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다독여주던 손길이 멀어졌다. 가하란은 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 할아버지가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참 많단다.”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건 다 말해 드릴게요.”
“그럼 일단 이것부터 물어보마. 신 음식을 잘 먹니?”
“신 거요?”
듣자마자 입에 침이 고인다.
“좋아하진 않아요. 할아버지는요?”
“나도 싫어한단다.”
“아빠는 신 거 엄청 좋아해요. 그래서 가끔 저한테 몰래 먹이기도 했어요.”
“네 아빠는 그런 장난을 좋아하지.”
첼이 손가락을 들어 올란트를 가리켰다. 주목받은 아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싫어하는 음식은 또 있고?”
“누잎이 들어간 음식은 다 이상한 맛이 나서 안 먹게 돼요. 할아버지도 누잎 싫어하죠?”
“미식가들은 좋다고 먹는다지만 난 질색한단다. 특유의 떫은맛이 영 못마땅해.”
“맞아요! 근데 이것도 아빠는 좋아해요.”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첼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넌 나를 더 닮은 것 같구나.”
“그런 거 같아요.”
듣고 있던 올란트가 한마디 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두 사람 손발이 잘 맞네요. 근데 아들은 아빠 편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할아버지랑 같은 팀 할래요.”
첼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사교성이 좋구나. 내가 어렵지 않니?”
“어려워해야 하나요?”
“가족이라고 해도 아직은 낯선 관계니까. 충분히 거리감을 느낄 수 있지.”
“낯설긴 하지만 멀게 느껴지진 않아요. 절 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되게 따뜻하거든요.”
“내 눈빛이 따뜻하다고?”
“네. 누나는 할아버지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전 그렇게 안 보이거든요.”
입을 다문 뒤에야 아차 싶었다. 밀레나가 곤란해할 말이었다.
“방금 한 말, 못 들은 걸로 해주시면 안 돼요?”
“이미 들어버린 말을 못 들은 걸로 할 수는 없지.”
“그러면 못 들은 척해주세요.”
“증손자의 부탁이라면 어쩔 수 없지.”
“누나한테 뭐라고 안 하실 거죠?”
“내가 그렇게까지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란다.”
부드럽게 휘는 눈에 온정이 가득했다. 밀레나는 왜 할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할까?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든 물어봐라.”
“누나가 왜 할아버지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 걸까요? 전혀 모르겠어요.”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내 이름 때문에 날 두려워하는 걸 거다. 내 이름을 들으면 연상되는 게 있으니까.”
“할아버지 이름이요? 왜요? 첼이 무서운 뜻인가요?”
“아니. 평범한 이름이란다. 성도 거리에서 ‘첼 씨’ 하고 부르면 아마 열 명 이상은 뒤를 돌아보겠지.”
첼이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에 앉은 다음 이어질 얘기를 기다렸다.
“얘야. 신분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니?”
“계급을 나눠서 다른 대우를 하는 거요.”
“어느 정도 알고 있구나. 일단 사회 계급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귀족과 시민이 되겠지?”
“네.”
“둘의 차이점을 알고 있느냐?”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그 어떤 어른도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천천히 대답해도 된다. 네 생각이 궁금할 뿐 정답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가하란은 주먹 쥔 손으로 입술을 툭툭 치다가 이내 귀 뒤쪽을 살짝 긁었다. 내놓을 답이 완성됐다. 엉성하긴 하지만.
“자세한 건 몰라요. 다른 어른들이 해준 말과 제가 보고 들은 것으로 답해볼게요.”
“그러렴.”
“시민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요. 이동의 자유라고 해요. 허락이 있어야지만 살던 땅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모든 시민이 땅주인에게 붙들려 있는 거구나.”
“네. 하지만 자유 시민권을 얻게 되면 이동이 자유로워져요. 행정상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어렵지 않다고 들었어요.”
“자세히 아는구나.”
“궁금해서 아빠한테 물어봤거든요.”
가하란은 뒤편에 서 있는 올란트를 슬쩍 보았다.
“그렇다면 귀족은 이동의 자유가 있겠구나?”
“네.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고 마음대로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게 귀족의 멋진 점 같아요.”
“편하긴 하지. 또 다른 차이점은?”
“내 돈을 내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재산 사유화. 이걸 말하고 싶은 거구나.”
“네. 단어가 생각이 안 났어요.”
가하란은 집 안 곳곳에 배치된 가구를 훑으며 말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을 때는 괜찮은데, 나라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일반 시민의 돈을 나라가 가져간대요. 귀족은 사유재산을 지킬 수 있고요.”
가하란은 도시 중앙에 있는 은행을 떠올렸다.
“그래서 일반 시민은 은행을 잘 안 믿는대요. 일이 생기면 멋대로 가져가 버릴 수 있으니까요.”
“국가가 아주 못됐구나. 시민들의 재산은 강제로 수거하면서 귀족들은 내버려 두다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왜지? 내 돈을, 물건을 빼앗아 가는 건데.”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뺏는다고 들었거든요. 전쟁 같은 거요.”
“전쟁이 큰 위기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민들만 손해 보는 건 틀린 게 아닐까?”
“귀족들 역시 손해를 본대요. 오히려 시민보다 잃는 게 더 많을 수도 있고요.”
“네 말대로라면 귀족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데, 왜 손해를 보게 되지?”
가하란은 발목을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이동의 자유를 위해서, 사유재산을 위해서 귀족은 싸워야 하니까요. 권리는 의무를 동반한다. 아빠가 해준 말이에요.”
