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거기까지 뭐 하러 간 거야?”
골목을 빠져나온 직후 미엔이 한 말이었다.
“개 보려고.”
“개?”
“그런 게 있어.”
밀레나는 내려온 앞 머리카락을 살짝 치워내며 말했다.
“여긴 위험한 곳이야. 자유 시민조차 아닌 일반 시민의 구역이라고. 귀족에게 반감이 있는 자들이 득실득실하다니까?”
“미엔, 너 스콜라 생도 맞아? 이런 곳이 두렵다면 생도를 그만둬야지.”
“눈먼 칼이 제일 무섭다는 교관님의 말씀을 잊었어? 여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골목이야. 공정한 스콜라 교정이 아니고.”
미엔의 말이 끝나자마자 밀레나는 허리 뒤쪽에 숨겨둔 단검을 뽑아 미엔 턱 끝에 가져다 댔다. 미엔은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내 몸 하난 지킬 수 있어.”
“네 실력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미엔이 손으로 날을 잡아 단검을 밀어냈다. 밀레나는 으쓱거리며 단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너도 봐서 알잖아. 노려볼 뿐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걸. 다짜고짜 공격할 정도로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아닐 거야.”
경계와 적의. 그 중간을 오가는 시선들이 골목 초입부터 전신을 찔렀다.
경각심을 잔뜩 일으켜 놓고 공격해오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극하지 않으면 괜찮아.”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둔에서 심심치 않게 귀족들이 다치거나 죽어. 그것도 일반 시민 손에.”
“사고는 어디에서나 일어나. 그리고 네가 한 말에는 어폐가 있어. 지난 석 달간 이곳 둔에서 일반 시민이 귀족에게 상해를 입힌 건은 단 한 건이야. 하지만 그 반대는?”
밀레나는 미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198건. 나도 알고 있어. 둔 행정처 기록을 읽었으니까. 더불어 시민이 중증 상해를 입어 귀족이 약식 재판으로 넘어간 건….”
“단 8건. 그것도 등급 없는 귀족에 한해서였어. 5등 귀족부터는 약식 재판도 없었지.”
재판을 신청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일반 시민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귀족에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민이 만족할 만한 판결이 나오는 건 백에 한 번. 이마저도 황제 폐하가 지난 몇 년간 화합을 주창하며 도출해낸 결과였다.
황제의 칙령으로 시민을 대상으로 한 기초 교육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백에 한 건이 아니라 백만 중 한 건이 됐을 것이다.
대답을 들은 미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당연한 거야. 우린 귀족이니까. 우린 우리의 권리를 대변해야 할 의무가 있어.”
“알아.”
밀레나는 골목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저곳에 사는 사람들이 우릴 달갑지 않게 본다는 것도 알고,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야. 짐승을 대하는 게 아니잖아.”
“어떨 때는 짐승이 나아. 짐승은 정직하니까. 으르렁거리며 공격한다는 걸 알리고 덤벼들지. 하지만 빈민은 아니야. 갑자기 공격해 올 때도 있어. 단지 우리가 귀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시민에서 빈민으로. 단어가 바뀌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일까.
미엔의 턱에 주름이 잡혔다. 골목을 바라보는 시선에 혐오감이 깃들어 있었다.
“네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야. 이해해. 하지만 네 개인사를 근거로 내 가치관을 바꾸진 않아.”
미엔이 왜 시민을 헐뜯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알려진 가십거리라 다른 동기들도 다 알고 있고.
“로젠은 친절한 애였어. 잘 웃는 애였고. 시민들과도 가까이 지냈지. 그런 애를, 단지 재수 없다는 이유로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걸 원칙으로 삼는 미엔이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다.
“안타까운 일이야. 하지만 그 한 건으로 모든 시민을 평가할 순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알아. 하지만 그런 폭력적인 시민들이 과연 소수일까? 그놈들은 이성으로 행동하지 않아. 때문에 우리가 이끌고 가르쳐야 하는 거고. 로젠이 겪은 끔찍한 범죄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게끔 말이야.”
미엔이 크게 숨을 들이켠 다음 내쉬었다. 숨을 고른 미엔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볍고 발랄한 얼굴이다.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네. 너한테 이럴 필요 없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네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마우면 이제 딴 길로 새지 말고 잘 따라와. 애들 다 기다리고 있어.”
“고맙다는 뜻이 말을 잘 듣겠다는 뜻은 아닌데?”
“그래. 밀레나 너는 그런 애지. 그래서 마음에 들고. 그래도 지금은 날 따라와. 애들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미엔이 턱을 치켜들며 몸을 돌렸다. 밀레나는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로운에게 시선을 준 뒤 걸음을 뗐다.
“저기 밀레나.”
로운이 뒤따라오며 말했다.
“왜?”
“별거 아니긴 한데, 이제 여긴 다시 안 올 거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늘에 잠긴 골목을 보며 말했다.
늑대를 닮은 개와 믿기지 않는 기록서, 그리고 탁한 하늘색 눈을 가진 차분한 꼬마.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저 골목에 남아 있었다.
“말 못 할 사정이 생긴 거라면….”
“그런 거 없어. 있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고.”
“그래도 혹시나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말해. 나는, 아니 우리는 언제나 널 도울 테니까.”
