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밀레나 양. 혹시 내가 방해한 거라면….”
“아닙니다.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밀레나는 눈치껏 걸음을 옮겨 문으로 다가갔다. 첼이 슬그머니 몸을 틀어 비켜주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조만간 또 보죠.”
“예!”
뒷짐을 지는 것으로 예를 올리고 날렵하게 돌아섰다. 뒤에 첼 총집사가 있다고 생각하니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문고리를 잡고 재빨리 당겼다.
“누나! 다음에 또 봐.”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가하란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못 했다.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나서 문틀을 넘을 때였다.
“누나라. 밀레나 양, 이 아이와 친분이 있나 보군요.”
걸음을 잡아채는 음성이었다. 진정한 다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후에 깔끔하게 돌아서서 대답했다.
“네. 여기서 만난 친구입니다.”
실체적 진실만 입 밖으로 꺼내야 했다. 어설프게 숨기거나 거짓을 늘어놓는 기만행위는 엄금이었다.
“친구.”
툭 내뱉은 첼의 한마디가 왜 이렇게 가슴을 짓누를까. 판자 하나만 품고 격랑 속으로 뛰어든 느낌이었다.
눈치를 살피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시선을 바닥에 깔고 생각의 회전속도를 높였다.
실수한 게 있나 고민해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친구가 간다는데 배웅은 해줘야지. 그렇지 않니?”
첼이 가하란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어쩌다 보니 가하란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그 틈으로 첼의 표정을 살폈다.
느긋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세나티아 가의 총집사가 그런 표정을 지으니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입을 다문 채 집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억누르고 있던 숨을 토해낸 건 스무 걸음 정도 이동한 후였다.
후, 하고 길게 그리고 격하게 숨을 뽑아냈다. 추위가 느껴지는 건 비 때문이 아니리라.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집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현관문은 닫혀 있었다. 만약 첼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심장이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누나, 괜찮아?”
얼떨떨한 눈으로 가하란을 보았다.
“너 저분이 누군지 알아?”
“할아버지?”
“그래.”
“잘 몰라. 핀들론 할아버지의 친구. 아니 팬이었던가? 내가 아는 건 이게 다야.”
친구? 팬? 상황을 정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단어였다.
신분을 숨기고 있는 건가.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었던 걸까. 그보다 핀들론과 친분이 있다는 건 사실일까?
정치계의 거물은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였다. 총집사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누나. 저 할아버지, 높은 사람이야?”
“미안하지만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말하면 큰일 날 것 같거든.”
말을 아끼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총집사가 다 설명해줄 것이다.
“가하란. 버릇없이 굴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저분이 질문하면 거짓말하지 말고 착실하게 대답하고. 정말 무서운 분이라는 걸 반드시 기억하고.”
“무서운 분 아니야. 상냥하신 분인데.”
“아니야, 무서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예의 없게 굴지 마. 뭐, 너라면 알아서 잘할 것 같지만.”
물어볼 말이 산처럼 쌓여갔지만, 꾹 참았다.
“가봐.”
“입구까지 같이 가줄게.”
“됐으니까 얼른 가봐. 안에서 널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
가하란의 어깨를 붙잡은 다음 반 바퀴 돌렸다. 등을 툭 밀어 집으로 걸어가게 만들었다.
“얼른 들어가.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알겠어. 누나, 다음에 또 올 거지?”
“시간 나면 찾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잰걸음으로 집을 향하던 가하란이 도중에 슬쩍 돌아본다. 밀레나는 살짝 화난 표정을 지으며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다음에 또 봐!”
힘차게 인사하며 다시 움직인다.
가하란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다음에 몸을 틀었다. 그리고 뛰듯이 걸어 나갔다.
오늘 본 건 잊는 거야, 괜한 관심 두지 마. 비를 피하고 아무 일 없이 돌아간 거야.
밀레나는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가하란을 닫았던 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밖을 봤다. 밀레나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뛰기 시작했다.
“배웅은 잘하고 왔고?”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가하란은 현관문을 닫았다.
“네.”
“자, 이걸로 닦아라. 괜히 감기 걸리지 말고.”
할아버지가 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았다.
“할 말이 있는 거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무서운 사람 같지 않았다. 눈빛이 저렇게 따뜻한데 누나는 왜 할아버지를 어려워했을까.
“밀레나 그 아이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할아버지 말 잘 들으라고 했어요. 예의 없게 굴지 말고.”
“그 외엔?”
“없어요.”
“그 아이는 내가 무서웠던 모양이구나. 네가 보기에도 이 할아버지가 무서워 보이니?”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안 무서워요. 병원에서 저한테 해주신 말씀, 아직도 기억해요. 절 다독여주신 것도.”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구나. 그때 내가 준 초콜릿은 어떻게 했지?”
“반은 제가 먹었어요.”
“남은 반은?”
“핀들론 할아버지 곁에 뒀어요.”
가하란은 땅속에 묻히던 관을 떠올렸다. 마음이 울적해졌지만 얼굴에 표시하진 않았다.
감정을 곧잘 드러낸다던 밀레나의 말이 생각났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매번 들어맞는 말도 아니었다. 감춰야 할 때는 누구보다 잘 감출 자신이 있었다.
“그래, 잘했다.”
