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올란트는 화로에 올려둔 주전자를 들었다. 김이 풀풀 올라온다.
“싸구려 커피밖에 없는데 괜찮으시죠?”
“적당히 마실 만하면 괜찮다.”
거름망 없이 대충 내린 커피를 잔에 따랐다. 기름이 둥둥 뜬 커피를 조금 맛봤다. 엉성해도 못 마실 정도는 아니다.
“드세요.”
첼이 잔을 받았다. 눈썹이 살짝 움직였는데, 너저분한 유분이 거슬리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더 형편없구나. 이런 걸 커피라 부른다면 커피에 대한 모독이지.”
“드셔보세요.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첼이 마시는 걸 지켜본 다음 올란트도 한 모금 넘겼다.
“엉망으로 볶은 원두의 저급한 쓴맛. 산미마저 느껴지지 않는 대단한 커피군.”
“신 거 싫어하시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올란트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할아버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도중에 대화를 말릴 줄 알았다.”
첼이 코끝에 주름을 잡으며 다시 커피를 마셨다.
“전 제 아들을 믿으니까요. 그보다 입에 안 맞으시면 이리 주세요. 괜히 드셨다가 탈 나면 저만 곤란해져요.”
“맛대가리 없는 커피지만, 그래도 네가 만들어 준 거니 다 마실 거다.”
인상을 쓰면서도 기어이 커피를 마시는 첼을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죠? 제가 덜 익은 과일을 따서 할아버지께 드렸던 거 같은데.”
“한두 번이 아니었지.”
“못 먹는 거라고 혼내셨으면 안 그랬을 텐데, 왜 다 받아 주셨어요.”
“그거라도 받아줘야 네가 숨통을 돌릴 수 있을 테니까.”
“그때 눈치채고 더 일찍 도망쳤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그런 것치고는 수업을 잘 받았지. 찾아온 선생들이 하나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의원님의 눈치를 본 거죠. 전 평범했어요.”
“항상 그런 식으로 정당화하고 도망쳤지.”
“그 덕에 여기 이렇게 제 보금자리를 찾았잖아요. 이것도 다 할아버지께 배운 겁니다. 아시죠?”
“네 말이 맞다. 다 내가 가르친 거지.”
첼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가하란 깨겠어요.”
올란트는 아들이 잠들어 있는 방을 바라봤다.
“참 착하죠? 불안하고 무섭고 궁금한 것도 많았을 텐데, 그런 거 다 참아내고 할아버지의 말동무를 해줬잖아요.”
“심성이 필요 이상으로 곱지.”
“애가 착해서 불만인 건 할아버지밖에 없을 겁니다.”
“불만이라고까진 말 안 했다.”
첼이 잔을 내려놓았다. 반쯤 남아 있던 커피가 자취를 감췄다.
“빈 슈의 교섭술이었죠?”
“기억하고 있구나.”
“근데 조금 바뀐 거 같네요. 첫 화두는 날씨 아니었나요? 맛 같은 기호를 묻는 건 다음 단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네가 울타리를 뛰쳐나온 지 10여 년이 지났다. 세상이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은 변하지 않는다고 어떤 분이 말씀하셨는데요.”
“그 인간이 틀린 모양이구나.”
빈 슈의 교섭술. 정치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가장 기초가 되었던 대화법이다. 친밀감을 형성하는 게 주요 골자였는데, 그 첫 번째가 답하기 쉬운 질문 하기였다.
기억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를 떠올리니 나머지 것들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올란트는 조금 전 첼과 가하란이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분위기를 떠올렸다.
첼은 가하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증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정말로 따스했고, 그리움과 애틋한 심정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감정일 뿐, 할아버지의 이성은 뭉클한 마음과 별개로 제대로 작동했을 것이다.
원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서,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전쟁은 무자비하지. 사고 실험에서 그쳐야 할 것들조차 전쟁이란 특수한 환경이 조성되면 막힘없이 진행되니까. ‘케아’를 비롯한 여러 싱크탱크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여러 가지 테스트가….”
“할아버지. 전 이 집에서 그런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올란트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여긴 네가 세운 너의 성이니까. 외지인은 성주의 말에 따라야겠지.”
“섭섭하신 건 아니죠?”
“섭섭하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돌아올 테냐?”
“그럴 리가요.”
첼이 눈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할아버지, 하면서 쫄랑쫄랑 따라다닐 때가 귀여웠지.”
“나이 먹어서도 그러면 징그러워요. 그보다 어떠셨어요? 가하란이 마음에 드시나요?”
본론으로 넘어갈 때였다. 올란트는 첼의 눈을 바라보았다.
“평가하기엔 대화가 짧았다.”
“악수 한 번이면 사람을 평가하는 데 충분한 정보가 모인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해준 말이죠. 게다가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고요.”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군.”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리는 첼이었다.
“너도 옆에서 다 들었으니 알 것 아니냐. 내가 뭘 원하고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대강 느낌은 옵니다.”
“그러면 말해봐라. 오랜만에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예전처럼 수업받는 기분이라 썩 달갑진 않네요.”
“추억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답해봐라. 시간은 많으니까.”
시간은 많다. 할아버지가 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누구보다 시간이란 재화를 중요시하는 게 할아버지니까. 올란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귀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확히는 혐오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대화를 이끌어 가셨죠.”
“정답이다.”
“시민과 귀족의 차이점을 생각하고 답하는 것. 이로써 보다 명확하게 인지한 상태로 이후 질문에 대응하게 되죠. 할아버지가 원하신 대로, 가하란은 대답을 하나씩 하나씩 해가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활짝 드러냈고요.”
