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밀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를 상기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철로 된 보관함 안쪽에 그게 있었어. 붉은 줄기 나무. 이름대로 줄기 껍질 부분이 아름다운 붉은색이었어.”
“아름다워?”
“도료를 잘 다루는 장인도 그런 색을 뽑아내긴 힘들 거야. 난 그토록 아름다운 붉은색은 그때 처음 봤어. 색이 진한 장미를 그 옆에 가져다 놓아도 비교가 안 될 거야.”
아름다운 붉은색. 눈앞에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가하란은 나무의 생김새와 색상을 추상적으로 그려내며 말을 들었다.
“다들 넋을 놓고 봤어. 관상목 중에서 그런 빛깔을 뽐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 관상목이 아니라는 게 다시금 떠오른 거야.”
밀레나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얌전히 누워 있는 툴을 바라본다.
“교관님은 곧바로 그 나무가 왜 위험한지 보여줬어.”
“어떤 식으로?”
“간단했어. 포획한 들개를 보관함 안에 집어넣었지. 흥분한 개가 보관함 안을 뛰어다니며 짖을 때였어. 갑자기 파르르 떨더니 그대로 고꾸라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밀레나의 미간에 얇은 주름이 잡혔다.
“가느다란 뿌리가 들개 몸을 파고들었어.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흥분한 개는 눈치채지 못했지. 신경성 독을 내포한 뿌리는 개를 마비시켰고, 그 뒤에 천천히 빨아 먹었어.”
빨아 먹었다는 적나라한 단어에 가하란은 인상을 썼다. 괜히 밑에 있는 툴이 신경 쓰였다.
“빨아 먹었다는 건….”
“빨대가 뭔지는 알지?”
“몇 번 본 적은 있어.”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네. 뿌리가 빨대였고, 들개의 체액이 음료였어. 피를 빨아들인 나무는 더욱 아름다운 붉은색으로 물들었어. 그때 온몸에 닭살이 돋더라.”
가하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줄기에 주렁주렁 열린 토마토 같은 것만 생각하다가, 동물을 섭취하는 식물을 떠올리니 괴리감에 어안이 벙벙했다.
불현듯 담벼락 옆에 소담하게 핀 민들레가 보였다.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씨앗을 퍼트릴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혹시 저런 것도….
“사람이 밀집해 사는 곳에 위험한 식물은 거의 없어. 대부분 행정국 관리반이 정리하니까. 특히나 여긴 둔이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해서 만들어진 도시에 그런 식물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없지.”
“그렇겠지?”
얼굴을 굳혔던 밀레나가 풋 하면서 웃었다.
“처음 봤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너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
“굳이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그런 성향이 되는 것도 당연해. 여긴 나름 괜찮은 곳이니까.”
밀레나가 담벼락을 양손으로 쥐고 몸을 뒤로 젖혔다. 뒤로 넘어갈 것 같아 잠깐 걱정했지만, 금방 중심을 잡는 밀레나를 보며 안심했다.
“근데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식물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알아?”
“그게 무슨 말이야?”
살면서 그런 식물을 본 적이 없다. 가까이에 있다면 한 번쯤은 봤을 텐데.
“사실 관용적인 표현이고 진짜 식물은 아니야.”
밀레나가 뒤로 몸을 더 젖혔다. 묶은 머리카락이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시선이 땅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저 밑에 뿌리가 있어.”
“뿌리?”
“마나의 근원 말이야. 들어본 적 없어?”
“이름은 들어본 거 같아.”
으쌰 하면서 상체를 세우는 밀레나였다. 접혀 올라간 상의를 툭툭 쳐서 펼친 다음 말했다.
“땅속 깊숙한 곳에 뿌리라는 게 있어. 마나가 다니는 길, 마나가 탄생한 곳.”
가하란은 흙먼지가 낮게 깔린 땅바닥을 보았다. 눈에 힘을 줘도 뿌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난 모르겠어.”
“마나를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느껴질 거야. 저 아래에 엄청난 것이 꿈틀대고 있다는 걸.”
“마나는 귀중한 거잖아. 땅을 파서 꺼내면 안 돼? 그러면 마법공학품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밀레나가 팔짱을 꼈다.
“굉장히 깊은 곳에 있어서 파낼 순 없을 거야. 그리고 뿌리가 있는 곳까지 들어간다고 해도 마나를 얻어내는 건 불가능해.”
“왜?”
“지상으로 흘러나온 마나는 밀도가 낮아. 우리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형태지. 하지만 저 밑바닥에 있는 건 밀도가 높은 마나야. 닿는 순간 그대로 끝!”
밀레나는 검지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밀도를 낮추면 되지 않아?”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성도에 있는 저명한 학자들이 여러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다 실패했다는 것만 알아.”
“마나는 쓰기도 어렵고, 모으기도 어렵구나.”
“그래서 놀라운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이 귀한 거야. 밀도가 낮은 마나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니까.”
마법.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였다. 가하란은 들뜬 마음으로 질문했다.
“누나는 마법을 본 적 있어?”
“몇 번 봤지. 성도에서는 극단 마법사들이 꽤 있으니까.”
“극단 마법사?”
“무대를 꾸며주는 마법사들이야. 화려한 연출에 쓰이지. 불꽃을 터트리고 연기를 뿜어내기도 해. 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것도 있고.”
“멋있겠다.”
밀레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글쎄. 처음이야 신기하지 계속 보게 되면 식상해. 무엇보다 그런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는 아주 많아.”
