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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6화 (344/558)

제46화

“아빠!”

가하란이 담벼락에서 뛰어내렸다. 삐끗해서 넘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위태해 보였으나 금방 중심을 잡고 달려 나갔다.

밀레나는 멀어지는 가하란을 응시하다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성인 남자 두 명을 바라보았다.

일단 왼쪽에 서 있는 남자는 군인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식별 가능한 반듯한 군모 덕분에 알아차렸다.

오른쪽에 있던 남자는 가하란을 보자마자 양팔을 벌리며 뛰었다. 어딘가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누가 친부인지 알 것이다. 밀레나는 기록지를 살며시 쥔 채 부자의 상봉을 지켜봤다.

가하란을 번쩍 들어 올리며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던 남자가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그 소리에 먼저 반응한 건 툴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며 달려가는 모습이 조금 섭섭했다. 간식을 줘도 저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가하란과 가하란의 아빠, 그리고 툴이 한데 뭉쳤다. 가족이란 단어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들면 저렇지 않을까. 아니, 이건 좀 과장된 표현인가?

밀레나는 잠깐 시선을 돌렸다. 가하란이 기록지를 가지러 들어간 집. 남의 집에 기록지를 놔뒀을 리 없으니 저기서 사는 게 확실했다.

희미한 불빛조차 없다.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가하란의 친모는….

생각이 끊겼다. 골목으로 나온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 좁은 골목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골목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밀레나는 턱을 괴고 사람들을 지켜봤다. 가하란의 아빠를 둘러싼 채 격려와 위로, 축하를 건네는 중이었다.

아빠가 골목의 중심이라던 가하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람들 눈빛에서 신뢰가 느껴졌다. 허물없는 웃음에서 끈끈한 유대가 엿보였다.

“좋은 곳이네.”

미엔이 이 광경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시민들의 가식적인 축하 행사라고 비꼬았을까?

밀레나는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털었다. 누가 누굴 평가하는 건지. 괜찮은 귀족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저들이 보기에 미엔과 난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난처해졌다. 기록지를 여기다 두고 갈 수도, 그렇다고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전할 수도 없었다.

소중한 물건이라 빌려줄 수 없다고 못 박은 물건이니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자자! 다들 그만 들어가. 고생하고 돌아온 사람 쉴 수 있게 놓아줘.”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여자였는데 어지간한 남자보다 목청이 좋았다.

골목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집으로 들어갔다. 푹 쉬라는 인사를 한마디씩 남기면서.

흩어지는 사람들이 밀레나를 한 번씩 쓱 쳐다봤다. 신경 쓰이겠지. 다툴 생각은 없었기에 담벼락에서 내려왔다. 캄캄한 어둠이 몸을 가려주었다.

“이곳 주민은 아닌 것 같은데.”

밀레나는 일직선으로 다가와 질문하는 남자를 보았다. 가하란 아빠 옆에 있던 군인이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을 택했다. 스콜라의 상징이 그려진 신분패를 내밀었다. 야간 검문은 군인의 권리이자 의무인 만큼 불쾌하지는 않았다.

“스콜라 생도군.”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밀레나는 견장을 쓱 봤다. 일등 중사. 둔 군부의 특수성을 생각해 봤을 때 절대 낮지 않은 계급이었다. 한 부대의 부대장 혹은 대장일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을 어겼다고 잡아갈 건 아니죠?”

“스콜라 생도에게 통행금지 시간이 있던가?”

“없죠. 없으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는 거고요.”

군인의 눈동자가 기록지로 향했다. 종이 뭉치가 무엇인지 아는 눈치였다.

“가하란과 아는 사이인가?”

“대답할 의무가 있나요?”

“없다.”

“그러면 조금 기다리세요. 저기 답을 아는 애가 오고 있으니까.”

군인이 군모를 살짝 들어 올렸다. 예리한 눈을 가졌다. 눈빛이 살아 있는 군인은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존경하는 편이었다.

“의심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사과하마.”

