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2화 (340/558)

제42화

누군가의 기침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강의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였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군요.”

멧시언이 말함과 동시에 마력선이 빛을 잃어갔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를 냈다. 밀레나도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경직된 목을 풀었다.

“그럼 누가 먼저….”

말꼬리를 흐리며 생도들을 훑는 멧시언이었다.

“답할 학생이 없나요? 찍어도 괜찮으니 도전해 봐요.”

안두카프의 단검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제멋대로 들썩이는 손을 이성으로 붙들었다.

“아무도 없나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데.”

뭐든 나서고 보는 율도, 잇속 챙기는 데 혈안인 미엔도, 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브리테도 이번만큼은 얌전히 있었다.

따로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든 손을 들어 멧시언이 내건 내기에 응할 수 있었다.

“정말 없나요?”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이 멧시언이 말했다. 밀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유사 정령을 보고 있으면 혹하는 마음에 손을 들 것 같았다.

“좋습니다. 내기는 없던 걸로 하죠.”

멧시언의 말이 허공에 흩어지고 나서야 밀레나는 아쉬움이 한껏 담긴 한숨을 내뿜었다.

“왜 가만히 있었냐. 찍기라도 해보지.”

“그러는 너는?”

“나야 뭐… 너랑 비슷한 이유지.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겠고.”

동기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멍한 눈으로 유사 정령을 보고 있을 때였다. 율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찍어볼걸!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안두카프 님의 작품이라고. 그걸 이렇게….”

“조용히 해. 나도 지금 후회돼서 미칠 지경이니까.”

“멋 부린다는 건 참 쓸모없는 일인데, 왜 그랬지?”

하나둘씩 현실로 돌아왔다.

맞는 말이었다. 운에 기대어 찍기라도 했으면 혹시 모를 성공이 찾아올 수도 있었는데, 아예 포기했으니 후회할 수밖에.

밀레나도 마른세수한 다음 뺨을 가볍게 쳤다.

“멧시언 님! 답을 알 수 있을까요?”

마력선의 빛이 곧 사라질 것처럼 연해졌다. 쇠막대기를 꺼내 든 멧시언이 유사 정령으로 걸어왔다.

“난 여러분이 이 오류를 찾아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보는 것만으로 마력선의 흐름을 알아낸다는 건 상식을 벗어난 일이기도 하고.”

상식 밖의 일을 총수는 해냈다는 건가. 밀레나는 25년 전 이곳에서 자신 있게 정답을 말했을 총수를 상상해 봤다.

“바로 이 지점이 설계 오류가 발생한 곳이에요.”

쇠막대기 끝을 자세히 바라봤다. 복잡하게 꼬인 마력선이 보였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별반 다를 게 없는 마력선이 그곳에도 있었다.

정답을 알고 봐도 이해되는 건 없었다. 명쾌하게 알 수 있을 거란 기대감조차 헛웃음 저편으로 사라졌다.

“뭐가 다른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미엔이 말했다.

“이번엔 도안을 같이 봐 볼까요?”

멧시언이 바닥에 도안을 펼쳤다.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도안에는 보는 것만으로 어지러워지는 선들이 집합해 있었다.

“속이 매스꺼워지네.”

“마찬가지야.”

동기들의 직설적인 감상평에 밀레나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유사 정령에 그려진 마력선보다 더 복잡한 것 같아요.”

로운이 도안과 유사 정령을 번갈아 봤다. 확실히 둘을 비교해보니 도안 쪽에 그려진 선이 훨씬 난해했다.

“그 이유를 알려주죠. 우선 이쪽을 볼까요?”

쇠막대기가 도안의 왼쪽 상단을 가리켰다.

“유사 정령에 그려진 마력선은 한 겹이 아니에요.”

“네?”

“총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1차 구조를 잡고, 그 위에 다시 2차, 마지막으로 3차 작업을 끝내야지만 유사 정령으로서 작동하는 겁니다.”

밀레나는 유사 정령의 표면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선이 층까지 이루고 있다는 건가? 포개진 선을 하나하나 떼어내 살핀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 다시 살펴보도록 할까요?”

멧시언이 쇠막대기로 유사 정령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표면에 그어진 선들이 한순간 떨어져 나왔다.

평면에 늘어져 있던 선들이 공간감을 갖췄다. 밀레나는 층별로 나뉜 선을 보며 감탄했다.

세심한 조작이었다. 마나라는 게 이렇게 섬세하게 움직이는 것이었구나.

“펼쳐보니 어떤가요? 이상한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까?”

동기들이 공중에 뜬 마력선 앞으로 모여들었다. 위에서부터 차분하게 선의 구조를 살폈으나,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멧시언의 쇠막대기가 다시 움직였다. 두 번째 층 우측 하단을 가리켰다.

“이 한 점. 여기가 오류의 원인입니다. 보기 쉽게 조금만 가동해 보죠.”

가동한다는 말과 동시에 마력선이 보랏빛으로 빛났다. 보유한 마나가 바닥이 났는지, 빛을 뿜어낸 유사 정령은 침묵 상태에 빠졌다.

밀레나는 마지막 순간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확실하게 보았다. 흐르던 마나가 멧시언이 알려준 지점에서 위아래로 번져나갔다.

마력선을 이탈한 마나는 금세 소실해 버렸다.

“방금 무엇이 문제였는지 본 학생?”

밀레나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뒤따라 미엔, 로운, 율, 브리테, 이리엘데가 손을 들었다.

“무얼 봤는지 말해봐요.”

“마력선에서 마나가 이탈했습니다.”

“다른 학생들도 같은 걸 봤나요?”

손을 든 동기들이 예, 라고 대답했다.

“이번 기수는 재능 있는 학생들이 꽤 많군요.”

