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8화 (336/558)

제38화

“거병은 압도적인 위용과 다르게 굉장히 섬세한 병기다. 오버홀을 제때 하지 않으면 운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을 많이 타는 병기지.”

휴리우스 교관이 손가락으로 로운을 가리켰다. 지목당한 로운이 바짝 긴장하는 게 보였다.

“로운.”

“네, 네!”

“지목할 때마다 그렇게 바짝 어는 이유가 뭐냐?”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 모를 건데?”

“최대한 고쳐 보겠습니다!”

“대답은 항상 시원하네. 로운, 거병의 오버홀 주기는 어떻게 되지?”

로운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며 말했다.

“원칙적으론 6개월에 한 번입니다.”

“예외 사항은?”

“운용시간이 500시간을 넘었을 경우입니다.”

“기억력은 좋군. 예전에 딱 한 번 말한 거 같은데.”

로운이 한숨 돌리며 멀건 웃음을 지었다.

“수십, 수백 번을 강조했듯 거병은 돈 먹는 괴물이다. 가동하지 않을 때 가장 효율적인 병기지. 제국과 연합왕국, 두 곳 모두 거병의 운용비용을 줄이려고 사투를 벌였다. 소리 없는 전쟁이 백여 년 이상 지속된 거다.”

휴리우스가 바깥에 대기 중인 사람에게 눈짓을 줬다. 큼지막한 카트를 남자 두 명이 밀면서 등장했다.

카트에는 천으로 덮인 물건이 실려 있었는데 부피가 상당했다.

“오늘 너희들한테 귀중한 시간을 내어 설명해주실 분을 모셨다. 흔치 않은 기회니까 귀담아듣도록.”

교관이 직접 움직여 강의실 왼쪽 문을 열었다.

“준비됐습니다.”

휴리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강연대 앞에 선 건 선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짧게 깎인 백발 밑으로 인자한 눈과 살가운 입매가 자리 잡았다. 구부정한 허리를 툭툭 치며 앓는 소리를 내던 노인이, 이내 허리를 쭉 폈다.

체구가 작지만 희한하게도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건장하다 못해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푼 교관 옆에 있는데도 말이다.

밀레나는 호기심을 담아 노인을 보았다. 스콜라 교관이 깍듯하게 모시는 사람이라.

“반갑군요.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을 이렇게 직접 보니 참 좋습니다.”

인상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예정대로라면 관리국에서 준비한 행사를 치렀어야 하는데, 이런저런 일 때문에 다 취소가 됐네요. 아쉬울 따름입니다.”

허허, 느긋한 웃음을 흘리는 노인이었다.

“여러분들이 둔에 온 지 며칠이나 됐죠?”

“정확히 23일째입니다.”

미엔이 대답했다.

“지금 대답한 생도의 이름이….”

“미엔 샨 솔리안입니다.”

“솔리안 가의 자제군요. 로버트는 여전히 활 쏘는 걸 좋아하나요?”

로버트란 이름에 미엔이 바짝 얼었다. 로버트는 현 솔리안 가의 가주였다. 미엔의 아버지를 저리 쉽게 부른다는 건….

밀레나는 노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애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사냥을 여전히 좋아하시지만, 최근에 발목을 다치셔서 쉬고 계십니다.”

“저런. 본가로 돌아가게 되면 안부를 전해줘요.”

“알겠습니다, 멧시언 님.”

미엔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밀레나도 노인이 멧시언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세상에, 마에스트로 멧시언이라니.

휴리우스 교관이 왜 갑자기 따분한 강의를 시작했는지 이해가 됐다. 멧시언을 위해 자리를 만든 것이다.

“저는 멧시언이고 이곳 둔에서 거병을 다듬고 있죠. 여러분 같은 훌륭한 기사들이 다치지 않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입니다.”

