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전에 한 말 기억하지? 모든 공학자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꿈꾼다. 이번 랩이 시발점이 될지도 몰라.”
헤어지기 전 덴스 선배가 남긴 말이었다. 쾌활한 목소리가 귀가에 아른거렸다.
방으로 돌아온 올란트는 벽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덴스 선배가 개설한 랩이라, 생각만으로도 구미가 당겼다. 덴스는 오토마타 분야에서 강연을 열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독자적인 마력선을 고안해 탑승자의 입체인지를 향상시킨 연구는 황제가 직접 치하할 정도로 뛰어난 업적이었다.
제국의 거병 개발을 이끌어갈 차세대 재목으로 몇몇 연구자들이 꼽히는데, 그 목록에 선배도 항상 이름을 올렸다.
이번에 개설하는 랩도 친목 도모를 위한 시시껄렁한 모임이 아닐 것이다.
창조의 욕망과 앎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장소. 거절할 수 없는, 아니, 오히려 이끌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장님이 허락할까?”
올란트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관료 사회에서 위계질서는 때론 국법보다 중요시 여겨진다.
호방하기로 유명한 멧시언 소장이라지만, 과연 관습에서 눈을 돌리고 허락할까?
이럴 때면 첼이 지겹게 한 말이 떠오르곤 했다.
-네가 권력을 혐오한다지만, 권력의 부재는 단순한 감정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나티아 가의 위명을 등에 업었다면 눈치 보지 않고 랩에 들어갔을 것이다. 최고 어른의 이름에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올란트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털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미련을 품을 정도로 아둔하진 않았다.
권위를 등지고 성도를 벗어났기에 자유를 얻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세나티아 가에 남았다면 상호 이익만을 위한 결혼을 해서 시기에 맞춰 아이를 갖고, 시기에 맞춰 아이를 교육했을 것이다.
세나티아 가의 사람들은 시간표가 정해져 있었다. 어긋남 없는 인생, 흔들림 없는 삶이 태어난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꿈에 그릴 삶이리라.
하지만 올란트는 닦인 길을 걷는 것보다 가보지 못한 험로를 선택했다.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항상 행복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정성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을 때 거기엔 일말의 후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핀느와 사랑에 빠졌고, 이웃들의 축복 속에서 가하란을 만났다. 꿈꿔온 일을 생업으로 삼았고 그것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좀 더 있어 주지.”
올란트는 눈을 감고 세핀느를 생각했다. 폭풍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그 입매를 떠올리면 그리우면서도 힘이 났다.
가하란은 아내의 고요함을 이어받았다. 일찍 철이 든 것도 아내 덕분이리라.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이런 사고는 한 번으로 족해.”
또래보다 단단한 아들이라지만 이런 일을 또 겪게 된다면 못 버틸지도 모른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곱씹었다. 가족을 지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울타리가 필요했다. 가혹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줄 울타리가.
좋은 환경을 꾸리는 데는 필연적으로 돈이 들기 마련이었다. 랩에서 업무를 맡게 되면 돈 문제는 쉽게 해결될 터였다.
뿐만아니라 가하란을 위한 교육 환경까지 갖춰질 것이다. 성도의 교육기관만큼은 아니지만 둔에도 나름 괜찮은 학교가 있었다.
골목에 집을 팔고 연구소 근처로 옮긴 다음 가하란에게 입학시험을 보게 하면….
도중에 생각을 멈췄다. 올란트는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는 건가. 사고방식이 할아버지를 닮아갔다.
어쩌면 세나티아 가의 원칙이야말로, 첼의 방식이야말로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극한을 추구하다 보면 무엇이든 닮게 된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올란트는 부풀어 오르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부모로서 무엇이든 해줄 각오가 됐지만, 그 전에 아들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
면회 때처럼 아들 속마음도 못 읽고 또다시 울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세핀느, 너라면 어떻게 할래?”
올란트는 빗줄기를 뿌려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 * *
“꿉꿉하네.”
헌트는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습기 때문에 머리가 잔뜩 눌렸다.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어내고 루카를 바라봤다.
세나티아 가의 총집사를 보필하게 된 친구는 날이 갈수록 신수가 훤해졌다.
“총집사가 잘 챙겨주나 봐? 얼굴에 기름기가 도네.”
“독립부대에 있을 때보단 낫긴 해. 개인 시간이 많으니까. 업무도 널널하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며 루카에게 권했다.
“오늘은 됐어.”
“이건 맛이 괜찮아. 저번에 준 담배랑은 달라.”
루카가 고갯짓으로 거절했다. 헌트는 담배를 물며 말했다.
“신문은 끝났으려나?”
“끝났겠지. 위에서 별다른 얘기가 없는 거 보면 새로운 정보는 없는 것 같고.”
“뭐 전해 들은 거 없어? 총집사 옆에 붙어 있으면 나보다는 많이 알 것 같은데.”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며 물었다.
“없어. 난 어디까지나 심부름꾼이지 심복이 아니니까. 물론 들은 게 있다고 해도 말해줄 수도 없지. 군 기밀 누설죄로 구속되긴 싫으니까.”
루카가 난간에 손을 올렸다.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냉정해 보인다.
“헌트.”
“왜?”
“어째서 자수한 걸까. 숨기로 작정했다면 걸리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그놈들 심중을 알았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당장 보고해서 사령관한테 눈도장 찍지.”
루카가 눈 사이를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면책을 바라고 자수했을 리도 없고. 잡히면 교섭 없이 ‘알페시아’에 수감된다는 걸 알았을 텐데.”
“한번 가보고 싶었나 보지. 정치범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나도 궁금하긴 하니까.”