“아니에요. 그보다 가하란하고 아는 사이인가요?”

“대답할 의무가 있나?”

그렇게 대답한 군인이 이내 군모를 벗었다. 탐색하던 기색이 동시에 사라졌다. 냉정한 군인의 자세를 푼 남자는 의외로 다정한 느낌이었다.

“루카다. 보다시피 군인이지.”

“밀레나 엔첸세예요. 아까 보여드린 대로 스콜라 생도고요.”

“엔첸세.”

가문 이름을 입에서 굴리는 루카였다.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어머니를 아시나요?”

“명성은 들어봤다. 군인인 이상 모를 수가 없지.”

루카의 눈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혹시라도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제 안부 좀 전해주세요. 딸은 무사히 크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만나게 된다면 꼭 전해주마.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하란이 아빠 손을 붙잡고 다가왔다.

정말 천진난만해 보인다. 둘이서 대화할 때는 꽤 성숙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 어린애가 따로 없다.

가하란 아빠가 연한 눈웃음을 지었다. 이름이 올란트라고 했었지? 눈이 마주쳤지만 먼저 입을 열진 않았다. 대신 가하란에게 눈짓을 줬다.

가하란이 앞으로 나섰다.

“아빠. 여기 있는 누나는….”

“아니지. 소개 순서가 잘못됐어. 아빠를 먼저 이분께 소개해 줘야지.”

가하란의 언행을 바로잡는 올란트였다. 사소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예법을 올란트가 제대로 집었다.

머릿속 정리가 끝났는지 가하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우리 아버지셔.”

올란트가 왼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슴께 바로 밑. 딱 알맞은 높이였다.

“올란트입니다. 미숙한 인사지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신감 있는 억양, 시선 처리, 팔을 뻗는 각도와 거리감. 흠잡을 곳 없었다. 이런 골목에서 교과서적인 인사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밀레나 엔첸세예요.”

오른손을 내밀어 올란트 손에 살며시 내려놓았다가 거두었다.

“우리 아들과 어떤 사이인지 물어도 될까요?”

“친구예요.”

친구란 말에 가하란 얼굴이 활짝 피는 걸 보았다.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가하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친구란 단어의 가벼움을.

“이거.”

밀레나는 기록지를 돌려줬다. 아직 못 읽은 페이지는 다음에 다시 와서 볼 것이다. 그때가 이곳을 찾는 마지막이 될 테고.

느릿한 손길로 기록지를 잡는 가하란이었다.

“다 읽었어?”

“아니. 조금 남았어.”

“그러면 또 올 거야?”

“어. 그럴게.”

루카와 올란트에게 눈인사하고 떠나려던 참이었다. 돌연 궁금증 하나가 생겼다.

“내가 귀족인 걸 어떻게 알았죠?”

올란트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가하란이 말해줬나요?”

“이 녀석은 아가씨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러면 이 옷을 보고 예상했나요? 나름 괜찮은 옷이긴 하지만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건데요.”

“그런 정보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더 쉬운 구별법이 있죠.”

“그게 뭐죠?”

“아가씨 옆에 계신 형님이 모자를 벗었다는 점이죠. 실외에서 이유도 없이 벗을 분이 아닌데 말이죠.”

밀레나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의 예절 중 하나였다는 게 그제야 기억났다.

“눈에 훤히 보이는 거였네요.”

“그런 셈이죠.”

“얘기가 나온 김에 사교계의 예법은 어디서 배운 건가요? 놀라울 정도로 익숙해 보이던데.”

말해놓고 나니 몰아붙이는 느낌이 들었다. 밀레나는 말을 덧붙였다.

“단순한 호기심이에요. 불편하면 답하지 않아도 돼요.”

“친절하시네요.”

올란트가 이어서 말하기 직전이었다. 툭 하고 무엇인가가 정수리를 건드렸다. 고개를 들자마자 비가 우수수 쏟아졌다.

여름 끝자락이지만 그래도 여름이라고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난 이만 돌아가마.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

“형님, 여기까지 오셨는데 뭐라도 드시고 가셔야죠.”

