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휴리우스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멧시언 앞에 놓았다.
“내 건 내가 가져다 먹으면 되는걸.”
“이럴 때는 아랫사람 부려 먹는 겁니다. 포도주는….”
“괜찮네. 술은 끊었으니까.”
휴리우스는 반쯤 들었던 포크를 다시 내려놓았다. 내일 전쟁이 발발한다고 해도 이보단 덜 놀라우리라.
“어디 편찮으신가요?”
“내가 금주를 선언한 뒤로 그 말을 참 지겹게 들었어. 내가 술을 끊은 게 그리도 놀랄 일인가?”
“놀랄 일이죠. 소장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놀라서 자빠질 겁니다.”
놀고 있던 포크를 움직여 미트볼을 찍었다.
“준 공께서 이 소식을 접한다면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릅니다.”
“성도로 돌아가면 그 친구한테도 꼭 전해주게. 술을 줄이라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포도주 반병을 비우실걸요.”
“그러고도 남을 친구지.”
멧시언이 셀러리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이번 기수 애들은 어떤가요? 소장님 눈에 들어오는 애가 있습니까?”
“공학도가 기사에 대해 뭘 알겠나.”
“매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소장님의 평가를 매우 신뢰합니다.”
“늙은이의 헛소리 때문에 평가가 달라진다면 학생들이 불쌍하지.”
“애석하게도 매 기수마다 소장님의 평가를 토대로 점수를 반영하고 있으니,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자넨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이 야박해져.”
휴리우스는 손을 내저었다.
“저 정도면 박애주의자죠. 파난 교관에 비하면 말이에요.”
“파난. 그래, 그 친구와 비교하면 자넨 참 순박한 교관이지.”
“그러니까요.”
스콜라 우등 교관 사이에서도 서열이 나뉘고, 그중 꼭대기에 서 있는 것이 파난 교관이다.
군부의 수장들도 어려워하는 인간인데 새파란 생도들한테는 별과 같은 존재겠지.
냉랭한 눈으로 훈련장을 내려다보던 파난 교관을 생각하니 몸이 살짝 떨렸다. 생도 시절에 파난 교관 덕에 겪었던 악몽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파난은 은퇴할 생각이 없다던가?”
“은퇴요? 아직도 정정하세요. 쉰이 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저번에 젊은 교관들이랑 교정을 같이 돌았는데, 두 바퀴 돌 때쯤 앞으로 뛰쳐나가더니 이렇게 말하더라니까요.”
휴리우스는 당시를 떠올리며 힘주어 말했다.
“‘지금부터 나한테 따라잡히는 교관은 생도들 훈련 후 따로 면담을 하겠다.’ 라고.”
“다들 죽기 살기로 뛰었겠군.”
“피 토하는 심정으로 뛰었겠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따라잡혀서 사이좋게 단체 면담을 했죠. 육체의 대화가 섞인 진득한 면담을.”
우등 교관이라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사이좋게 훈련장을 뒹굴었을 것이다.
“그 친구가 자리를 지키는 동안은 스콜라의 명성이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파난 교관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 벌써 눈치 싸움이 어찌나 심한지. 이러다 스콜라 내에서 항쟁이 나겠어요.”
“자네도 참가하는 건가? 그 싸움에?”
“제가요? 전 감투에 관심 없습니다. 게다가 파난 교관의 뒤를 잇는다는 건 명예직에 가까운데, 그 힘든 걸 왜 서로 하려고 난리인지 모르겠어요.”
“난 자네가 원한다면 자넬 추천할 생각도 있는데.”
휴리우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 말고도 훌륭한 교관들이 즐비합니다. 게네들이 알아서 할 거예요.”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말하게. 추천서를 적어서 성도로 보낼 테니까.”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잔에 든 포도주를 살짝 입에 머금었다. 향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유사 정령의 문제점, 그 애들이 찾아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겠지.”
“허스 같은 친구는 다시 안 나타나는 걸까요?”
휴리우스는 스콜라 생도 시절을 떠올렸다. 입학시험을 끝마치고 스콜라 교정에 모였을 때 바로 옆에 허스가 있었다.
