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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7화 (345/558)

제47화

“아니죠. ‘안다라스의 영웅’은 졸작이에요.”

“졸작이라 하기엔 재연 횟수가 많지 않나요? 안다라스의 영웅으로 명성을 올린 극단도 꽤 많고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네요. 인기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내용이 유치하잖아요. 설마 올란트 씨, 그 연극을 재미있게 본 건 아니죠?”

밀레나는 포크로 고기완자를 쿡 찍었다.

“저는 괜찮게 봤어요. 영웅서사시를 좋아하니까요.”

“세상에. 가하란, 너희 아빠는 다른 건 몰라도 작품 보는 눈은 별로인 게 확실해.”

농담조로 말했다. 듣고 있던 가하란이 포크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누나는 공연 같은 거 많이 봤어?”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았어. 아니지. 끌려가서 본 것까지 합치면 꽤 되려나? 근데 그런 공연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

“끌려가?”

밀레나는 고기완자를 반으로 가르며 말했다.

“고상한 척해야 하는 자리가 반드시 생겨. 그럴 때면 집사 손에 이끌려 극장으로 갔어. 보기 싫어도 억지로 보는 거지.”

“가기 싫다고 하면 안 돼?”

“그런 말로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면 그렇게 했겠지?”

가하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깐만 자리를 비울게요. 정리할 것이 있어서.”

“자택이니 편하게 하세요. 비 피하러 들어온 주제에 꼬투리 잡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친절하시네요. 참, 아까도 이 말을 했던가요?”

올란트가 일어나면서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밀레나는 방문이 닫히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좋으신 분이네. 네 말대로.”

“그렇지?”

생글생글 웃는 가하란이었다.

올란트는 언제쯤 가하란에게 집안 내력을 털어놓을까. 어쩌면 평생 감추고 살아갈 수도 있다. 특권 계층이었다는 걸 알아봤자 득 될 게 없으니까.

“연극 말이야.”

잠깐 딴생각 하던 때 가하란이 말했다.

“거리에서 하는 연극하고 극장에서 하는 연극하고 많이 달라?”

“규모 면에서는 차이가 크지. 완성도적인 측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테고.”

“한번 보고 싶다. 아까 누나가 말한 극단 마법사도 보고 싶고.”

“극장에서 연극을 본 적이 없어? 둔에도 극단이 몇 개 있을 텐데.”

“비싸니까. 아빠가 1년 전 생일 때 보여준다고 했었는데, 연극 대신 책을 사달라고 했어. 책은 여러 번 볼 수 있잖아.”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닌가? 가구들을 보면 연극 한 편 정도는 무리 없이 관람할 수 있을 텐데.

밀레나는 벽난로 옆에 둔 기록지를 쳐다봤다.

“받은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뭐가?”

혼잣말에 가하란이 반응했다.

“연극 보고 싶다 했지? 그러면 내가 초대권을 줄게. 아빠랑 같이 가서 봐.”

펄쩍 뛰며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가하란은 담담한 눈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이유 없이 비싼 선물은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

“누가? 너희 아빠가?”

“응.”

“나한테는 그리 비싼 게 아니야.”

“누나한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기준에서는 정말 비싸니까.”

“은근히 고지식한 면이 있네. 그냥 고마워, 하면서 받으면 돼.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주는 선물도 아니야. 저거.”

밀레나는 손가락을 들어 기록지를 가리켰다.

“그깟 연극 초대권보다 저게 더 값진 물건이야. 그런 귀한 걸 너는 아무런 대가 없이 나한테 보여줬잖아? 그러니 연극 초대권은 정당한 보상이야.”

“아닌데. 난 이미 누나한테 많이 받았어.”

“나한테? 뭘?”

“이야기. 누나가 해준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어. 할아버지가 남긴 기록만큼이나.”

위대한 랍파의 수기와 비교되다니.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내가 해준 얘기는 시시한 것들뿐이야.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기도 하고.”

