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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5화 (333/558)

제35화

-선택은 곧 포기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에 초점을 둬라. 그러면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목소리가 잠을 일깨웠다.

올란트는 머리를 짚으며 상체를 세웠다. 과거를 부유하던 정신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할아버지 목소리를 꿈에서 들은 건.

경직된 근육을 풀고 창가로 갔다. 세로로 그어진 쇠창살 밖으로 먹구름 낀 하늘이 보였다. 여름의 막바지를 알리는 비가 오려는 걸까.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옆구리 쪽에 남은 은은한 멍 자국만 빼면 모든 게 정상이었다.

“벽으로 밀착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올란트는 문에서 떨어져 벽에 기댔다. 철문이 열리고 조식을 든 군인이 들어왔다.

“올란트 씨, 좋은 아침입니다.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군관은 일지에 무언가를 쓴 다음 가져온 조식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특이사항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군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란트는 벽에 얌전히 손을 댄 채 말했다.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하시죠.”

“이틀 뒤 귀가 조치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한 겁니까?”

예정대로라면 며칠 전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구금이 연장됐다. 이유를 물어도 설명이 돌아오진 않았다. 루카 역시 아는 게 없는 눈치였다.

“제가 확답을 드릴 순 없습니다. 저도 올란트 씨처럼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알겠습니다.”

아침 드시죠, 군관은 높낮이 없는 말투로 말한 다음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 잠금쇠를 미는 소리가 들렸다.

대우가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 풀려난 건 아니었다. 변수가 생긴다면 구금 기간이 늘어나리라.

간이 덜 된 수프를 떠먹고 퍼석한 고구마를 입에 밀어 넣었다. 식사는 중요했다. 건강하게 아들 곁으로 돌아가려면 뭐가 됐든 먹어야 했다.

빗소리가 들렸다. 먹구름이 기어이 비를 뿌렸다.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몇 주째 붙들려 있었더니 별게 다 반가웠다.

가하란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면회 때 더 놀아주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철이 들었다고 한들 이제 일곱 살이었다. 그 작은 몸으로 견뎌내야 했을 두려움과 슬픔을 생각하면 목이 꽉 멨다.

루카와 첼, 두 사람이 보살피고 있으니 문제는 없을 테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매섭게 내리는 비를 작은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비가 와서 관내 산책은 어렵게 됐고, 휴게실에 자리를 마련해 뒀습니다. 나오세요.”

이번 사태와 관련 없다고 위쪽이 판단했는지, 지상으로 옮겨진 후부턴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군인들이 달라붙지만 관내 산책도 가능했었고.

비가 와서 못 나가는 게 아쉽군, 올란트는 군관을 따라 지정된 휴게실로 들어갔다.

“올란트.”

안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선배님도 계셨군요.”

폭이 좁은 안견을 끌어 올리며 밝게 웃는 덴스였다. 항상 단정하던 머리가 지금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날 나도 제철소에 있었거든. 연구소에서 부탁한 물건을 확인하러 갔다가 이렇게 됐어.”

덴스가 팔뚝을 보여줬다. 검붉은 멍 자국이 보였다.

“최근에 당한 거예요?”

“아니야. 알다시피 몸이 좀 안 좋잖아.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러네.”

팔뚝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덴스였다.

“이렇게 만나게 해주는 걸 보면 혐의점이 없다는 뜻인가.”

“그런 것 같네요.”

군인들은 슬쩍 쳐다보기만 할 뿐 대화를 막지 않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얘기를 나눴다.

“다과까지 준비한 걸 보면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되는 건가.”

“또 모르죠. 얼마 전에도 곧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붙들려 있으니.”

덴스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올란트는 쿠키를 집으며 거리를 좁혔다.

“며칠 전에 진범 하나가 자수한 모양이야.”

새로운 사실이었다. 올란트가 목소리를 낮추며 되물었다.

“갑자기 자수요?”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안면 있는 군관을 통해 간략하게 전해 들은 거니까.”

“구속이 연장된 이유가 그거였군요.”

자수한 진범을 통해 사건 정황을 파악한 다음 얻은 정보를 토대로 구금한 인원들을 재조사했을 것이다.

“저희한테 별다른 조치가 없다는 건….”

“사건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위에서 판단한 거겠지. 이번에야 말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가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긴장감이 탁 하고 풀렸다. 이틀만 이곳에서 보내면 가하란 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무 일 없이 끝나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무 일 없긴. 군인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난 아직도 무릎 뒤가 쑤셔.”

“피해 보상 요구하시게요?”

“대놓고는 못 하지. 넥타이 벗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눈치 살살 주면 위에서 치료비라도 내주지 않겠어?”

눈웃음 짓는 덴스였다.

“네 말대로 이 정도 선에서 끝나는 게 다행이긴 하지. 모듈 탈취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몇 대 맞는 선에서 끝났으면 남는 장사긴 해.”

맞는 말이었다. 거병 모듈이 갖는 의미가 어떤 건지 잘 알기에, 멍 든 정도로 끝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밀반출이라고는 하는데, 모듈이 밖으로 나간 것 같지는 않죠?”

군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실물이 사라졌다면 이곳 분위기가 이렇게 느슨하진 않겠지. 도시에 계엄이 선포되고도 남을 일이니까.”

“시도에서 그쳤나 보네요. 누군지는 몰라도 목숨이 한 열 개는 되나 봅니다. 둔 심장부에서 모듈을 훔치려 하다니.”

“세상에 미친놈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가벼운 어조로 말할 수 있었다. 방안 다른 사람들도 화기애애하게 대화 중이었다.