멧시언이 유사 정령에 손을 얹었다.

“보지 못한 학생들도 대략 어떤 문제인지 감을 잡았을 겁니다. 이 유사 정령에 발생한 오류는 정말 사소한 오류예요. 그리고 그 사소한 오류 때문에 모든 기능이 정지하죠.”

선이 교차하며 만들어진 아주 작은 점. 뜯어놓고 살피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오류 때문에 오토마타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얼마나 섬세한 기계인가.

거병을 제작하는 공학자들의 손 기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무수히 겹쳐진 선 하나하나가 의미를 품고 있어요. 허투루 그려진 선은 단 하나도 없죠. 유사 정령의 마력선 원형은 그 자체로 완성된 예술품입니다. 우리는 단지 완벽한 조형물에 조심스럽게 살을 덧댈 뿐이에요.”

율이 손을 들었다.

“마력선 원형이란 건 ‘최초의 오토마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멧시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요. 제국은 물론, 연합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거병은 최초의 오토마타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어요. 원형에서 벗어난 거병은 단 한 기도 존재하지 않죠.”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 똑같다는 건가요?”

“맞아요. 각 국가와 제조시설에 따라 특색 있는 거병이 만들어졌지만, 결국 원형을 조금씩 비틀거나 보강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최초의 오토마타. 밀레나는 작년에 들었던 교양수업을 기억해냈다.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최초의 오토마타는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왔다고 하는데, 정확히 누가 만든 건지 궁금합니다.”

“질문에 답해주는 것이 내 소임이지만, 아쉽게도 그 질문의 답은 나도 모릅니다.”

거병제작 관련 최고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멧시언 소장이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걸까?

멧시언이 쇠막대기로 어깨를 툭툭 쳤다.

“여러 설이 있고 지금도 활발히 연구 중이에요. 최초의 오토마타, 그 제작자에 대해서. 하지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어쩌면 인간이 만든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른 종이 만들었을 수도 있나요?”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타 종족을 유사 인류라 비하하는 자들도 많지만, 머릿수가 많다고 해서 우수한 건 아니니까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에 의해 개발됐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죠.”

중앙 성당에서 이 발언을 들었다면 눈을 까뒤집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위험할 수도 있는 언사였지만, 그렇기에 밀레나는 마음에 들었다.

“타린족이나 오크족은 마법공학품에 조예가 없지만, 칼랑족과 바라라족은 인간만큼이나 마법공학에 열중이니까요. 어떤 분야는 우리보다 낫기도 하고.”

이름만 들어봤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종족들이었다.

타린족은 때가 되면 스콜라를 찾아온다고 하니 시기가 맞으면 볼 수 있지만, 다른 종족은 그림자조차 못 볼 확률이 높다.

“칼랑족 얘기나 나온 김에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주죠. 여러분은 조만간 칼랑족 엔지니어와 만나게 될 겁니다. 그 친구가 여러분들의 자질을 시험하게 될 거고요.”

“선생님!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율이 환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알다시피 지금 둔에는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요. 마무리되어가는 단계지만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남아 있죠.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즉시 만남이 성사될 겁니다.”

“남성분인가요, 여성분인가요?”

“그게 왜 궁금하죠?”

“선물을 준비하려고요! 저 예전부터 칼랑족을 만나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동화에서 자주 봤어요. 부들부들한 털을 가진 귀여운 늑대처럼 생겼다고.”

멧시언이 크게 웃었다.

“귀여운 늑대라. 외견만 보면 그렇긴 하죠. 하지만 본인 앞에서 그런 언행은 삼가는 게 좋을 겁니다. 칼랑의 후손들은 한번 적은 영원한 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관계가 틀어지면 어지간한 방법으론 되돌릴 수 없으니 주의하세요.”

율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율이 과연 참아낼 수 있을까?

밀레나는 율이 실수하지 않도록 잘 감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명의 실수 때문에 생도 전체에 불똥이 튀는 건 막아야 하니까.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율을 슬쩍 바라본다.

“마음을 얻어낸 다음에 외모를 칭찬하는 건 기쁘게 받아줄 겁니다. 사실, 귀엽다는 말을 꽤 좋아하기도 하고.”

밀레나는 그림으로 얼핏 본 칼랑족을 떠올렸다. 1미터 남짓한 키에 털로 뒤덮인 몸. 늑대와 흡사한 얼굴 형태를 가졌지만, 포악한 눈매 대신 장난기 어린 눈을 가진 종족.

그러다 문득 한 아이가 떠올랐다.

탁한 하늘색 눈동자. 호기심을 가득 담은 그 눈은 그림으로 본 칼랑족과 비슷했다.

가하란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랍파의 기록지가 생각났다. 만약 기록지를 남긴 랍파가 내가 생각하는 그분이라면….

다른 곳으로 흘러가던 생각의 물결이 멧시언의 음성에 가로막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유사 정령 역시 최초의 오토마타를 기반으로 제작된 겁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복사품을 만들어냈고, 그 과정에서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원형을 제거하진 못했어요.”

느릿한 숨을 내쉬며 유사 정령을 쓰다듬는 멧시언이었다.

“개발자는 언제나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데 집중합니다. 누구나 다 오리지널을 창조해내고 싶어 하죠. 나 역시 최초의 오토마타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체를 탄생시키려 했지만 실패했죠.”

넘지 못하는 벽. 그 앞에서 좌절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도전해 기어이 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멧시언은 분명 후자일 거라고 밀레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는 중입니다. 최초의 오토마타,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들춰내 공학자들이 다리 뻗고 잘 수 있게 만들어줄 친구를.”

멧시언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자, 잡설은 이쯤에서 끝내고 이제 수업을 이어가 보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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