“난 처음 들었는걸?”

틀린 말은 안 해서 묘하게 상대하기 껄끄럽다.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냥 받아.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정 싫으면 받고 난 뒤에 버리든지 해. 난 신경 안 써.”

“선물을 어떻게 버려.”

“그러니까 가서 봐. 알겠지?”

고민하던 가하란이 기록지를 손에 쥐었다.

“이거 빌려줄게.”

“이걸? 내가 가져간 뒤에 안 돌려주면 어쩌려고?”

“누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해? 우리는 욕심이 많아. 귀족은 거짓말을 먹고 산다, 이런 격언 못 들어 봤어?”

“모든 사람이 착하지 않듯 모든 귀족이 나쁘지 않아. 난 그렇게 믿어.”

받으라면서 기록지를 내민다. 밀레나는 손바닥으로 기록지를 밀어냈다.

“마음 같아선 가져가고 싶어. 욕심이 나는 건 사실이니까. 근데 안 가져갈 거야. 내가 여기 와서 볼게, 그러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더 좋지!”

가하란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밀레나는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너, 나 좋아해?”

“어. 좋아해.”

정면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말이었다. 망설이는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바로 웃었을 텐데, 머뭇거림조차 없으니 괜히 민망해진다.

안다. 좋아한다는 말이 범용적으로 쓰이는 그 뜻이라는 걸. 남녀 관계에서 쓰이는 애틋한 느낌은 전혀 없으리라.

그래서일까? 골려주고 싶었다. 평소에는 이런 생각 전혀 않는데, 구김살 없는 꼬마를 보고 있으니 장난기가 샘솟는다.

“너 좋아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알아.”

“뭔데?”

“계속 보고 싶은 거. 같이 밥을 먹고 싶은 거. 안 보이면 걱정되고 쓸쓸해지는 거.”

선한 눈웃음에 할 말을 잃었다. 밀레나는 멀뚱히 바라보는 눈동자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율이라면 지금 널 꽉 안았을지도 몰라.”

“율?”

“있어. 내 동기 중에 키가 무식하게 큰 애가. 덕분에 난 별명이 난쟁이가 됐어. 걘 길쭉이고.”

“키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큰대.”

“거참 위로가 된다. 근데 내가 왜 이런 말까지 너한테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별거 아닌 대화가 꽤 즐거웠다. 동기들끼리도 이런 얘기를 자주 했지만 따분할 뿐이었다. 아니, 솔직히 지칠 때가 많았다.

터놓고 말하는 듯하지만 의도를 숨긴 채 얘기할 때가 잦았으니까. 교정에 있을 때는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기이나, 언젠가는 경쟁해야 할 상대들이었다.

가문의 이익을 두고 다투게 된다면 서로에게 검을 들이밀어야 하는 적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절친한 동기가 아닌 이상 언제나 벽을 세워뒀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리라.

하지만 이 집에는, 가하란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면을 내려놓고 순진하게 말할 수 있었다.

되짚어보면 참 의미 없는 대화들이었다. 건설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재미있었다. 친구, 그 가벼운 단어가 새삼 아쉽게 다가온다.

“누나.”

“어?”

“얘기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와도 돼. 내가 들어줄게.”

“밤중에 불쑥 찾아와도 화 안 낼 거야?”

“괜찮아.”

“새벽에 문을 두드려도?”

“그건 조금 곤란해.”

밀레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침묵이 길어졌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장작이 부러지며 불티가 튀어 올랐다. 몸이 노곤해진다. 이대로 있다가는 잠들지도 모른다.

“비, 그쳤네.”

요란하게 지붕을 때리던 비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아쉽다는 감정이 몸을 휘감았지만, 훌훌 털면서 일어섰다.

“그만 갈게. 너무 오래 있으면 민폐니까.”

“더 있어도 되는데.”

“내가 가는 게 싫어?”

