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4화 (342/558)

제44화

기록지를 챙겨 밖으로 나온 가하란은 걸음을 잠시 멈췄다. 담벼락 옆에서 밀레나와 툴이 노는 중이었다.

“자, 돌아봐.”

밀레나가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툴은 멀뚱히 쳐다보다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손 말고. 제자리에서 돌아보라니까.”

밀레나가 시범을 보였다. 재빠르게 한 바퀴 돈 뒤에 툴에게 손짓했다. 툴도 이해했는지 껑충 뛰면서 빙글 돌았다.

“똑똑하네.”

가하란은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툴의 볼을 이리저리 매만지던 밀레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훈련이 잘됐어. 조련사한테 맡긴 건 아닐 테고, 직접 가르친 거야?”

“가르친 건 아니고 같이 놀았을 뿐이야.”

“노는 것도 훈련의 한 방식이긴 하니까. 얘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가하란은 기록지를 내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집마다 켜놓은 등불이 뿌연 빛무리를 만들었지만, 글을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잠깐만. 양초 가져올게.”

“괜찮아. 이 정도 빛만 있어도 볼 수 있어.”

저번처럼 판판한 돌을 가져와 털썩 앉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눈을 비비며 밀레나가 든 기록지를 보았다. 글자가 어둠에 번져 보였다.

“정말 보여?”

“못 믿겠으면 다음 페이지 읽어줄까?”

밀레나가 기록지를 넘겼다. 붉은 눈동자가 움직이고 곧이어 맞붙은 입술이 떨어졌다.

“골리언이 해충에게 물렸다. 두 겹으로 나뉘는 날개와 네 쌍의 다리. 황금빛 더듬이를 지닌 것으로 보아 금동쌍벌레와 비슷한 종류로 보인다. 상비약을 먹이고 예후를 지켜봤다.”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목소리가 골목을 누볐다. 같은 언어인데 느낌이 다르다. 차분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동시에 시장통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까랑까랑한 음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발성이 닮은 걸까?

“어두울 때 글을 읽는 건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돼. 그리고 난 밤눈도 밝은 편이라 훨씬 쉽고.”

“누난 할 줄 아는 게 많구나.”

밀레나가 멀뚱히 쳐다본다.

“왜?”

“누가 날 누나라고 부른 게 처음이라서.”

“이상해?”

“아니.”

호칭 문제는 해결된 것 같다. 가하란은 룽네가 준 바구니를 들고 밀레나 옆에 앉았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건데, 먹어볼래?”

“토르티야네. 근데 왜 재료가 다 따로 있어?”

“숟가락으로 원하는 만큼 속재료를 넣어서 싸 먹는 거니까.”

“그런 식으로도 먹는구나.”

한 번 더 권하려다가 살짝 망설여졌다. 편해진 만큼 잠깐 잊었는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귀족이었다.

거리에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걸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다.

“어떻게 먹는 건지 한번 보여줘.”

“괜찮겠어?”

“뭐가?”

“평소에 먹던 거랑 달라서 마음에 안 들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 처음에 먹어보라고 한 거야?”

“잠깐 잊었어.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밀레나가 기록서를 덮으며 주억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조리가 끝나지 않은 음식에 손대는 걸 혐오하는 사람도 분명 있어. 하지만 모든 귀족이 그러진 않아. 길거리 음식을 사랑하는 귀족도 많고.”

어서 보여줘, 라며 밀레나가 음식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손바닥 크기의 토르티야에 재료를 담은 후 둥글게 말았다.

“이대로 먹으면 돼.”

“간편하네. 샌드위치처럼.”

“그렇게 비교하니까 꽤 비슷하네.”

밀레나가 만들어 보겠다며 바구니를 가져갔다. 재료를 수북이 쌓아 반으로 접었다.

“꼭 말아야 하는 건 아니지?”

“각자 스타일이 있으니까.”

“난 이게 좋겠어.”

자그마한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래도 한입 베어 문다. 밀레나의 오른쪽 볼이 부풀어 올랐다. 한참을 오물오물 씹은 다음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삼켰다.

“간이 잘됐네. 채소 식감도 좋고. 고기는 잡내가 조금 나긴 하지만 거친 면이 오히려 이 음식에는 어울려.”

밀레나가 가하란을 보았다.

“네가 만든 거야?”

“아니. 룽네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 거야.”

맞은편에 있는 집을 가리켰다.

“여기 사람들은 진짜 널 잘 챙겨주네.”

“다 똑같다니까. 누가 아프면 간호해 주고, 일손이 필요하면 빌려주고.”

“그게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건 여기가 살기 좋은 곳이란 뜻이야. 누군지는 몰라도 질서를 잘 잡아놨네.”

가하란은 이제는 주인을 잃은 집으로 시선을 던졌다.

“할아버지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다들 날이 서 있었대. 담 하나, 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사이인데도 경계하고 헐뜯고. 그게 싫어서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고, 지금 골목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대.”

“할아버지라면 이 기록지의 주인분?”

“어. 핀들론 할아버지.”

“역시 멋진 분이시네. 역시 올바른 인도자란 말이 딱 어울려.”

툴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밀레나 무릎에 턱을 괬다. 높이가 딱 알맞은지 쉬는 모습이 편해 보였다.

“그래도 모두가 노력했으니까 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겠지. ‘영웅은 위대한 찰나를 만들어 내지만, 그걸 지속하는 건 다수의 일반인이다.’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이걸 쓴 분께서 남기신 말이야.”

“할아버지가?”

“내 추측이 맞는다면.”

“저번에 한 말도 그렇고, 누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 거야?”

밀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가하란도 시선을 올렸다. 별무리가 길게 늘어져 있고 중앙에 달이 놓여 있었다.

“랍파는 들어봤겠지?”