첼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영지의 주인들은 자신이 누려온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구나.”
“그런 거죠. 버리기엔 너무 크다고 했어요.”
“버리기엔 크다. 그 말은 어디서 들었지?”
“이건 책에서 읽은 거예요. 책을 파는 후센브 아저씨가 가끔 책을 빌려주시거든요.”
“고마운 이웃이구나.”
첼이 다리를 꼬았다.
“만약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귀족이 세상천지에 널렸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도 지키지 않는다면 땅의 주인이 바뀔 거예요.”
옆 골목 애들과 다툼이 벌어졌을 때 꼬리를 말고 도망치면 놀이터를 잃게 된다. 그게 싫으면 싸워야 한다. 당연한 얘기였다.
“아슬아슬한 규칙과 모호한 이상으로 제국은 겨우겨우 연명하는 거겠구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정말 작은 부분이니까요.”
“지엽적인 건 현장에서 일하는 자들의 몫이지. 정치가는 너처럼 큰 틀을 봐야 한단다.”
“정치가요?”
첼이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반들반들한 가죽 커버를 들추자 수납 공간이 보였다.
“이게 밀레나가 날 두려워하는 이유다.”
첼이 꺼낸 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증명패였다. 금테가 둘린 증명패 안에는 푸른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자 바로 밑에는 사람 손이 그려져 있었는데, 물을 뜨듯이 두 손을 맞대 오목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푸른 사자는 뭘 의미하지?”
“제국이요.”
“정확히는 제국과 황가란다. 그 밑에 있는 손 모양은?”
“이건 처음 봐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 손 모양은 의회의 상징이란다.”
“의회요?”
몇 번 들어본 것 같았다. 어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할 때 불쑥 튀어나오던 단어.
“정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전 그렇게 들었어요.”
“비슷하단다.”
“할아버지는 여기서 일하는 건가요?”
“의회 업무를 보기도 하지만 내 본업은 어떤 가문의 집사란다. 세나티아라는 가문인데 혹시 들어본 적 있니?”
“처음 들어봐요. 알아야 하는 곳인가요?”
“아직은 몰라도 된단다. 차차 알아가도 상관없지.”
첼이 수첩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모시는 분께서 의회 높은 자리에 계신단다. 최고 어른이라 부르지. 아까 말했던 신분제 얘기를 다시 이어가 보자꾸나.”
처음 접하는 정보들이라 무척 신이 났다. 가하란은 집중해서 첼의 입을 바라봤다.
“귀족이 어째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됐는지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얘기하도록 하고, 지금은 귀족 간 등급 차이에 대해 얘기해 보자.”
첼이 손가락을 활짝 폈다.
“귀족 내에서도 계급이 나뉜단다. 1등 귀족부터 5등 귀족까지. 그 밑으로도 세분화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다섯 계급이란다.”
“들은 적이 있어요. 1등 귀족은 정말 높은 사람들이라 왕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다고.”
“네 말대로 1등 귀족은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단다. 때문에 다들 어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어렵고 두렵다. 가하란은 놀라움을 담아 되물었다.
“할아버지는 1등 귀족인 건가요? 그래서 누나가 무서워하는 거고요?”
“아쉽게도 난 귀족이 아니란다. 자유 시민일 뿐이지. 그런 나를 왜 어려워했을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최고 어른. 할아버지가 모신다는 그분께서 1등 귀족인 거네요.”
“그렇지.”
“누나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두려워한 게 아니라 그 뒤에 계신 분의 이름을 무서워한 건가요?”
“정확히 봤단다.”
그때였다. 올란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하란. 속으면 안 돼. 지금 할아버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고,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무서울 뿐이라고. 사실 제일 무서운 건 할아버지가 맞아.”
가하란은 소리 내어 웃는 아빠를 바라보다가 할아버지한테 시선을 돌렸다. 첼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쪽 눈을 씰룩였다.
“아빠 말이 맞아요?”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란다. 해석은 자유지만.”
첼이 가하란의 양손을 살포시 쥐었다.
“거병 기술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들었다.”
“네.”
“왜 기술자가 되고 싶지?”
“아빠와 함께 거병을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막 두근거렸어요.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잖아요. 그걸 제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요.”
타챠는 단순한 파괴 도구라고 못 박았지만 가하란은 다르게 생각했다. 용도는 만드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거니까. 모두를 지켜내는 거병도 분명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어릴 땐 거병에 푹 빠졌다. 그 거대한 기계에 홀리지 않는 사내아이는 드물 테지. 아주 잠깐이지만 거병 기사란 꿈도 꿔봤다. 하지만 바란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지. 기술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열심히 배워 보려고요.”
“만약 기술자가 못 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전 다른 꿈도 많아요. 기술자가 될 수 없다면 모험가가 될 거예요. 대륙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신기한 것들을 두 눈으로 볼 거예요.”
“모험가가 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니?”
“아니요. 돈이 많아야 해요?”
“많아야지. 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니까. 뭐, 당장 고민할 필요는 없긴 하다만.”
첼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일단 뭐든 해보는 게 좋지.”
대화가 잠시 끊겼다. 가하란은 눈을 비비며 작게 하품했다. 얘기를 듣는 게 즐거워서 잊고 있었는데, 잘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다.
“시간은 많으니 다음에 또 얘기하자꾸나. 오늘은 이만 자고.”
더 듣고 싶다고 말하려 했지만 자꾸 하품이 나왔다. 올란트가 가하란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들어가서 자.”
쏟아지는 잠에 가하란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뒤따라 들어온 툴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 도중에 어둠이 내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