 막 굴리면 노년에 고생한다. 가하란 신경 쓰는 것도 좋지만, 네 몸부터 돌봐라.”

지팡이를 챙긴 첼이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동시에 집 밖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맞춰 왔군.”

첼이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올란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이쯤이면 대화가 마무리될 거라 예측하고 미리 마차를 불러둔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올란트가 문을 열었다. 단정한 차림의 수행원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해왔다. 저번에 한번 봐서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브라고 했었지.

“선생님. 모시러 왔습니다.”

현관문을 나선 첼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올란트.”

첼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즐거웠다.”

올란트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언제든 오세요. 맛있는 커피를 내려 드릴게요.”

“커피는 내가 따로 준비할 테니 그러진 마라.”

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마차에 올라타는 첼이었다. 우산을 받치고 있던 하브가 마부석으로 향했다.

올란트는 떠나는 마차를 지켜보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요?”

몽롱한 눈을 한 가하란이 거실에 있었다. 올란트는 아들을 번쩍 안아 들었다.

“댁으로 가셨어.”

“듣고 싶은 얘기가 아직 많은데.”

“다음에 또 오실 거야. 그보다 어땠어? 할아버지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하진 않았어?”

“하나도 안 불편해요.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도 절 챙겨 주셨어요. 좋으신 분이에요.”

“그래, 좋으신 분이지.”

가하란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빠. 이제 어디 안 가는 거죠?”

“물론이지. 이제 집에 계속 있을 거야.”

“집에 계속 있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제철소에서 짤린 거예요?”

잘렸다는 직설적인 단어에 올란트는 웃고 말았다.

“아니야. 며칠 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다행이다.”

“근데 아빠랑 계속 같이 있는 거 싫어? 아빠가 일 나갔으면 좋겠어?”

“아니요. 계속 있고 싶어요. 근데 아빠는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맞죠?”

살짝 감긴 눈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올란트는 아들의 뒤통수를 연신 쓰다듬었다.

“맞아. 아빠는 일이 좋아. 하지만 일보다 너를 더 좋아해.”

“저도 아빠가 좋아요.”

몸이 흐느적거린다 싶더니, 금방 또 잠에 빠지는 가하란이었다. 올란트는 가하란을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앉았다.

숨을 천천히 내쉬는 아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 * *

잠이 안 온다.

밀레나는 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평소에는 자장가처럼 듣기 좋았던 빗소리가 오늘은 형편없는 관악기 연주처럼 신경을 긁었다.

등을 켜고 의자에 앉았다.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세나티아 가 총집사라니. 뭐지? 왜 거기에? 대체 왜?”

창문을 열고 외치고 싶었다. 누가 좀 이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하지만 이번 일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그 늦은 시간에 수행원도 대동하지 않고 첼이 혼자서 찾아갔다는 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입을 가볍게 놀렸다가는 상상하지 못할 불이익을 경험하게 되리라.

“첼 님은 분명 개인적인 일이라고 했어.”

핀들론, 그러니까 로안과도 친분이 있는 첼이 왜 가하란의 집을, 그것도 개인적인 용무로 찾았을까?

“가하란의 아빠. 그 사람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 거겠지.”

올란트는 자신을 몰락한 귀족의 후예라고 말했다. 첼이 찾아갈 정도면 보통 집안이 아니라는 뜻인데.

혹시 이번에 숙청당한 아잔탄스 가의 생존자일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상상력이 점점 거대해져 갔다. 황제가 축출해버린 아잔탄스 가문이 부활을 꿈꾸며 다시 의회와 손을 잡고, 그러다 성도가 불바다로….

똑똑. 상념을 절단하는 노크였다.

밀레나는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새벽이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인간이 있었나?

“누구시죠?”

동기였다면 노크 후에 바로 누구인지 말했을 터였다. 교관이라면 세 번 노크 후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을 테고.

밖에 서 있는 건 스콜라와 관계없는 인물이란 뜻이다. 외지인이 출입할 수 없는 숙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멋대로 드나들 만한 장소도 아니다.

“밀레나 님 맞습니까?”

생소한 목소리였다. 젊은 남자. 숙소 관리자는 아닐 테고. 청소부? 아니지,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올 청소부는 없을 것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간에 대뜸 찾아와서 신원을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네요.”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첼 님께서 전해달라는 물건이 있어서.”

첼이란 말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의자에 걸어둔 가운을 몸에 걸치고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밀레나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첼의 최측근이자 수행원.

“하브입니다. 그리고 이걸.”

간결한 동작으로 종이봉투를 내민다. 밀레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봉투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에요.”

다시 한번 예의를 표한 하브가 몸을 돌렸다. 밀레나도 붙잡지 않았다. 심부름꾼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웃기니까.

방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무 표시도 없는 흰색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힘찬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밀레나 양의 현명함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이 늙은이의 노파심 때문에 편지를 씁니다. 아마 여러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겠죠.

먼저 아잔탄스의 잔존 세력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성도가 어지러워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밀레나는 거기까지 읽고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을 읽혔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다시 편지로 시선을 주었다. 짧은 편지라 순식간에 다 읽었다.

결론은 그거다. 이상한 망상 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잠이나 자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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