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담벼락에 올라가 골목 끝을 바라보았다. 해가 기울며 생겨난 그늘이 골목 초입에 드리워져 있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그곳을 지나쳤다. 고양이 한 쌍도 지나갔다. 처음 보는 또래 애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길목을 건넜다.
그늘이 짙어지고 하늘이 누르스름해졌다. 곧 어둠이 찾아올 터였다.
가하란은 담벼락에서 내려와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몇 번 두드린 후 다시 올라갔다.
“가하란!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와.”
건너편 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밖으로 몸을 내민 룽네 아줌마가 손짓하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조금만 더요.”
“밥은?”
“먹었어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아침부터 거기 계속 있었으면서.”
“배가 안 고파요. 정말이에요.”
룽네가 팔짱을 꼈다.
“음식 식기 전에 얼른 내려와.”
“이따가 먹을게요.”
“말 정말 안 듣네.”
“죄송해요.”
룽네가 툴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담벼락 밑에서 코를 박고 자던 툴이 벌떡 일어나 룽네 곁으로 뛰어갔다.
가하란은 룽네 집으로 들어가는 툴을 잠깐 지켜보다가, 다시 골목 초입으로 시선을 옮겼다.
온몸을 휘감은 조바심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골목 끝을 보게 된다.
오늘은 약속한 날이었다. 아빠가 돌아오는 날. 몸을 좌우로 까닥거렸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시침이 12시를 넘기기 전까지 계속 기다릴 것이다.
“거기서라도 먹어. 안 먹으면 혼날 줄 알아.”
룽네의 호통과 함께 툴이 촐랑촐랑 뛰어왔다. 주둥이에 바구니가 물려 있다.
가하란은 담벼락에서 내려왔다. 맞은편에서 지켜보고 있는 룽네에게 꾸벅 인사한 다음 덮개를 열었다.
저며서 볶아낸 고기와 채소. 옆에는 토르티야가 놓여 있었다.
“잘 싸서 먹어.”
룽네가 집으로 들어갔다. 가하란은 닫힌 문을 향해 다시금 인사를 올리고 바닥에 앉았다.
입맛이 없었는데 막상 음식이 눈에 들어오자 손부터 나갔다.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고 씹었다.
툴은 집에서 따로 먹고 왔는지 슬쩍 쳐다본 후에 바닥에 엎드렸다.
“이거 마시면서 먹어.”
불쑥 솟아난 잔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웰턴이 더 놀랐다는 듯이 움찔했다.
“나 온 줄도 몰랐어?”
“네.”
“그러니까 밥은 제때 챙겨 먹어야지. 내가 너 나이였을 때는 한 끼만 굶어도 눈이 돌아갔어.”
미소를 그려내던 웰턴이 넌지시 말했다.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어때?”
“괜찮아요. 아빠 곧 오실 테니까 여기서 기다릴래요.”
무언가 말하려던 웰턴이 이내 입을 다물고 잔을 재차 내밀었다. 찌그러진 철 잔을 쥐었다. 잔이 차가웠다. 여름밤 열기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시원하지?”
“네.”
마셔보라는 제스처에 한 모금 들이켰다. 달콤한 음료였다. 재료가 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달았다.
“가일 씨네 식료품점에 새로 들어온 거야.”
“비싸겠네요.”
“너 주라고 해서 받아온 거니까 가격은 생각하지 마.”
남은 음료수를 입에 털어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손바닥을 오목하게 만든 다음 거기에 음료수를 부었다.
“툴, 이거 마셔봐.”
다가온 툴이 냄새를 맡다가 혀를 길게 내밀어 음료를 핥았다. 입맛에 맞았는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가하란. 너도 알겠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갑자기 생길 수도 있어.”
웰턴이 넌지시 말했다.
“아빠는 오늘 온다고 약속했어요. 루카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고요.”
“그래그래, 그건 알지만.”
웰턴의 고개가 골목 입구로 향했다. 드문드문 사람이 지나다니던 골목 초입에 이젠 인기척조차 없었다.
“아저씨가 같이 기다려 줄까?”
웰턴이 담벼락을 가리켰다.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사실 내가 심심해서 그래.”