다섯 살짜리 꼬맹이. 그때는 몰랐다. 그 친구가 만인의 칭송을 받는 제국 제일의 기사가 되리라고는.
“허스와 닮은 애가 또 나타난다라. 난 상상이 안 되는군.”
“그렇긴 하네요.”
“자네가 길러 내보는 건 어떤가? 허스 같은 아이를.”
“차라리 저보고 역사 속 드래곤을 찾아 잡아 오라고 하세요. 그게 실현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것도 옳은 말이군.”
멧시언이 물이 든 잔을 들었다.
“조용히 잠든 영웅을 위하여.”
조용히 잠든 영웅이라. 휴리우스는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전 아직도 믿기질 않아요.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를 이 두 눈으로 봤는데도 말이죠.”
“허스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황제께서 공표하셨는데 거기다 대고 그럴 리 없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요. 불경죄로 끌려가는 건 싫습니다.”
“불경죄가 아니라 역모겠지.”
“그렇게 되나요?”
아잔탄스 가가 한순간에 사라진 이유. 바로 허스를 차기 황제로 옹립하려다가 덜미를 잡혔기 때문이다.
아잔탄스 측이 단독으로 진행했을 리는 없다. 의회가 뜻을 모으고 최고 어른들이 힘을 실었을 것이다.
만약 허스가 살아 있었다면, 제국은 어떻게 됐을까?
“허스가 살아 있었다면 역천이 성공했을까요?”
“자넨 정말 역모죄로 끌려가고 싶나 보군.”
“다 끝났으니까 해보는 말입니다. 쉬쉬하고 있지만 다들 한 번씩은 생각해 봤을 테죠. 만약 총수가 갑작스러운 질환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성도의 주인은 누가 됐을까, 하고.”
멧시언이 손을 뻗었다. 빈 잔에 포도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살아 있었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테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황제가 아르드헨이니까. 허스는 아르드헨을 위해서라면 목을 내놨을 걸세. 애초에 실패할 역천이었다는 거지.”
“예전에 어떤 현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권력보다 무거운 우정은 없다고.”
“그럼 그 현인께서 틀린 모양이군. 자넨 허스와 동기였으면서 그 속을 들여다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휴리우스는 멋쩍게 웃었다.
“동기였다고 한들 오래 붙어 있진 않았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스콜라 최단 기간 졸업. 그 드높은 스콜라 입구 현판에 최연소로 이름을 새겨버린 천재니까요. 같이 진흙 바닥을 구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군부 장관급으로 가버렸죠.”
동기였지만 아득히 먼 존재이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대대급을 이끌다가 군부의 수장이 된 인간이니까.
“천재는 천재의 삶을 살고, 저 같은 일반인은 이런 삶을 사는 거죠. 천재의 속을 저 같은 게 어떻게 알까요. 오랫동안 알고 지냈어도 전 평생 모를 겁니다.”
“자넨 허스란 인간을 오해하고 있군.”
“잘 모르니까요. 오해할 수밖에요.”
열등감도, 시기심도 느낀 적이 없었다. 수준이란 알량한 단어로 격차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났으니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냥 우상이었다. 언젠가는 저렇게 될 거라는 어쭙잖은 다짐조차 허락지 않았던 하늘 위의 존재.
그렇기 때문일까.
대화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겉도는 얘기만 몇 번 했을 뿐이었다.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독하게 순진한 면이 있는 아이였어. 사랑에 진심인 아이기도 했고.”
“사랑이요? 사별한 부인을 애틋하게 사랑했나 보죠? 그러고 보니까 영웅의 사생활이 어땠는지 별로 들은 게 없네요. 이런 건 가십으로 신문에서 잘 다루던데.”
“철저하게 막았으니까. 무엇보다 참 재미없는 부부거든. 쓸 기삿거리가 없었지. 그래, 정말 재미없는 부부였어.”
과거를 되짚는 멧시언의 눈빛이 한없이 즐거워 보였다. 휴리우스는 다시 잔을 들었다.