들어가면 제 발로는 못 나온다는 제국의 지하 감옥을 생각하니 살짝 떨리긴 했다.
결과에 따라선 나 역시 알페시아로 가겠지, 헌트는 슬며시 피어오르는 공포를 한숨으로 날려보냈다.
“고민거리 있어?”
루카가 물었다.
눈치 하난 기가 막힌 친구다. 헌트는 담배를 입술 끝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고민이야 많지. 저번에도 말했듯이 딸애 생활비를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아찔해. 유명한 극단은 역시 돈이 많이 들어.”
“너무 무리하지는 마. 자식한테 인생 걸다가 꼬꾸라지는 부모들 많이 봐왔잖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빠의 사랑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내 새낀 재능이 있어. 분명 잘 해낼 거야.”
옅게 웃던 루카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가봐야겠네. 총집사님이 나올 시간이야.”
“욕봐라. 난 여기서 빗소리나 즐기련다.”
루카가 군모를 눌러썼다.
“부대 업무는?”
“우리는 당분간 휴식이야. 장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가지.”
헌트는 계단을 내려가는 루카에게 손을 흔들었다. 검은 우산을 펼치고 중앙 건물 입구로 걸어간 루카가 총집사와 만나는 게 보였다.
헌트는 우산에 가려진 총집사를 지켜보다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쪽도 슬슬 약속 시간이 되어간다.
“헌트 부대장.”
난간 복도 끝에서 유렐 취조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트는 담배를 비벼 끈 다음 유렐을 바라봤다.
“무슨 일로 날 부른 건가?”
“일단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담뱃갑을 흔들며 말했다. 유렐이 손을 내저었다.
“예전에 입에 대봤는데 나하곤 안 맞더라고.”
“그거 아쉽네요. 취미생활로 이것만 한 게 없는데.”
“난 화초 가꾸는 게 더 즐거우니 괜찮아. 그보다 취미나 공유하자고 날 불러낸 건 아닐 텐데.”
헌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집사가 올라탄 마차를 응시했다. 유렐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마차로 옮겨졌다.
“세나티아 가의 총집사, 첼 님에게 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겨서 살짝 알아봤는데, 괜한 헛수고였지.”
유렐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사망했다고 나오던가요?”
“문서를 열람한 건 아니지만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부대장 말대로 죽었다더군.”
유렐의 말을 듣자마자 헌트는 놀라움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분’의 말씀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위대한 선견자는 이 모든 걸 예상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모든 것이 쳇바퀴처럼 정렬돼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살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번에 성도로 임무를 나갔을 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첼 총집사의 손자는 살아 있고, 이곳 둔에 정착했습니다.”
“여기에 있다고?”
유렐이 두툼한 턱을 매만졌다.
저 멀리 멈춰 있던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유렐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건가? 우리가 이런 얘길 주고받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닌데 말이야.”
헌트는 회중시계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았다.
“저도 슬슬 줄을 서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요.”
“독립2군 이등중사. 자리만 잘 보전하면 줄을 설 이유는 없을 텐데? 다른 독립부대는 몰라도 독립2군은 엘리트 아닌가.”
“더디게 올라가는 건 재미없지 않습니까?”
유렐이 눈웃음을 지었다.
“무엇보다 돈도 필요할 테고. 극단에서 제시한 참가비를 내려면 허리가 휘겠지.”
“저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요.”
“화초 가꾸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 뒤를 캐보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 내가 괜히 취조부장이겠나?”
선견자의 예언대로 대화가 진행됐다. 섬뜩할 만큼 비슷한 흐름이었다. 몇 년 전에 써놓은 글대로 현실이 움직이고 있다니.
“내 관심사를 알고 바라는 정보를 제공한다. 내가 위기감을 느끼고 자네와 거리를 둘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그러실 건가요?”
유렐이 눈을 찌푸리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그럴 리가. 난 유능한 사람을 좋아해.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좋지.”
“앞으로도 양질의 정보를 가져다드리죠.”
“그럼 난 자네가 준 정보로 자네를 끌어올릴 준비를 해야겠군.”
유렐이 손을 내밀었다. 헌트는 그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 살아 있다는 손자 말이야, 내가 예상하는 친구가 맞나?”
“올란트. 그 친구가 맞습니다.”
“역시나. 이제야 앞뒤가 맞아떨어지는군. 사령관이 은근슬쩍 신경 쓰는 이유가 그거였어.”
개운하다는 듯 목을 좌우로 트는 유렐이었다.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지만 그래도 알아둬서 손해 볼 건 없지. 안면을 익혀두면 나중에 득을 볼지도 모르고 말이야.”
“총집사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건 옳지 못하니까요.”
“내 말이.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의 비밀이라면 금방 밝혀지겠지. 애써서 감추는 느낌이 아니니까.”
눈알을 굴리며 무언가 생각하던 유렐이 그만 가보겠다며 몸을 틀었다.
“다음에 저녁이나 같이 하지.”
“초대해 주시면 언제든 가겠습니다.”
“이번 내로 연락하겠네.”
걸어가는 유렐에게 헌트가 말을 걸었다.
“취조부장님.”
“왜 그런가?”
“앞으로 모실 분의 성향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하지. 질문이 있나?”
“한 가지만 여쭈겠습니다. 취조부장님께선 평등을 바라십니까?”
“평등? 공평한 분배를 말하는 건가?”
“예. 모두가 동등해지는 거죠. 다툼도 없고, 갈등도 없는 그런 세계.”
유렐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답했다.
“지옥이군. 차별 없는 세상에 무슨 재미가 있겠나? 안 그런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