가볍게 뛰어 담벼락으로 올라간 웰턴이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옷소매에 손바닥을 쓱쓱 문지른 다음 웰턴의 손을 잡았다.
“근데 베베 혼자 내버려 둬도 돼요?”
틈만 나면 탈출하는 고양이였다. 야심한 밤, 홀로 남은 베베는 반드시 자유를 꿈꾸며 거리로 나설 것이다.
“걱정하지 마. 따끔하게 혼냈으니까.”
“저번에도 그러셨잖아요.”
“이번에는 진짜야. 그리고 또 도망친다 해도 네가 찾아줄 테니 걱정 없고.”
“저 너무 믿지 마세요.”
고양이 울음소리가 위쪽에서 들렸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웰턴네 집 창문에 고양이가 나와 있었다.
“아저씨!”
“괜찮아. 며칠 지켜봤는데 저기까지만 나가더라고.”
베베는 창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창틀에 몸을 붙였다. 웰턴의 말대로 이젠 안심해도 되는 걸까?
그때였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사뿐히 뛰어올랐다. 밤하늘을 가르는 회색 털 뭉치를 따라 눈동자가 움직였다.
동시에 웰턴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경악이 점점 번져간다.
“야!”
웰턴이 소리쳤다. 땅에 발을 디딘 베베가 무서운 속도로 골목을 질주했다.
웰턴이 담벼락에서 뛰어내는 순간에도 고양이는 속력을 더해 멀어져갔다.
아이구야, 가하란도 담벼락에서 내려와 뛰었다. 살이 토실토실 오른 놈이 어쩜 저렇게 날쌔고 유연한 걸까.
웰턴의 고함에 사람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잠시,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금방 문을 닫았다.
달리던 웰턴이 갑자기 멈춰 섰다. 벽처럼 막아선 웰턴의 등을 보며 가하란도 제동을 걸었다.
“아저씨, 왜….”
멈춰 선 이유를 끝까지 묻지 않았다. 대신 고양이를 낚아챈 채 오도카니 서 있는 밀레나를 바라봤다.
“이 고양이 주인이 여기 산다는 거, 거짓말이 아니었네.”
붙들린 베베가 애교를 부렸다. 마치 밀레나를 만나기 위해 뛰쳐나갔다는 듯이. 살갑게 우는 고양이를 몇 번 쓰다듬던 밀레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인이죠?”
목덜미가 붙들린 베베가 발버둥을 친다. 웰턴이 머뭇거리자 밀레나가 눈에 힘을 줬다.
“주인 아니에요?”
“마, 맞아요.”
고양이를 넘겨받은 웰턴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밀레나는 그런 태도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을 흘기며 가하란에게 걸어왔다.
“우선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 수업이 있어서 자유시간이 지금뿐이야.”
“네, 아니 응.”
어안이 벙벙했다. 야밤에 찾아온 귀족 아가씨. 또 보자는 가벼운 약속을 이렇게나 빨리 지킬 줄이야.
가하란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웰턴이 어깨를 툭툭 쳤기 때문이다.
“저번에 온 애 맞지?”
“네. 맞아요.”
“귀족?”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하지 그래요. 당사자 앞에 두고 그렇게 둘이서 얘기하는 거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에요.”
밀레나는 주변을 한번 훑은 후 이어서 말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 날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알아요. 그걸 불편하게 여기고 트집 잡을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경계하지 마요.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보면 내가 꼭 나쁜 사람 같잖아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당당한 귀족 아가씨의 말에 웰턴도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는 듯했다.
가하란은 이때다 싶었기에 지난 일을 꺼내 들었다.
“아저씨 고양이를 찾아준 친구예요. 그때 말했던.”
“그 애가 얘… 아니, 이분이셨어?”
웰턴은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이 늦었네요. 우리 애를 잡아줘서 고마워요.”
“걔가 멋대로 나한테 달려온 거예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웰턴 품에 안긴 베베가 밀레나 쪽으로 앞발을 뻗었다. 눈이 그렁그렁한 건 착각이겠지?
웰턴이 몸을 살짝 비틀며 고양이의 시선을 차단했다.
“가하란한테 볼일이 있는 거겠죠?”
“맞아요.”