“저세상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땐 터놓고 물어봐야겠네요. 무슨 생각 하며 살았는지.”
“둘 다 사이좋게 지옥에서 보겠군. 천국 갈 인생은 아닐 테니.”
“소장님도 같이 오셔야죠.”
멧시언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지옥 밑바닥에 내 자리가 마련돼 있겠지. 내가 만든 기계에 수천, 어쩌면 수만이 죽었을 테니까.”
“지옥의 파수견들이 모시러 오겠네요.”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휴리우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근데 술 끊으신 거 맞으시죠?”
“금주란 단어에 기간이 내포된 건 아니니까. 잠깐 마시고 또 끊으면 그게 금주 아니겠나?”
“완벽한 논리라서 반박도 못 하겠네요.”
시원하게 술을 들이켜는 멧시언이었다.
“아참, 거병기동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관리국에서 얘기 나온 게 있나요?”
국민의 사기 증진 및 연합왕국 대형 상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거병기동식이 준비 중이었다.
“일단 취소는 아니네. 9월 중순으로 잡은 것 같은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
“이번 건은 다 마무리됐으니 예정대로 진행하겠죠?”
군부에 붙들어둔 용의자들이 풀려났다고 들었다. 사건의 윤곽을 확실하게 잡아 정리했으며 마무리 단계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둔 내부에서는 잘 마무리 지었지. 자수한 진범 때문에 약간 골치가 아파지긴 했지만, 큰 틀은 바뀐 게 없으니까.”
“잘됐네요.”
“아니지. 아직 큰 산이 하나 남았네.”
“큰 산이요?”
“특수감찰단. 성도에 소식이 전해졌고 출발했다는 가정하에, 보름 정도면 둔에 들어오겠지.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고.”
휴리우스는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 친구들이 남아 있었네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들어올 그놈의 얼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군.”
싱글벙글. 휴리우스는 소문으로 들은 특수감찰단 단장의 모습을 그려내며 말했다.
“감찰단장을 잘 아시나 봅니다.”
“준, 그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으면 어느새 끼어들곤 했으니까.”
“소문대로 괴상한가요?”
“괴상? 하하하, 그건 너무 점잖은 표현이야.”
괴상하다는 말이 점잖을 정도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란 말인가.
“영리하지. 발상이 비상하고 행동은 민첩해. 인간의 근간을 파내는 그 눈은 가끔 소름 끼치기도 하지. 하지만 악인은 아니야. 그렇다고 선인이라고도 할 수 없지. 애초에 선악의 잣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준칙에 따라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관료. 소문대로 이런 이미지가 맞나 보네요.”
멧시언이 고개를 저었다.
“기준을 철저하게 지키지만 예외를 두기도 해. 근데 골치 아픈 건 다른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외 조항을 두는데, 그놈은 아니야. 다른 사건을 쫓기 위해 지금 문제를 유예하는 거지. 하여간 정상인은 아닐세.”
입이 텁텁해졌다면서 술을 더 따르는 멧시언이었다. 휴리우스는 창문을 바라봤다.
“그 사람이 둔에 도착하면 최대한 피해 다녀야겠네요.”
“안 보고 사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우니 그렇게 하게.”
복잡한 사건에 엮이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생도들 교육만으로 골머리를 앓는데, 미지의 감찰단장에게 시달린다면 인생이 괴로워질 테니까.
“생도들한테도 단단히 일러둬야겠네요. 감찰단은 피해 다니라고.”
“부딪칠 일은 없을 테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얌전히 있으라고 가르치게. 스콜라의 도전 정신이 발휘되면 여러모로 피곤해질 테니까.”
“갑자기 불안해지네요.”
“한 번 정도는 휘둘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인생 경험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포도주 한 병을 다 비워낸 멧시언이 기분 좋게 웃으며 일어섰다.
“돌아가서 학생들을 봐야겠네.”
“취한 건 아니시죠?”
“나나 준이나, 술 마시고 티 안 나게 강의하는 거에 도가 텄네.”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멧시언이었다. 휴리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