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7화 (335/558)

제37화

헌트는 싸늘하게 식는 속마음을 감추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자네도 욕심을 크게 갖게. 내가 잘 이끌어줄 테니까.”

유렐이 밑으로 내려갔다. 헌트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약속의 날’이 오면 저런 것들도 사라지는 거겠지?”

빗소리에 파묻힐 정도로 작게 말했다. 오늘 이 대화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헌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약속의 날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헌트는 반쯤 남은 담배를 난간 밖으로 던져버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도 1년 후엔 바뀌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죽은 친구와 재회해 반갑게 웃으리라.

비를 맞으며 걸었다. 군복이 푹 젖으며 점점 무거워졌다.

헌트가 걸음을 멈춘 건 작은 요리점 앞이었다. 둔에 수십 개는 있을 흔하디흔한 음식점.

가게로 들어가 오늘의 특선 요리를 시켰다. 특선이라고 해봤자 튀긴 고기가 한 덩이 더 올라가는 것뿐이지만.

식사를 절반쯤 끝냈을 때 청재킷을 입은 청년이 가게로 들어섰다. 청년은 요란스레 재채기하며 음식을 주문했다.

“비가 엄청 오네요.”

“그러게요.”

가게 주인과 인사를 나눈 청년이 다리를 꼬며 크게 하품했다. 헌트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계산해 주시죠.”

바 너머에 있던 주인이 다가와 음식 가격을 알려줬다. 헌트는 돈을 내고 청년 옆을 지나쳐 가게를 빠져나왔다.

예정대로 전령이 왔다. 청재킷 남자가 누구인지 헌트는 알지 못했다. 넘겨준 편지를 갖고 누구에게 갈지도 알지 못했다.

아마 청재킷 또한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무지 속에서 단 하나의 빛을 바라보고 전진하겠지.

청재킷이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말도 섞지 않고, 눈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만난 사이.

아주 잠깐 호기심이, 충동이 들기도 했다. 이대로 청재킷을 미행하면 선견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헌트는 망설임을 거두고 군부로 돌아갔다. 톱니바퀴가 제멋대로 움직이면 기계는 고장 날 터였다.

모두가 약속의 날을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나도, 그 청년도 마찬가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내다 본 선견자는 누군가가 실수할 것까지 예상해서 일을 설계했을까?

인간의 변덕마저 예측하고 통제범위 안에 넣었다면, 선견자는 그야말로 신일 것이다.

아니, 선견자는 신이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자가 인간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건 난센스니까.

둔뿐만 아니라 성도, 제국 곳곳에서 얼굴을 모르는 동지들이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서로를 알아보진 못하지만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인다는 절대적 사실이 압도적인 동질감을 만들어냈다.

젖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수한 동지 역시 맡은 임무를 수행한 것이리라. 톱니바퀴는 개별적으로 쓸모없으나, 모이면 운명의 시계를 굴릴 수 있게 된다.

앞으로 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모할지 헌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리고, 마침내 그때가 오면 환희에 찬 탄성을 내지를 것이다.

수많은 목숨이 피안 저편으로 사라지겠지만, 약속의 날이 찾아오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터였다.

“소통의 문제가 사라지는 세계.”

되뇌는 것만으로 전율이 찾아오는 문장이었다. 헌트는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점검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유렐은 손금을 내려다보았다. 민간신앙에 의하면 손바닥을 길게 가로지르는 두 개의 손금은 각각 권력과 수명을 나타낸다고 했다.

길면 길수록 좋다고 하다지?

유렐은 흐뭇하게 웃었다. 권력을 상징하는 아래 손금이 길게 뻗어 손바닥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헌트 이등중사. 간을 보는 건가.”

뜬금없는 연락에 뜬금없는 제휴였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독립2군의 엘리트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고.

적당히 이용하고 적당히 버리는 게 군부 내 파벌 싸움이었다. 그러니 속내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속고 속이는 이전투구 속에서 진심을 찾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끈끈한 우정과 기특한 충성심 같은 건 이제 연극에서조차 진부한 내용이니까.

개인 집무실로 돌아온 유렐은 헌트의 인적 사항을 들춰봤다. 관리자급이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정보.

“평탄하군.”

드러난 정보로는 모난 곳 없는 훌륭한 군인이었다. 자유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고, 군부 내에서도 높은 임무 수행률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과연 엘리트라 할 수 있는 독립2군의 부대장이었다.

유렐은 서랍에서 사탕 한 알을 챙긴 다음 옆방으로 넘어갔다. 의자에 기대 졸고 있던 로우웰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웬일이야.”

피곤한 목소리로 맞이하는 로우웰이었다.

“뭐 좀 물으러 왔지.”

사탕을 던졌다. 로우웰이 반가운 눈초리를 하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독립2군 애들 좀 아나?”

“독립2군? 거긴 왜?”

“이유야 이것저것 있지.”

“요즘 사령관하고 독대하더니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긴 모양이야?”

“그런 거 아니야.”

로우웰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 뭐가 궁금한데?”

“2군 애들 중에 센터라인에 속한 애들이 있던가?”

“우리 쪽에 발 걸친 애가 몇 명 있긴 하지.”

대답이 멈췄다. 유렐은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도자기에 관한 서적이었다.

“최근에 멋진 화병이 하나 들어왔는데, 내 집에 자리가 없어서 말이야.”