듣고 있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말이었다. 괜히 입 안이 말랐다. 자리가 불편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밀레나는 곁눈질로 동기들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다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명인이 햇병아리들을 다독여 주었다. 이 얼마나 감사하면서도 초조해지는 일인가.

밀레나는 허리를 펴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서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선배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 애들 긴장해서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교관이 말했다.

“스콜라 생도들이 설마 그러겠나? 자네가 어중간하게 가르쳤을 리도 없는데.”

나직하게 웃던 멧시언이 뒷짐을 지고 카트 앞에 섰다.

“나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넘어가도록 하고, 일단 다들 앞으로 나와 보세요.”

동기들이 동시에 일어나 멧시언 앞에 섰다. 뒷짐을 지고 공경의 뜻을 담아 멧시언을 응시했다.

“눈빛들이 좋군요. 스콜라의 생도들은 언제나 활기차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멧시언이 천 끝자락을 잡았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 다들 들어본 말이죠?”

천이 거둬졌다. 숨겨졌던 물건이 정체를 드러냈다.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쇳덩이였다.

몇몇 동기는 눈앞에 놓인 반구형 물체가 무엇인지 아는 눈치였다.

“이게 뭔지 아는 학생 있나요?”

멧시언이 말했다. 미엔, 브엘라, 율이 차례대로 손을 들었다.

밀레나는 옆과 뒤를 살폈다. 파벌이 다른 신흥 귀족과 자유 시민 동기들 중에서 손든 사람은 없었다.

“학생. 이름이?”

율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게 무엇인지 동기들에게 설명해 볼까요?”

“거병의 핵심 모듈 중 하나인 오토마타입니다.”

“맞아요.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토마타의 주요 부품인 인지통합 유도장치입니다. 쓸데없이 이름이 길죠? 그래서 우리끼린 이렇게 부르죠.”

멧시언이 쇳덩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유사 정령’이라고.”

붉은빛이 감도는 쇳덩이가 아주 잠깐 진동했다. 밀레나는 쇳덩이, 유사 정령의 표면을 자세히 살폈다.

연마한 도검처럼 겉이 매끈하지 않았다. 미세한 홈이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마치 사람의 손바닥 같았다. 아니, 인간의 뇌인가?

무수히 많은 실선이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이리저리 뻗어나간 형태.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밀레나는 살짝 비틀거리다가 이런 증상을 겪는 게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란히 선 동기 중 몇몇이 머리에 손을 대고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나에 민감한 학생들이 많군요. 과연 스콜라에서 키워낸 재목들답네요.”

멧시언이 미엔을 바라봤다.

“거병은 여러분이 탑승해서 직접 조종하는 병기죠?”

“그렇습니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판단하는 건 여러분일 텐데, 왜 오토마타라는 마법공학품이 필요할까요?”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수업 때 들은 내용이 있습니다.”

“뭔가요?”

“자신의 신체가 아닌 강철로 이뤄진 육신을 다뤄야 함에 있어 수많은 제한이 따르는데, 그걸 해결해주는 것이 오토마타라 들었습니다.”

“내가 설명할 게 따로 없겠네요. 정말 다들 똑똑해요.”

“아닙니다! 멧시언 님께 더 배우고 싶습니다!”

우렁찬 대답이었다. 멧시언은 장난스럽게 웃은 후 쇳덩이를 가리켰다.

“이 유사 정령에 외골격을 덧씌우고 여러 가지 마법공학적 처리를 끝내야지만 비로소 오토마타가 완성돼요. 유사 정령을 어렵게 풀어쓰면 뭐라고 했죠?”

눈길을 받은 밀레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인지통합 유도장치입니다.”

“기억력이 좋네요. 그러면 오토마타는 뭐라고 부르던가요?”

“운동지각 보조장치입니다.”

“그래요. 길게 풀어쓰면 해당 물건이 어떻게 쓰이는지 대충 알게 되죠.”

멧시언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스무 명에 가까운 동기들이 강연대 옆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시선은 죄다 유사 정령에게 향했다.