“물론이지.”

“이걸 읽었으니까 할아버지가 랍파였다는 것도 알 테고.”

“응.”

“세상에는 수많은 랍파가 존재해. 지금도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어린 랍파들이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런 랍파들 사이에서도 추앙받는 위대한 랍파들이 존재하는데, 그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

밀레나가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굳은살이 잔뜩 잡힌 손바닥이었다. 가하란은 슬쩍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게 괜히 마음에 안 든다.

“현재 제국과 연합왕국, 두 곳을 합쳐 위대한 랍파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 정도? 사람에 따라서 세 명일 수도 있고, 일곱 명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열은 안 넘어.”

누나가 펼쳐놨던 네 손가락을 접고 엄지 하나만 세웠다.

“마찬가지로 전 세대에서도 위대한 랍파는 극히 적었고, 그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어. 대륙을 내려다보는 사람, 제국의 날개, 랍파들의 안내자.”

기록지를 들어 올리며 밀레나가 말을 이었다.

“그게 네 할아버지인 로안 웁페 씰이셔. 미들네임인 웁페는 사람들이 존경을 담아 붙인 거긴 하지만.”

“로안. 맞아, 그분도 할아버지를 로안이라 불렀어.”

“역시 맞나 보네. 근데 그분이라니?”

“할아버지의 친구.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건 없어. 그저 신비로운 초록빛 눈을 가졌다는 정도. 그리고….”

가하란은 정령에 대해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타챠의 경고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절친한 사이, 믿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정령 얘기는 삼가야 했다.

“그리고?”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적당히 감추는 게 서로한테 좋아. 다 털어놓는 건 부담스럽거든.”

밀레나의 눈동자가 기록지로 향했다. 오가던 대화가 끊겼다. 곁으로 날아드는 날벌레를 쳐내다가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밑에 있는 밀레나가 말했다.

“거기서 뭐 해?”

가하란은 팔을 쭉 내밀어 골목 초입을 가리켰다.

“아빠가 곧 오실 거야.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고.”

“이제 곧 통행 제한 시간 아니야? 자유 시민이라 해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할 텐데.”

“루카 아저씨랑 같이 올 거니까 괜찮아.”

말해놓고 보니 설명이 부족했다.

“루카 아저씨는 군인이거든.”

“군인? 이 시간에 군인하고 같이 온다고?”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아빠한테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것 정도? 근데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오늘 돌아오실 거니까.”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살짝 부끄러웠다. 가하란은 괜스레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나도 올라간다.”

밀레나가 일어났다. 가하란은 밑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불필요한 짓이었다.

양손을 흔들며 발을 구른다. 밀레나의 몸이 누가 잡아끈 것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사뿐히 담벼락에 안착한 그녀를 멍청하게 바라봤다.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왜?”

밀레나가 무슨 일 있냐는 듯이 물었다.

“여기 꽤 높지 않아? 어떻게 그렇게….”

“간단한 신체술이야. 마나의 도움을 받으면 이 정도는 쉽지.”

“마나. 그러면 난 못 배우겠네.”

“그건 모르는 일이야. 마나란 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 동기들 중에 아직 신체술이 불가능한 애도 있으니까.”

“신체술을 쓰면 말보다 빨리 뛸 수도 있어?”

“잠깐 동안은 가능할걸? 근데 결국 뒤처질 거야. 사람이 담아낼 수 있는 마나의 한계치는 정말 적거든. 우등 교관님들도 10분을 채 유지 못 할걸?”

밀레나가 담벼락에 앉았다.

“조금 높아졌을 뿐인데 눈에 들어오는 정보량이 다르네. 이제 보니 배수로도 확실하게 되어 있잖아? 다른 골목과 비교하면 정말 잘 정비돼 있어.”

흥미롭다는 눈으로 골목 구석구석을 살피는 밀레나였다.

“역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내다보는 분의 작품답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보는 자. 가하란은 그 문구가 랍파를 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안, 아니, 핀들론 님께서 너한테 해준 얘기들이 기억나?”

“워낙 많아서 전부 다 기억하진 못해.”

“주로 무슨 얘기를 했어?”

가하란은 발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아침에 신문이 오면 할아버지랑 그걸 같이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어. 보통 할아버지가 기사 제목과 내용을 읽어준 다음 내가 모르는 걸 물어봤어.”

“골목과 신문이라.”

“여기서 신문을 보는 사람은 할아버지가 유일했어. 덕분에 나도 조금씩 글을 배웠고.”

“글이라면 어디서든 배울 수 있잖아. 폐하께서 전 국민이 글을 배울 수 있도록 간이학교를 설치했는데.”

“그런 게 있다는 건 들어봤어. 근데 막상 가기가 어렵더라고. 은근히 해야 할 일들이 많거든, 이 골목도.”

“그렇긴 해. 환경이 다르면 기회조차 평등하지 않으니까.”

얌전히 발을 붙이고 있던 밀레나도 서서히 발을 교차시켰다. 가하란은 그 행동을 보며 웃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아. 교정 내에서는 예법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흔들면 감점이야. 견학 기간에는 예법에서 자유롭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여. 그러니까 여기서라도 마음껏 해봐야지.”

귀족이라도 해서 모든 게 자유로운 건 아닌 듯싶었다.

“신문을 읽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만든 작은 텃밭을 가꿔. 그러면서 식물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 사람이 키우는 식물은 대체로 얌전하지만, 깊은 숲으로 들어가면 위험한 식물도 많다고.”

“위험한 식물이라. 나도 딱 한 번 본 적이 있지.”

“정말?”

밀레나가 발장구를 멈췄다.

“성도 스콜라에 있을 때였어. 교관님께서 귀중한 표본이 들어왔다면서 우리한테 그걸 보여줬지.”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