“다음에.”

루카가 군모를 눌러쓰며 걸어갔다. 밀레나도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비가 더 거세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누나. 그냥 가게?”

“가야지.”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더 쏟아붓는다. 이젠 비가 따가움을 넘어 아팠다. 천둥마저 묻힐 정도로 빗소리가 강렬했다.

걸음을 떼려는데 붙잡는 손이 있었다.

“위험해.”

가하란이었다. 그리고는 올란트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빠, 집에서 잠깐만 비를 피했다가 가면 안 돼요?”

“괜찮지만 우리 생각보다는 아가씨 의중이 중요한 일이라.”

밀레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당장 돌아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스콜라 생도는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행사가 아닌 이상 어디까지나 자율행동이 보장된다.

스콜라 교정이었다면 무단 외박은 감점 사항이지만, 둔에서는 그런 규칙도 없고.

밀레나는 가하란과 올란트를 번갈아 봤다. 더불어 가하란이 품고 있는 기록지까지.

흥미로운 요소가 세 개나 있었다. 아, 툴까지 합치면 네 개인가?

따분한 숙소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시간을 보낼 것인가.

금방 답이 나왔다.

“호의를 받아들여서 잠깐만 쉬고 갈게요.”

“그렇게 하시죠.”

올란트가 웃으면서 뛰어갔다. 가하란도 아빠와 똑같은 자세로 집을 향해 갔다. 똑 닮은 부자였다.

“이거.”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수건을 건네받았다. 밀레나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집안을 살폈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안을 채운 가구는 나름 괜찮은 것들이었다. 고가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반 시민이 쓰기에는 꽤 비싼 가구들.

좁은 거실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가하란은 올란트를 데리고 안쪽 문을 여는 중이었다. 올란트의 방인 듯했다.

“혼자 집 지키느라 힘들었겠네.”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진짜예요.”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참 각별하다. 괴팍한 가족 관계를 여러 번 봐와서 그런가, 화목한 가정이 조금 재미있었다.

“누나, 춥지?”

“그렇게 춥진 않아. 이 정도는 익숙하고.”

“그래도 혹시 몰라. 감기 걸릴 수도 있어.”

가하란이 분주히 움직였다. 금방 벽난로에 불이 붙었다. 전해져오는 온기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난로 가까이 갔다.

“저녁은 먹었어?”

“먹었어요. 아빠는요?”

“아직 못 먹었어.”

“먹을 거 있어요. 제가 금방 준비할게요.”

“내가 하면 돼.”

“아니에요.”

올란트가 가하란 손에 이끌려 난로 옆으로 왔다. 밀레나는 옆으로 살짝 움직여 자리를 만들었다.

“아빠를 많이 챙기네요.”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제가 아들 복은 타고났죠.”

밀레나는 젖은 수건을 펼쳐서 난로 앞에 내려놓았다.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줄 수 있나요?”

“예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물으셨죠?”

“맞아요.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면 올란트 씨의 예법은 겉핥기가 아니에요. 오랫동안 지겨울 정도로 몸에 익혀야지만 그런 자연스러움이 나오죠.”

“그렇게 보이던가요?”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이란 게 무섭긴 하군요. 완전히 잊고 있었고, 구색만 맞췄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구색만 맞춘 거면 카운티에 중에 태반이 일을 그만둬야 할 텐데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예법을 가르치는 카운티에만큼이나 완벽한 인사였다. 더 나아가 올란트의 인사는 기품까지 엿보였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사람. 이 정도면 설명이 될까요?”

“괜한 걸 물었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옛날 일이니까요.”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시민 사이에서 살아가는 귀족은 그리 드문 얘기가 아니니까.

대화가 끊겼다. 멍하니 일렁거리는 불꽃을 바라볼 때였다. 가하란의 목소리가 시선을 잡아당겼다.

“이거 같이 먹어요.”

널찍한 그릇에 음식을 가득 담아오는 가하란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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