“어. 더 얘기하고 싶어.”

정말 감추는 법을 모르는 애다.

“아빠랑 둘이서 할 얘기가 있지 않아? 오랜만에 보는 거라며.”

“아빠랑도 얘기하고 싶어. 놀고도 싶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가하란의 눈동자가 닫힌 문으로 향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눈이었다.

“이런 건 또 어른스럽네.”

무의식적으로 나가려던 손을 간신히 붙들었다. 하마터면 툴을 간지럽힐 때처럼 가하란을 쓰다듬을 뻔했다.

바짝 마른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끈으로 묶었다. 숙소까지 부지런히 뛰어가면 자정 전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다음에 또 봐.”

“잠깐만. 아빠한테 말할게.”

방으로 걸어가려는 가하란을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괜찮으니까.”

“그래도.”

“다음에 와서 다시 인사하면 돼.”

대접은 충분히 받았다. 물러날 때는 조용히 가는 게 좋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여긴 고리타분한 사교계가 아니니까.

“누나. 비옷 가져갈래? 혹시 모르잖아.”

“내리면 맞지 뭐. 나 비 맞는 거 좋아해.”

인사하듯 다가와 주둥이를 내미는 툴을 살며시 끌어안은 후 놓아줬다. 성도에서 유행인 작은 개보다 큰 개가 확실히 좋다.

“갈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문고리를 쥘 때였다. 똑똑, 단조로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밀레나는 가하란을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외부인이 손님을 받을 순 없으니까.

“누구세요?”

가하란이 목소리를 냈다. 문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밖을 보면서.

“어! 할아버지!”

밖에서 대답이 없었는데 가하란이 먼저 반응했다. 아는 사람인 듯하다.

이웃이겠지? 눈에 띄면 어색한 기류가 흐를 테니,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가벼운 용건이면 바깥에 있는 손님이 물러난 다음 떠날 것이다.

안으로 들여야 하는 손님이라면 슬쩍 눈인사하고 지나치면 되고.

문이 열린다. 그친 줄 알았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모자를 쓴 노인이었다. 검은 비옷과 갈색 지팡이. 잘 정리한 수염. 그다음에 익숙한 얼굴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밀레나는 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당혹감마저 느껴졌다. 의외성이 절묘하게 발휘된 순간이었다.

이분이 왜 여기에, 그런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차렷 자세를 잡고 턱을 당겼다. 노인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은 노인의 인중을 향했다.

먼저 경례를 올릴 순 없었다. 이런 사적인 공간에서는 상급자가 알아봐 주길 기다려야 한다.

노인은 군부의 장관도, 행정부의 관료도 아니었다. 급이 매겨지는 귀족도 아니었다.

신분패에는 자유 시민으로 새겨져 있는 사람. 하지만 이 노인 앞에서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귀족은 극히 드물 것이다.

“선객이 있었군. 그것도 아는 얼굴이고.”

노인, 첼 총집사가 다가왔다.

“밀레나 엔첸세, 내 기억이 맞나요?”

“예! 그렇습니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혹시 다른 생도도 여기에?”

“아닙니다!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스콜라의 지도 방침과는 상관없습니다.”

보고 형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편하게 말한다고 해서 느슨하게 굴었다간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밀레나 양. 나도 개인적인 일 때문에 온 것이니 격식을 차릴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대답과는 달리 몸의 긴장도는 한층 더 올라갔다. 왜 이곳에 총집사님이 오신 걸까, 무슨 용무일까. 몰락한 귀족이라고 했으니 과거에 친분이 있었던 걸까?

아주 잠깐 첼과 시선이 마주쳤다. 밀레나는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괜한 추측은 화를 부를 테니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밖으로 나온 올란트가 멀건 웃음을 짓는다.

“애매할 때 오셨네요.”

올란트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첼이 대꾸했다.

밀레나는 바짝 언 채 두 사람 사이에서 대기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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