슬며시 쳐다보는 웰턴에게 괜찮다는 뜻을 담아 턱을 당겼다. 웰턴이 턱을 들고 이 층을 바라봤다. 동시에 손을 들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골목 안에서 쓰이는 수신호였다.
괜찮으니 일들 봐요, 대충 이런 뜻이다.
어느새 내다보고 있던 어른들이 시선을 거두었다. 밀레나 얼굴을 익혀둔 탓인지 노려보는 어른은 없었다.
“이따가 보자.”
웰턴이 고양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이곳 사람들이 널 엄청나게 아끼네.”
“다 똑같아. 이웃이니까.”
“글쎄? 내가 아는 이웃들은 그렇지 않아서 말이야.”
머리카락을 살며시 털며 앞으로 나아가는 밀레나였다. 입고 있는 옷이 전번과는 달라졌다. 흰색 사자 문양도 안 보였고.
물론 비싼 옷임에는 다를 게 없겠지만.
“이 골목은 의외로 냄새가 안 나네.”
“청소에 신경 쓰고 있거든. 오물 정리도 순번을 정해서 꼬박꼬박하고 있고.”
“청결의 중요성을 아는구나.”
밀레나가 아, 하면서 가하란을 바라봤다.
“깔보는 듯한 말투였네. 어휘 선택을 잘못했어. 미안해.”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골목 어른들도 널 이유 없이 기피했으니까. 이런 게 선입견이라고 아빠가 알려줬어.”
밀레나가 작게 웃었다.
“그 사람들은 날 싫어할 이유가 있을 테니까 상관없어. 귀족에게 데인 사람이 많겠지.”
첫 만남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밀레나는 참 솔직했다. 정직한 말투라 공격적으로 들릴진 몰라도 성격이 삐뚤어진 건 아니었다.
길게 대화해 본 것도 아니고, 오래 만난 것도 아니라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항상 말해온 ‘거짓만 늘어놓는 귀족’과는 달라 보였다.
“일곱 시네.”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루카가 가지고 있던 회중시계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었다.
“시계 처음 봐?”
“아니. 근데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건 처음 봐. 새겨진 글자도 섬세하고.”
“이런 거에 관심 있어?”
“응.”
밀레나가 회중시계 끈을 둘둘 말더니 휙 던졌다. 가하란은 공중에 뜬 회중시계를 멍하니 보다가 얼른 손을 내밀었다. 하마터면 땅에 떨어질 뻔했다.
“비싼 거잖아.”
“귀하게 모셔두라고 받은 시계가 아니야.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흠집이 보일걸?”
밀레나 말대로 은은한 달빛에 비춰보니 여기저기 생채기가 보였다.
“훈련 때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시계거든. 스콜라 생도들은 다들 그 시계를 갖고 있어.”
“그렇구나.”
“그 시계가 깔끔하다는 건 불명예나 마찬가지야.”
시계 덮개를 살폈다. 거친 돌에 대고 긁은 것처럼 상처투성이였다. 흠집 하나하나가 고된 훈련의 증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멋있었다.
“멋있다.”
가하란은 속마음을 툭 꺼내놨다. 그 말을 들은 밀레나가 멀거니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뭘 좀 아네.”
시계를 잠깐 뜯어보다가 이내 밀레나가 온 목적을 생각했다. 이렇게 얘기만 하러 온 것이 아니리라.
떠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
“기록지 때문에 온 거지?”
“친구라 그런지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
친구. 가하란은 귀 뒤쪽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
“웰턴 아저씨한테 뭐라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친구라고 했어. 혹시 기분이 상했다면….”
“불편했으면 그 자리에서 정정해 달라고 요구했을 거야. 친구, 난 마음에 들어.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 친구. 난 이 말이 적당하다고 봐.”
밀레나가 턱을 슬며시 들며 골목을 살폈다.
“근데 툴은? 어디 갔어?”
“기록지만 보러 온 게 아니구나.”
“겸사겸사.”
가하란은 툴, 하고 작게 불렀다. 담벼락 뒤에 있던 툴이 휙 튀어나왔다.
“툴하고 놀고 있어. 기록지 가져올게.”
“천천히 해도 돼.”
가하란은 회중시계를 움켜쥐며 집으로 뛰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