“자네 품에 들어갔던 도자기라면 아주 괜찮은 물건이겠네.”

로우웰이 관심을 보였다. 줄다리기는 끝난 것 같으니 책을 제자리에 두고 재차 질문했다.

“센터라인에 누가 속해 있지?”

“콜슨, 효엘레, 부아나, 유러엘러. 이렇게 네 명. 왜? 자네 쪽으로 데려가 보게?”

유렐은 빙긋 웃기만 했다.

“쉽지 않을걸. 수석부관을 거쳐 잘하면 사령관에게도 닿을 수 있는 파벌이니까.”

“지게일은 어때?”

“그 친구는 서북모임에 흥미를 보이고 있지. 가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헌트는?”

“조용한 친구지. 여기저기서 자리를 권하는데 참가한 적은 없을 거야. 확실하게 끌어줄 만한 사람을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지금 자리에 만족하는 건지 알 수 없어.”

“곤틴, 그 친구는 어때?”

왼발을 슬쩍 내밀며 물었다. 로우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 친구를 노리고 있구만? 곤틴, 괜찮은 친구지.”

“노린다니. 난 그냥 우리 자랑스러운 동료들의 뒷이야기를 조금 알고 싶을 뿐이야.”

“그렇다고 치고. 곤틴이야말로 손을 내밀기에 가장 적합한 친구지. 이런저런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고 있어. 센터에서도 제법 관심을 보이고 있고.”

“늦으면 다른 사람이 채가겠군.”

“젊은 인재는 누구나 다 원하는 법이니까. 그보다 화병 크기는 어때?”

유렐은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화병? 무슨 화병?”

“독립2군 꼬마들한테 자네 조심하라고 언질을 주어야 선물이 도착하려나?”

“이 친구, 농담도 못 하게 하네. 잘 포장해서 보낼 테니까 애장품에 넣어둬. 꽃도 예쁘게 꽂아. 마음에 들면 나중에 다른 얘기도 해주고.”

문을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방을 나왔다.

어느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라, 유렐은 마주 오는 군관의 경례를 받으며 생각했다.

정말로 돈이 목적인 걸까, 아니면 다른 사주를 받고 접근한 걸까. 목적을 알아내는 편이 서로 이용하기 편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모르는 만큼 거리를 두면 되니까.

유렐은 콧노래를 부르며 B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벽에 기대라는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저녁은 아직 멀었을 텐데, 올란트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벽에 붙었다.

“자넨 나가 보게.”

“알겠습니다.”

경례를 마친 군인이 문을 닫으며 나갔다. 올란트는 앞에 선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흔 중반의 군관.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이 남자를 올란트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날 기억합니까?”

“기억합니다.”

취조부장 유렐. 지하에서 대질 조사를 받을 때 마주쳤었다.

“여기 생활은 어떻습니까?”

“지하보단 좋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요?”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유렐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관리자가 무슨 이유로 여길 방문했을까. 새로운 정황이 나온 걸까? 간부급이 직접 찾아올 정도면 예삿일은 아닐 터였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문제가 생겨서 온 건 아니니.”

“그럼 더욱 이상하군요. 아무 문제도 없는데 여길 찾아오셨으니까요.”

“올란트 씨가 날 경계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들들 볶던 인간이 웃으면서 찾아왔으니 꺼려지겠죠. 근데 사람 일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루아침에 관계가 뒤바뀌고 역전되고.”

유렐이 군모를 벗어 툭툭 털었다.

“난 그저 올란트 씨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온 거예요. 아니, 잘 지낼 필요까지도 없고 미움받고 싶지 않네요.”

말의 뉘앙스를 듣자마자 유렐이 찾아온 까닭을 알게 됐다. 알아낸 것이리라. 첼이 내 할아버지임을.

“취조부장님께서 무얼 걱정하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전 일개 기술자일 뿐입니다.”

“본인은 그러시겠죠.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내 의중까지 파악한 것 같군요. 난 말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해요. 자칫 오해를 낳거든요. 그러니 올란트 씨….”

유렐이 다시 군모를 썼다.

“불편한 점이 있거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사소한 것들도 날 먼저 찾아와 준다면 아주 깨끗하게 해결해 드리죠.”

“배려는 고맙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찾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제 밥그릇만 챙기면 되는 소시민이니까요.”

“편하실 대로 하세요. 그래도 내 방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걸 기억해 줬으면 하네요.”

“저한테 이러시지 말고 차라리 할아버지를 직접 찾아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럴 순 없죠. 나 역시 일개 군관일 뿐이니까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고 돕는 게 우리네 일상 아니겠어요?”

유렐이 눈웃음을 남기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첼이 사전이 경고하기도 했고, 올란트도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였다.

관계가 밝혀짐으로써 지금 같은 귀찮은 일이 생기겠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다.

사람들도 다 알게 되겠지.

핏줄이긴 하나 가문의 권력과는 상관없다는 걸.

올란트는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라기만 한다면 권력을 붙잡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가하란은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떤 걸 택하든 지지해줄 것이다.

그건 가하란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니까.

그래도 떠나겠다고 한다면 섭섭할 거야. 올란트는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그만두었다.

언젠가는 떠나보내겠지만 지금은 살짝 어리광부리는 아들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그치려나?”

올란트는 창밖을 보았다.

무섭게 내리던 빗줄기가 서서히 얇아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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