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0화 (338/558)

제40화

눈이 뻐근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하반기 강화훈련 때조차 이 정도로 열정적이지 않았다.

밀레나는 손바닥을 재빨리 비빈 후 눈두덩에 댔다. 뜨듯한 열기에 눈의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뭐 좀 보이냐?”

“보이지. 선. 그리고 선.”

“찾아낼 수 있는 건가?”

유사 정령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동기들도 조금 지쳤는지 한숨 돌리고 있었다.

“요번 기수는 끈기가 있네.”

“교관들 사이에서도 악바리라고 소문났습니다.”

멧시언과 휴리우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를 즐기고 있었다. 약간 시큼한 차향에 입맛이 다셔진다.

“어떤가요? 어디가 잘못됐는지 찾았나요?”

멧시언이 물었다. 시원스레 대답하는 동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점심시간도 되어가니 다들 점심 먹고 이어서 하죠. 답을 찾아낸 사람은 도중에 나한테 말해도 됩니다.”

“오늘 중으로 찾아내면 되는 건가요?”

미엔이 시뻘게진 눈으로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찾아낼 때까지 무기한 연장해주고 싶지만, 앞으로 두 시간 정도면 답을 찾고 싶어도 못 찾게 될 겁니다.”

멧시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사 정령 옆으로 걸어왔다. 길목에 앉아 있던 동기들이 재빨리 비켜섰다.

“보세요. 마력선의 선명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죠?”

멧시언의 지적대로 마력선의 푸른빛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마법사들이 주입한 마나가 곧 휘발돼 사라질 겁니다. 마나가 완전히 증발하고 나면 각인된 선들도 자취를 감추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돈이 걸려있었다면 이쯤에서 포기하고 찍었을 것이다. 혈통 좋은 말이 상품이었다면 30분 정도 더 찾아보다가 운에 맡겼을 테고.

하지만 내기에 걸린 상품이 안두카프의 작품이었다. ‘고요공방’의 장인이 담금질한 검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매겨져 있다.

검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조차 탐내는 게 장인의 작품인데, 검에 목숨을 건 인간이라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얘들아. 좀 모여봐.”

미엔이 말했다. 본토 귀족 애들은 곧바로 반응했지만, 신흥 귀족과 시민 쪽 동기들은 흘겨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거기 두 곳도 잠깐 모여보지?”

“훈련도 아닌데 모일 이유가 있나?”

“그러지 말고. 나도 너 마음에 안 들고 너 역시 마찬가지인 건 아는데, 지금은 머리를 맞댈 시간이야. 훈련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게 걸려 있잖아.”

미엔이 두 번이나 권하자 브리테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왔다. 신흥 귀족을 이끄는 이리엘데도 곁으로 왔다.

밀레나는 미엔이 무슨 짓을 하든 별 관심이 없었기에, 유사 정령에 집중했다.

“밀레나는….”

미엔이 중얼거렸다.

“귀는 열어둘게.”

“그거면 됐어. 자, 여기에 걸린 상품이 안두카프 님의 작품이야. 이걸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돼. 동의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야지.”

대꾸한 건 율이었다. 밀레나는 동기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눈으로 마력선을 훑었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상품을 얻어내는 데 집중하자.”

미엔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리엘데가 말했다.

“구역을 나눠서 겹치지 않게 찍어 보자는 거지?”

언제 들어도 귀가 즐거워지는 목소리였다. 제국 제일가는 프리마 돈나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았다.

“뻔한 방법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해. 남은 시간 동안 각자 최대한 노력해 보고, 마지막에는 협업해서 확률을 높이는 거야.”

“유사 정령의 크기를 봐. 무작위로 한 점을 찍어냈을 때 정답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브리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멧시언 공께서 지난 25년간 실패했다고 하니 우리가 성공할 확률은 낮겠지.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지난 모의 전투에서도 내 말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지?”

뒤쪽에 눈이 달린 게 아니라 동기들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브리테가 짓고 있을 표정은 예상됐다.

똥통에 떨어진 금화를 줍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 비슷한 얼굴이 되리라.

“협력하는 것도 좋지만 그 방법으로 성공한 사례는 없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멧시언이 말했다.

“그 말씀은 저희끼리 작전을 짜도 괜찮다는 뜻이겠네요?”

“방법에 제약을 둔 적은 없으니까요.”

“실력으로 찾아보고 안 되면 운에 걸어 보겠습니다. 다행히도 저희한테는 운이 좋은 친구가 있거든요.”

뒤통수가 따가웠다. 밀레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미엔을 비롯한 동기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운이 좋다고?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교관님! 식사를 여기서 해결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교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로운이 움직였다. 식당 조리장한테 샌드위치를 부탁하겠다면서.

밀레나는 마력선에서 잠깐 눈을 뗐다. 복잡한 선을 계속 보고 있으니 망막에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일렁거렸다.

“육안으로 잡아내는 건 아마 어려울 겁니다.”

멧시언이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소장님. 질문이 있습니다.”

밀레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뭔가요?”

“육안으로 찾기 어렵다는 건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맞아요. 도구를 써야 하죠. 제작에 쓰인 도안과 마나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접안경이 있다면 찾아낼 수 있어요. 이 또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애초에 발상이 틀렸다는 건가. 멧시언은 방법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도구를 빌려 살펴본다면 찾아낼 수 있으리라.

“참고로 나는 6시간을 들여 이 유사 정령의 오류를 찾아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도안을 짚어가며 표면을 훑어야 했거든요.”