“마법의 수는 마법사의 수만큼 존재한다고 들었어. 비슷해 보이는 마법이라도 자세히 살피면 모두가 다르다고.”
“그건 또 어디서 알게 된 얘기야?”
“아빠가 알려줬어. 마법이 뭔지 궁금해서 물었던 적이 있거든.”
“그래?”
밀레나의 고개가 비스듬히 누웠다.
“너희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 준 공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너한테 이것저것 알려준 걸 보면 배움의 깊이가 남다른 것 같거든.”
아빠를 생각하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가하란은 골목 초입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는 핀들론 할아버지만큼이나 아는 게 많으셔. 그래서 골목에서 문제가 생기면 할아버지, 아니면 우리 아빠를 찾아.”
“그렇구나. 제철소에서 일한다고 했으니까 여기가 고향인 건가?”
“아니. 엄마랑 결혼하기 전에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먼 곳에 있었대.”
“정확히 어디?”
“그건 나도 몰라. 나중에 말씀해 주신다고 해서 나도 묻지 않았어.”
“어쩌면 성도일지도 몰라. 성도에서는 일반 시민들도 광장에 모여서 종종 철학을 논하니까. 너희 아빠도 거기서 이야기를 들었을 거야.”
“그럴지도 몰라.”
둔보다 크다는 성도. 자유 시민권을 얻게 되면 테리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누나.”
“왜?”
“뿌리에 대해 더 말해줄 거 없어? 마나가 다니는 길이라는 게 엄청 신기해.”
“아쉽게도 더 얘기해줄 거리가 없어.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니까. 뿌리는 마나의 근원이다. 뿌리를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아까 마나에 닿으면 끝이라고 했지?”
“어. 순식간에 끝나.”
끝이라는 말에 조용히 숨을 놓던 핀들론이 떠올랐다. 밀도 높은 마나와 접촉하면 잠들듯이 죽게 되는 걸까.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나며 무서워졌다. 더는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건 정말로 두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말이 없네.”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침울한 기색을 읽은 걸까. 밀레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하란은 오른쪽 위를 쳐다보았다. 마음이 동요한 탓인지 의식 저편으로 물러나 있던 정령들이 시야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가하란은 손으로 잠시 귀를 막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떠버리 정령들의 존재가 서서히 옅어졌다.
안도하며 눈을 뜨려던 순간이었다. 밀레나가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아픈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정말?”
“정말 괜찮아.”
가하란을 유심히 바라보던 밀레나가 살며시 손을 놓았다.
“있잖아.”
“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혹시 곁에 있었어?”
밀레나의 물음에 가하란은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럴 것 같더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건 정말 지치는 일이야.”
밀레나가 기록지를 무릎에 올려두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어릴 때부터 날 돌봐준 유모였는데, 내가 스콜라에 들어가고 1년 정도 지난 후에 돌아가셨어. 유모는 되게 통통했는데 그날 본 유모는 나보다 말라 있었어.”
시선이 하늘로 올라간다. 밀레나가 보고 있는 건 별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이라고, 가하란은 생각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송장도 꽤 봤어.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로 시체가 널브러진 고개를 자주 오갔거든. 난 말이야 죽는다는 걸, 생명이 없어진다는 걸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밀레나가 자신의 양팔을 쓰다듬었다. 여름밤 공기는 후틋했으나 과거를 되짚는 밀레나는 조금 추워 보였다.
“유모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그 날, 난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깨달았어. 생판 모르는 타인의 죽음은 단순한 현상이었지만, 유모의 죽음은 이성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거였거든.”
밀레나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지난 일이고, 이젠 지난 일에 동요할 정도로 약해빠지지도 않아. 하지만 그때 당시 나는 너무 힘들었고, 너무 무서웠고, 너무 후회됐어. 나는 유모와 더 많은 얘기를 해야 했었고, 더 많이 만났어야 했으니까.”
밀레나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가하란은 자그마한 입을 통해 나온 말을 한동안 곱씹었다.
왜 유모 얘기를 해줬는지 알 것 같았다.
“다들 그렇구나.”
“그래. 아마 다들 그럴 거야. 그리고 다들 그렇듯이, 또 익숙해질 거고.”
“그런 일에 익숙해진다는 건 되게 슬픈 일인 것 같아.”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열 살이란 나이는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일 것이다. 그런데도 가하란이 보기에 밀레나는 굉장히 어른 같았다.
“누나는 어른이네. 그리고 모르는 게 없어. 멋있어.”
밀레나가 코를 찡끗거리더니 슬그머니 밑을 내려다본다. 귓바퀴가 살짝 불그스름해 보인다.
“칭찬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가하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알아. 근데 대놓고 말하면 좀 그런 게 칭찬이야.”
“왜? 아빠는 정직한 칭찬보다 기분 좋은 건 없다고 했어.”
“순수한 칭찬은 보기 드물어. 다들 속내를 감추려는 방편으로 칭찬을 쓰니까.”
“난 아니야.”
“알아! 아니까… 더 민망한 거라고.”
밀레나의 붉은 눈동자만큼이나 귀가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옅게 미소 짓고 있는 밀레나의 옆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정말 이 골목과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기록지를 다 읽고 나면 아마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리라. 사는 환경이, 영역이 다른 사람.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쓸쓸해졌다. 아쉬움도 커졌다. 쉽게 친구라고 말했지만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으리라.
“누나.”
“어?”
“다음에….”
또 올 거냐는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가하란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벼락에서 떨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고 골목 초입을 바라봤다.
“……아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빠가 뛰어오고 있다는 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