주름진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머리에 닿기 직전, 할아버지는 손을 거두었다.
“추울 테니 불 앞으로 가자꾸나.”
“잠깐만요.”
가하란은 구석에 쌓아둔 마른 장작을 들고 벽난로로 갔다. 불쏘시개로 재를 정리한 후 장작을 넣었다.
“집안일은 네 담당인가 보구나.”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아빠랑 반씩 했어요. 근데 최근에는 제가 다 해요. 아빠가 일이 바빠졌거든요.”
“바쁠 시기긴 하지.”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포장된 종이를 펼치자 예쁜 쿠키가 나왔다.
“자.”
“먹어도 돼요?”
“내가 주는 선물이다.”
때마침 올란트가 방에서 나왔다. 눈빛을 보냈다. 아빠 이거 받아도 될까요,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돼.”
허락이 떨어졌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두 손으로 쿠키를 받고 인사했다.
할아버지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아들, 앞에 계신 할아버지 기억하지?”
“네. 병원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아빠는 이 할아버지 어떻게 알아요?”
올란트가 자리에 앉으며 무릎을 툭툭 쳤다. 가하란은 쿠키를 움켜쥔 채 아빠에게 다가가 안겼다.
“아빠 면회 왔을 때, 아빠가 했던 말 기억나? 정말 무서운 선생님이자 친구가 있다고.”
“기억나요. 우리 집 가구를 선물해주신 분이요.”
“기억하고 있네.”
“혹시 할아버지가….”
가하란은 맞은편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 알아챈 건데,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아빠와 닮은 탁한 하늘색이었다.
아니, 눈동자 색만이 아니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 다른 꼴이었다. 그런데 전반적인 인상이, 풍기는 분위기가 굉장히 비슷했다.
따로따로 봤다면 느끼지 못했을 동질감이었다. 한자리에서, 그것도 가까이서 둘을 동시에 봐야지만 닮았다고 느낄 것이다.
“왜 그렇게 쳐다봐?”
“닮은 거 같아서요.”
“닮아?”
“할아버지랑 아빠요. 닮았어요.”
할아버지가 먼저 웃고, 이어서 올란트가 미소를 흘렸다.
“제가 말했죠. 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라고.”
“붙여놓고 보면 다들 알아볼 거다.”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눈만 깜빡거렸다.
“얼굴만 보고 가는 건 그른 것 같네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올란트가 말했다.
“내가 결정해도 되는 거냐?”
할아버지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느긋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건 제가 세나티아 가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그렇지.”
“그렇다면 할아버지 판단에 맡길게요. 저도 군부에 붙들려 있으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거든요.”
“나중에 날 원망할 생각은 마라.”
“가하란이 택한 길을 제가 원망할까요? 전 응원할 겁니다. 할아버지께서 절 믿어 주셨듯이.”
“믿기는. 난 속 썩이는 손자 놈을 내보냈을 뿐이다.”
대화 내용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중간에 불쑥 튀어나온 ‘손자’란 단어가 가하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려운 대화가 아니었다. 맥락도 쉽게 짚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의아했다.
“아빠. 혹시 저 할아버지가….”
올란트가 가하란의 몸을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까이 가봐.”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할아버지의 왼손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에서 할아버지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하나하나 되새길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가하란은 할아버지 코앞에 섰다.
의자에서 일어선 할아버지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를 맞춰줬다.
“이렇게 가까이서 제대로 보니 느낌이 또 다르구나. 어떤 애와 비슷하게 개구쟁이 기질이 가득해.”
이번에도 손을 뻗는 걸 주저하는 할아버지였다.
머뭇거리는 손을 지켜보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의 손은 생각보다 컸다. 아빠만큼이나 큰 손이었다. 손바닥으로 할아버지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슬픔? 아니면 기쁨?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아빠의 할아버지요.”
들은 것을 토대로 대답했다. 내가 모르는 가족. 눈앞의 할아버지가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러니 나는 너의 증조부란다.”
“증조부요?”
“말이 어렵겠구나.”
“아니에요. 이제 알게 됐으니까 어렵지 않아요. 그러면 제가 증조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 그냥 할아버지면 된다. 그거면 돼.”
깊게 팬 팔자 주름에서 시작된 떨림이 할아버지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할아버지가 손을 당겼다. 가하란은 할아버지 뺨에 닿은 자신의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많이 보고 싶었단다. 정말 많이.”
“저를요?”
“그래. 네 아비와 한 약속이 있기에 이렇게 늦게 찾아왔지만, 한순간도 널 잊어본 적이 없단다.”
슬픈 얼굴을 보면 왜 같이 울고 싶어지는 걸까. 울음은 전염성이 짙다는 말을 떠올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안아드려.”
뒤에서 아빠가 말했다. 목이 살짝 메는 것 같아 힘을 주어 물었다.
“그래도 되나요?”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양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천천히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
비에 젖은 옷 냄새가 먼저 코를 스쳐 갔다. 뒤를 이어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정겨운 냄새를 맡게 됐다.
“이 할아비가 이름을 안 알려줬구나. 내 이름은 첼이란다.”
“기억할게요, 할아버지.”
“……고맙구나.”
정수리에 할아버지 손이 닿았다.
아빠와 닮은 크고 거친 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