“올란트. 이번 일 마무리되고 나면 나한테 시간 좀 내줘라.”

“술 약속이라면 당분간은 힘들어요. 아들하고 지칠 때까지 놀 예정이라서요.”

“나도 내 딸하고 신나게 놀 거야. 근데 그것과 별개로 따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데요?”

작게 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은 덴스가 진중한 눈빛을 하며 얘기했다.

“예전에 내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던 게 하나 있었는데, 기억해? 엘론 바에서 말이야.”

종종 가는 술집 이름을 듣자마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선배님께서 따로 맡으신다던 랩(lab)이요?”

“그래. 기억하고 있네.”

“설마 새로운 파트를 담당하게 된 건….”

덴스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올란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축하드려요. 정말 해내셨네요.”

“재수가 좋았어. 주변 도움도 많이 받았고.”

“연구소 내에서 랩을 개설하는 건 운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농담처럼 말하던 차기 연구소장이 이젠 농담이 아니게 됐네요.”

“듣기는 좋은데 너무 나갔어. 아직 갈 길 멀다. 연구소장은 관리국 쪽 연줄이 있어야 하는데, 난 아직 줄을 못 탔으니까.”

“실력이 최고의 배경이에요. 선배님 능력이면 충분히 될 겁니다.”

“네가 하는 말은 아부처럼 안 들려서 더 부끄러운 거 알지?”

대화가 끊긴 김에 살짝 식은 차를 마셨다. 거병관리국 내에서도 핵심 중의 핵심부서가 연구소였다.

연구소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관리국 중추에 들어갈 수 있고, 나아가 황제 및 의회와도 연줄이 닿게 될 것이다.

“이러다 성도에 있는 거병관리국으로 가는 거 아니에요?”

“거기보단 여기가 낫지. 성도 관리국은 유지보수 성향이 강하니까. 독립성 짙고, 파격적인 실험도 진행할 수 있는 둔이 나한텐 맞아.”

덴스가 쿠키를 삼킨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은 가지?”

“전혀 모르겠다고 하기엔 선배님 눈빛이 너무 간절하네요.”

“내가 아내한테도 이런 눈길은 안 줘. 그만큼 네가 필요하단 뜻이야.”

덴스는 뇌물이라며 반으로 자른 쿠키를 내밀었다.

“저 말고 다른 치프가 낫지 않겠어요? 치프들 중에 아직 프리인 분도 계시는데.”

“치프들 실력이야 잘 알지. 근데 그 사람들은 이미 자기만의 틀을 만들었어. 내가 하려는 프로젝트와는 안 맞아.”

“약간 모자란 부분이 있어야 괜찮다?”

“쉽게 부려먹을 수 있으면 더 좋고.”

올란트는 소리 내어 웃다가 군인들 시선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근데 제철소 관습을 잘 아시잖아요. 치프가 아닌 기술자가 랩에 소속될 순 없어요. 저도 선배님과 같이 작업해보고 싶지만….”

덴스가 말허리를 끊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다른 엔지니어라면 힘들지만 넌 가능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르는 척할 거야? 너 차기 치프 1순위로 거론되잖아. 능력이야 이미 검증됐으니, 조금 이르지만 연구소와 연계할 수 있도록 얘기해 볼 거야.”

그런 말이 나도는 건 사실이니까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치프로 거론되는 것과 치프 직함을 달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힘들지 않을까요?”

“하겠다고만 말해. 설득은 내가 해볼 테니까. 멧시언 공이라면 분명 너한테 기회를 주실 거야.”

“전 잘 모르겠네요.”

마에스트로 멧시언. 제철소장이자 둔의 기술자들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준 위대한 스승.

사적인 자리에서 몇 번 만나 본 적이 있지만 짧게 대화한 게 전부일 뿐, 멧시언과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분이 내게 기회를 주실까? 되면 좋겠지만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가면 다른 선배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질 수도 있었다.

자유로운 발상과 새로운 기술을 중요시하는 제철소라고는 하나 태생은 관료였다.

관습을 대놓고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규칙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제철소 내에서 오랫동안 지켜져 온 풍습이에요. 랩과 합작하는 건 치프부터.”

“치프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생긴 관습이라는 건 나도 알아. 랩과 연계하려면 개인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있는 건 관리급부터니까.”

덴스가 안경을 벗었다.

“근데 유능한 인재의 발목을 잡는 관습이라면 그건 악습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중요해요.”

“진심을 말해봐. 내 제안을 아무런 후회 없이 거절할 수 있어?”

“오늘따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하시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만큼 네가 필요하다는 거야.”

덴스가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얘기가 잘못되더라도 너한테 피해가 안 가도록 할게. 전적으로 내가 고집 피워서 밀어붙인 거로 하면, 제철소 내에서 네가 불편해지는 일은 없겠지. 넌 내 술수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랩에 들어오게 되는 거야.”

올란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기로 결정하면 당당하게 해야죠. 선배들한테 미움받더라도 그게 옳은 거고.”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넌 타협이란 걸 모르지?”

“성격인 걸 어떻게 하겠어요.”

덴스가 팔짱을 꼈다.

“대화의 흐름으로 보건대,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니까요. 하게 해주세요. 저도 선배님이 뭘 만들지, 궁금해요.”

덴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상투적인 동작이지만 선배와 잘 어울렸다.

“다들 나와 주세요. 식사는 각자 방에서 할 겁니다.”

군관이 말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덴스는 기대하라는 말을 덧붙이며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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