“생각은 무한히 엮인 고리니까. 대답하는 순간 포지션이 결정되고, 포지션에 따라 성향이 확립되지. 말은 성향을 대변하기 마련이고. 잘 이해하고 있구나.”
“이해했다기보다 꾸역꾸역 외운 거죠.”
첼이 벽난로를 응시했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불티가 피어올랐다.
“가하란, 그 아이는 귀족을 적대시하지 않더군.”
“말씀드렸잖아요. 제 아들놈은 사랑을 안다고.”
“네가 가르친 거냐? 귀족을 이유 없이 혐오하지 말라고.”
“아니요. 전 그런 걸 가하란한테 주입한 적이 없어요. 제가 한 거라고는 그 애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보여줬을 뿐이에요.”
“그래 봤자 둔을 벗어나진 못했을 텐데. 모든 걸 보여줬다면 부조리한 것들도 봤을 것이다.”
“봤죠.”
올란트는 과거 어느 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가하란을 데리고 시장에 갔는데, 예의를 모르는 귀족 하나가 시장 상인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죠. 옆에서 들어보니 귀족이 괜한 트집을 잡는 거였어요. 결국 상인이 사과하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됐죠.”
“흔한 일은 아니군. 애초에 거주 구역이 달라서 시민들이 이용하는 시장은 가지 않으니까.”
“예, 흔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욕을 했어요. 역시 귀족들은 안 된다고. 저놈들은 우리를 이해 못 한다고. 다른 곳에서도 분명 저럴 거라고.”
“그렇겠지. 병신 같은 놈 하나가 귀족 이미지를 또 깎아 먹었군. 가하란, 그 아이한테도 안 좋은 인상이 심어졌겠어.”
올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어봤죠. 네가 보기에 아까 그 귀족은 어떤 사람 같냐고. 고민할 것도 없이 방금 한 짓은 잘못된 거라고 말했어요.”
“그렇군.”
“전 다시 물었죠. 어떤 사람 같냐고. 그 애는 웃으면서 말했어요. 그건 알 수 없다고.”
“사건 하나가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애들 시선에선 아닐 텐데. 영특하군.”
올란트는 언제나 맑게 빛나는 아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할 줄 아는 아이예요. 그래서인지 탐험과 모험 같은 건 좋아하는데, 영웅놀이는 좋아하지 않아요.”
“영웅놀이?”
“못된 귀족을 정의의 영웅이 혼내주는 거죠.”
“귀족은 언제나 악역이군.”
“가하란도 거기에 의문을 품는 것 같았어요. 왜 못된 귀족만 있는 걸까, 하고.”
“올바른 가치관이자 피곤한 가치관이야. 사람은 결국 편협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까.”
올란트는 미소를 지었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정의와 자신의 정의가 언젠가는 상충하겠죠. 하지만 그때가 온다 한들 가하란은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너무 단단하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모르죠. 저나 할아버지와 달리 산처럼 두꺼워서 부러진다는 개념조차 모를지도.”
“저번에도 말했지만 팔불출이 따로 없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식은 커피를 마셨다. 첼이 한 잔 더 달라며 잔을 내밀었다.
“따뜻한 물 드릴게요.”
“아니. 네가 타준 커피면 된다.”
“맛없다면서 계속 드시는 것도 고집이에요.”
“떪은 열매보단 먹을 만하니 괜찮아.”
물을 끓이며 첼을 바라봤다. 의자에서 일어난 할아버지는 가하란이 잠든 방 앞에 섰다.
“열어도 되겠냐?”
“지금은 괜찮을 거예요. 잠귀가 밝은 편은 아니라서.”
첼과 같이 방 안을 들여다봤다. 새근새근, 귀여운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첼이 침대로 다가갔다.
“좀 더 괜찮은 침대로 보낼 걸 그랬어.”
“이 정도면 충분해요. 더 비싼 거였으면 이 집에 들이지도 못해요.”
“사내놈은 금방 큰다. 잠깐 한눈팔다가 확인하면 어느새 내 허리만큼 커 있고, 또 잠깐 안 보다가 살피면 날 내려다보고 있지.”
그렇게 말하면서 올란트를 슬쩍 바라보는 첼이었다. 어릴 땐 항상 올려다봤던 할아버지인데, 지금은 눈높이 아래에 있다.
“그러니 한눈팔지 말고 잘 지켜봐라. 안 그러면 훌쩍 커서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가하란이 그걸 바란다면 도망치게 내버려 둬야죠.”
“말이 쉽지. 그때가 오면 아마 이가 갈릴 거다.”
“이가 갈리셨어요?”
“피눈물도 났지.”
올란트는 툭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 녀석, 꿈에서 뭔 짓을 하나 보다.”
얌전히 누워 있던 가하란이 꼼지락거리며 웅얼댔다. 뭐라고 말하는 건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첼이 가하란의 머리를 살며시 보듬었다. 뒤척이던 가하란이 다시 얌전히 숨을 골랐다.
“가하란한테 언제 얘기하실 건가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진귀한 음식을 먹으며 살 수도 있다고.”
“사기를 칠 수는 없으니 힘든 공부도 병행해야 한다고 알려 줘야겠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가하란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증오심이 없으면 교육할 수 있다. 머리 쓰는 거야 내 핏줄이면 응당 잘할 테니 걱정 없고.”
첼이 가하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둔에 있는 동안 좀 더 지켜보다가 말을 꺼낼 거다. 세나티아 가는 언제나 인재를 필요로 하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의원님을 보필하는 건 거병만큼 흥미롭지 않으니까요.”
“그거야 네 생각이고. 이 아이는 또 모르지. 정치계의 거물이 꿈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설마요.”
목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이다. 가하란이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올란트는 첼에게 눈짓을 한 뒤 방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