씩 웃는 로운이었다.
상냥한 웃음 위로 시민에게 산 사과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던 모습이 순간 겹쳐 보였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대변해야 할 의무가 있어.’ 미엔이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로운.”
“응?”
“내가 만약 귀족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었을까?”
무슨 말이냐며 싱글싱글 웃던 로운이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변함없이 대했을 거야. 스콜라 생도니까. 적어도 난 그럴 거야.”
저만치 멀어진 미엔이 얼른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로운이 뛰듯이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밀레나는 생각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왜 본토 귀족끼리만 어울려 다니는 걸까?
뻔한 질문이었고 되돌아올 답도 뻔했기에 잡념은 먼지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바라보았다. 누더기를 뒤집어쓴 노인이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저들은 알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저들은 바랄 것이다.
평등을.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터였다. 평등해지기엔 우린 너무 많은 걸 가졌으니까.
“따분해.”
가하란이 가진 기록지를 읽고 싶다. 밀레나는 습한 골목의 냄새를 뒤로한 채 친구들의 뒤를 따라갔다.
* * *
-내가 제일 궁금한 게 뭔지 알아? 바로 맛이야. 다른 어떤 감각보다 이 맛이란 게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 미칠 지경이야.
머리 위를 지나가며 말하는 정령이었다. 생긴 건 깨진 찻잔과 비슷했다.
-맛은 참으로 오묘하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맛이라는 건 크게 네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인간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 단맛이야.
바닥에 붙어 있는 정령이 대꾸했다. 붉은색 아지랑이 정령.
그 외에도 여러 정령이 방 곳곳에서 떠드는 중이었다.
가하란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품하며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고 이불을 품에 안았다.
사방에서 떠들어대던 정령들이 한순간 침묵했다. 은밀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던 얘기 마저 하세요.”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8월 끝자락의 날씨는 푹푹 쪘지만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었다. 극성이던 7월 더위를 생각하면 꽤 시원해졌다.
빨랫줄에 이불을 널고 먼지떨이로 팡팡 소리 나게 쳤다. 먼지인지 벼룩인지 모를 작은 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슬슬 정신을 놓을 때가 됐는데.
-안원에 다녀오고도 멀쩡한 걸 보면 괜찮지 않을까?
-인간은 알 수가 없어. 이상한 동물이야.
뒤따라 나온 정령들이 수군댔다.
“할 말이 있으면 저랑 얘기하죠?”
정령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정령들은 대꾸조차 안 했다. 자기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주고받을 뿐이었다.
가하란은 살며시 눈을 감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조잘거리는 음성이 서서히 멀어졌다.
다시 눈을 떴다. 정령들이 흐릿하게 보이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좀 조용하네.
툴에게 밥을 준 다음 아침을 챙겨 먹었다. 살짝 마른 빵을 씹으며 창밖을 보았다. 햇빛이 드리운 골목 이곳저곳에 정령이 자리 잡았다.
타챠의 말대로 정령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못 보고 지나친 게 신기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정령은 민들레 꽃씨처럼 아무 말 없이 떠다녔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지켜보고 있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왜 저렇게 가만히 있을까, 하고 정령들의 행동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타챠가 한 말이 생각난 것이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다름을 인지하고 그저 현상으로 받아들여라.
-그러니… 안에 들… 어떻….
-다시 말… 어쩐지… 인간은….
목소리가 다시금 귀를 파고들었다. 호흡을 가늘게 뽑고 눈을 감았다.
수다쟁이 정령들에게서 벗어나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툴의 호흡이나 바람 소리 같은 다른 소음에 집중하다 보면 정령들의 음성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의식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니까.
주변에서 맴돌던 정령들이 천장을 뚫고 사라졌다. 오늘 모임은 끝낸 건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 많은 정령들이 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궁금해도 알 방법은 없었다.
정령들은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어른들에게 질문할 수도 없었다.
정령이 보인다는 걸 떠벌리고 다니지 마라, 타챠의 경고였다.
널어놓은 이불이 바람에 따라 출렁거렸다. 오도카니 앉아 이불을 바라볼 때였다.
“루카 아저씨!”
반가운 얼굴이 이불 너머로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카의 뒤쪽을 살폈다. 아빠도 같이 왔을까?
“잘 지내는 것 같구나. 아침은 먹었고?”
루카가 말했다.
“먹었어요. 아저씨는요?”
“나도 먹었단다.”
가까이 다가온 루카가 진한 미소를 보였다.
“올란트가 안 와서 실망했구나.”
“아, 아니에요.”
“실망한 게 눈에 보인다. 그래도 걱정 마라. 오늘은 좋은 소식을 가져왔으니까.”
좋은 소식? 기대감에 찬 눈으로 루카를 보았다.
“모레, 네 아빠가 풀려날 거다. 원래대로라면 나흘 전에 나와 같이 왔어야 했는데,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정말요? 아빠가 오는 거예요?”
“그래.”
루카가 그간 혼자서 고생했다며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 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손길이 닿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다.
코끝이 간지럽고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가까스로 참고 웃으면서 루카를 보았다.
“빨리 아빠를 보고 싶어요.”
“올란트도 너랑 같은 마음일 거다.”
가하란은 고개를 돌려 군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빠가 곧 집으로 온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