“여러분은 거병의 조종실을 본 적이 있나요?”

멧이언의 물음에 다들 침묵했다.

“없나 보네요. 그러면 상상해 볼까요? 어떻게 생겼을 거 같나요? 밀레나 학생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밀레나는 막연히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를 채택했다.

“범선의 방향타처럼 생긴 물건이 앞에 놓여 있고 그걸 이리저리 굴려서 운전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방향은 정할 수 있겠군요. 그러면 앞으로 갈 때는 어떻게 할까요?”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레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레버를 밀기만 하면 좌족과 우족이 번갈아 가며 움직이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멋진 의견이네요. 공학도들은 복잡한 체계를 단순화하는 것에 미쳐 있죠. 나도 언젠가 밀레나 학생의 말대로 거병의 조정법을 단순화하고 싶네요.”

아무래도 정답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 것 같다. 밀레나는 아쉬움을 감춘 채 멧시언의 설명을 기다렸다.

“인지통합. 거병을 움직이는 여러 체계가 있지만, 결국 이 한 단어로 귀결돼요. 거병은 기계장치를 조작해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부수적인 동작이 필요하긴 하지만, 결론은 이거예요.”

멧시언이 검지로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쳤다.

“의지가 곧 행동으로 변화한다. 물리적인 조종 장치를 통한 제어도 예전에 연구해 봤지만, 구조적 한계점에 부딪혀 포기했어요. 만약 걷기 위해 수십 개의 레버를 조종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그걸 효율적이라 생각할까요?”

상상해 봤다.

눈앞에 놓인 수많은 막대기를 분주하게 밀고 당기는 모습을. 얼마나 번잡스러운지 금방 알게 됐다.

“질문이 있습니다.”

미엔이었다.

“하세요.”

“걷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정말 예리한 질문이네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고요. 우리 신체는 너무나도 쉽게 걸을 수 있죠. 그래서 걷는 것의 위대함을 잘 몰라요. 동시에 인간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근육과 뼈, 신경 기관이 얼마나 내밀한 협력 과정을 거치는지도 모르죠.”

멧시언이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강연대 주변을 돌아다녔다. 생도들은 조용히 그 걸음을 주시했다.

“일단 내가 오른발을 들어 볼게요. 무게가 어디로 쏠리죠?”

“왼발입니다.”

“이때 어깨는 어떤가요?”

“기울었습니다.”

“척추는요?”

“마찬가지로 휘었습니다.”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신체는 한 덩어리면서 동시에 여러 조각의 군집이었다.

오른발을 지면에서 떼는 단순한 동작조차 하나하나 분류해서 보니 복잡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었다.

“족지골부터 두개골까지. 이 모든 것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레버를 만들고, 거기에 수축과 이완을 담당하는 근육까지 조작해야 한다면….”

멧시언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거병은 전략병기가 아니라 전시품이 되었겠죠. 안 그런가요?”

“그래서 마법공학의 도움이 필요한 거군요.”

율이 눈을 깜빡이며 말을 꺼냈다.

“마법공학, 인지통합, 오토마타. 이게 없었다면 거병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죠. 그렇기에 마나가 필연적으로 사용되고, 그렇기에 마나에 민감한 사람, 그중에서도 첨예한 감각을 지닌 자들만이 거병 기사가 될 수 있는 거고요.”

멧시언이 생도들을 천천히 훑었다.

“바로 여러분 같은 사람이 거병을 이끄는 겁니다.”

거병 기사.

밀레나는 속에서 불꽃이 튀는 걸 느꼈다. 거병 기사는 변함없는 따분한 세상 속에서 몇 안 되는 흥밋거리였다.

“거병 기사가 꿈인 학생이 있나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생도 전원이 손을 들었다.

“도전 정신이 좋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중에서 기사의 소질을 지닌 사람은 몇 없을 겁니다. 오늘은 간단하게나마 그걸 알아보도록 하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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