지면에서 반쯤 떨어졌던 엉덩이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구가 손에 들어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거병 제작의 대가가 6시간 걸린 일이다. 티끌만 한 지식조차 없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걸릴까?

다른 동기들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불량을 찾아냈다는 스콜라 생도가 운이 좋았던 거네요.”

행운의 신이 그 자리에 강림했던 게 아닐까. 자력으로 찾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집중력이 무너졌다. 붉은빛을 내는 쇳덩어리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그 생도는 도구를 사용한 것도, 운이 좋아서 오류를 찾아낸 것도 아니었어요.”

멧시언이 말했다.

밀레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면 저희 선배는 어떻게 찾아낸 거죠?”

주변이 조용해졌다. 동기들도 관찰을 멈추고 멧시언을 바라봤다.

“그날 있었던 일을 보여줄까요?”

멧시언이 검지를 세우더니 유사 정령의 한 부분을 콕 집었다.

“그 생도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어긋난 마력선을 가리켰어요. 그게 다였어요. 그 생도는 정답을 맞혔고 안두카프의 검을 받아 갔죠.”

멧시언이 손가락을 거두었다.

“나도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어요. 재수가 정말 좋은 학생이라 여겼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그 아이 눈에는 보였던 거죠.”

“보이다니요?”

“마력선에 흐르는 마나와 그 구조가 보였던 겁니다. 그 아이는 공학지식을 갖추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어긋난 마력선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예상해냈죠. 마치 원리를 아는 것처럼 말이에요.”

멧시언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상냥한 웃음에 포개져 있는 슬픔과 그리움을 밀레나는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그 선배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브리테가 입을 열었다. 멧시언이 주억거리며 말했다.

“여러분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에요. 허스 벨루 산트.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내 오랜 제자이자 친구죠.”

정적이 찾아들었다. 멧시언은 이따가 보자면서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교관이 그 뒤를 따르며 한마디 남겼다.

“배는 채우고 해라. 결식은 감점이다.”

강의실 문이 닫혔다.

밀레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사 정령을 만졌다. 징글징글한 쇳덩이가 갑자기 경이로워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의 전투를 앞뒀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고양감이었다.

동기들도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시선으로 유사 정령을 응시했다.

“총수께서 이 문제의 답을 풀었다는 거지?”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그분이 맞겠지.”

“25년간 아무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푸셨다라.”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경지인 건가?”

다들 한마디씩 꺼냈다.

숨을 거두어 이제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이름이건만, 아직도 그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이 번쩍 뜨였다. 피곤함도 저 멀리 사라졌다. 시간이 아깝다는 초조함과 함께 다시금 집중력이 돌아왔다.

“미안한데 난 혼자 할게.”

안두카프의 검은 놓칠 수 없는 보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문제가 총수가 홀로 해결한 문제였다.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만, 도전 욕구가 샘솟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오래된 과거지만 한순간만이라도 그분과 같은 시선으로 같은 문제를 바라본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었다.

협력해서 찍고 상품을 받는다?

총수의 이름이 나온 이상 그런 멋없는 짓은 사양하고 싶다.

“나도 혼자 찾아볼래.”

“마찬가지야.”

협력을 제안했던 미엔조차 유사 정령 앞에 앉아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다들 같은 심정이리라.

“어떻게 찍을지 얘기 끝났어?”

뒤늦게 돌아온 로운이 샌드위치가 든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눈을 크게 뜨고 유사 정령을 바라볼 뿐이었다.

로운이 머뭇거리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단짝인 미엔조차 입 다물고 있으니 난감할 테지.

밀레나는 로운에게 손짓했다.

“다들 왜 이래?”

“각자 문제를 풀기로 했어. 협력은 없는 걸로.”

“또 자존심 싸움 한 거야?”

“자존심. 어찌 보면 자존심이지. 25년 전 유사 정령의 오류를 한눈에 찾아낸 분이 허스 경이래.”

순진한 얼굴로 갸웃거리던 로운도 점차 날선 눈빛으로 바뀌어갔다.

“총수께서 이걸 푸셨어?”

“그래. 우리가 왜 협동을 포기했는지 이해됐지?”

밀레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시간을 들여 설명한 대가를 받을 때였다.

로운이 종이로 감싼 샌드위치를 줬다. 밀레나는 크게 입을 벌려 빵을 씹었다. 결식은 감점. 그 말을 되뇌면서.

“반드시 찾아낼 거야.”

로운이 자기 몫으로 샌드위치 하나를 챙긴 다음 바구니를 뒤로 밀었다.

동기들이 천천히 움직여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샌드위치에 손을 뻗는 동안에도 시선은 유사 정령에 닿아 있었다.

“총수께선 여기서 뭘 본 걸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걸 봤겠지.”

밀레나는 샌드위치를 씹으며 생각했다.

스콜라 입학시험 때 먼발치에서 제국의 영웅을 본 적이 있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 달리 제국기사의 총수는 괴물이 아니었다.

이야기로는 키가 3미터에 달하고 팔은 나무 밑동보다 두꺼워서 말도 어깨에 이고 다닌다고 했는데, 직접 본 총수는 적당한 키의 평범한 체구였다.

어떻게 생겼을까.

가까이서 보고 싶었으나 총수 곁에는 아무나 설 수 없었다.

언젠가 실물을 뵙고 인사를 올리겠다는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크다면 큰 꿈을 가졌는데…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됐다.

“단 한 번만이라도 총수께서 봤던 것과 같은 걸 보고 싶어.”

밀레나는 다짐하듯이 말했다.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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