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3화 (331/558)

제33화

“언제부터 기른 거야?”

“작년 여름부터.”

“얘 몇 살인데.”

“이제 한 살이야.”

“그런데 이렇게 커?”

여자애가 툴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했다.

“늑대와 비슷한 애라 이렇게 큰 거래.”

“그래? 생긴 건 순하게 생겼는데.”

툴의 주둥이 안쪽을 살피던 여자애가 아, 하는 탄성을 냈다.

“물리면 따끔한 정도로 안 끝나겠다. 흔히 보던 개들하고는 확실히 달라.”

얌전히 몸을 맡기던 툴이 슬슬 귀찮아졌는지 여자애 손길을 피해 가하란 뒤쪽으로 숨었다.

“날이 꽤 선선해졌어도 더위를 많이 타거든. 사람 손길도 뜨겁게 느낄 거야.”

길게 혀를 내민 툴을 보며 말했다.

“털에 뒤덮여 있으니 훨씬 덥겠네. 털을 잘라 주는 건 어때?”

“가위를 무서워해. 아직 애라 그런 걸지도 몰라. 좀 더 지켜보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잘라 주려고.”

“생긴 것만큼이나 겁이 많나 보네.”

가하란은 툴의 앞발을 만지며 얘기했다.

“겁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도망치진 않아.”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도 집 앞을 지키며 짖던 툴이었다. 타챠가 왔을 땐 꼬리를 말고 침대 밑으로 기어서 들어갔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긴 왜 온 거야?”

여자애한테 물었다.

“얘 만져 보려고 왔어.”

당찬 대답이었다.

가하란은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어른들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걱정하던 어른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거두었다.

“여기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이 많나봐.”

여자애가 말했다.

“귀족이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쳐다본 거야.”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이었다. 지난번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얀 사자 문양이 박혀 있었고.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누가 봐도 신분이 다른 애가 나타났으니 다들 경계하는 것이리라.

“약간 억울하긴 하지만 생활권에 불쑥 들어온 건 나니까. 그래도 나중에 네가 설명해줘. 귀족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슬쩍 본 거지 막 그렇게까지….”

여자애가 말을 중간에 끊었다.

“중요한 건 너희 입장이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지. 내가 고양이를 돌려주면서 말해줬을 텐데?”

“그랬었지.”

사나운 어투였으나 담긴 내용은 정론이었다. 여자애 말대로 귀족의 생각이 중요한 거지, 시민의 처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시민을 함부로 대하는 귀족이 많이 줄었다고 한들 없는 건 아니고.

“고마워?”

“뭐가?”

“지난번처럼 말로 설명해줘서.”

“난 싸구려 귀족이 되긴 싫거든.”

여자애의 눈이 움직였다. 붉은 눈동자가 관심을 둔 건 가하란이 쥐고 있는 기록지였다.

“그건 뭐야? 장부 같은 거야?”

“아니. 일지야. 할아버지가 쓴 일지.”

“일지? 이곳 생활을 기록해둔 거야?”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둔 바깥의 이야기가 적혀 있어. 할아버지는 멋진 모험가였거든.”

“모험가?”

“정확히 말하면 랍파였어.”

“랍파의 일지는 읽는 재미가 있지. 나도 몇 번 랍파들이 남긴 기록을 봤어. 대단한 사람들이야. 미개척지로 뛰어들다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자애였다. 앉을 자리가 필요한 걸까? 가하란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앉으려면 이거 깔고 앉아도 돼.”

“그런 예절도 너희 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어. 다른 건 몰라도 손수건은 꼭 챙겨 다니라고 했어.”

손수건을 바라보던 여자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호의는 고맙지만 받지는 않을게. 깔고 앉으라고 만든 손수건도 아닐 테니까.”

주변에 굴러다니던 판판한 돌을 발로 쓱 밀더니 거기에 앉았다.

“옷이 더러워질 텐데.”

가하란은 걱정을 담아 말했다.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으면 스콜라에 못 들어가. 장소에 따라서는 신경 쓰겠지만, 여기선 안 따져.”

스콜라. 여자애 입에서 나온 단어에 가하란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스콜라에 관해 얘기해줄 수 있어?”

“왜?”

“궁금해서. 아빠가 그랬거든. 이번에 둔으로 온 스콜라 생도 중에서 거병 기사가 나올 수도 있다고.”

여자애가 다리를 쭉 펴며 물었다.

“너희 아버지는 귀족이나 관료가 아니라고 했지? 근데 우리가 둔에 온 걸 알고 있네.”

“아빠가 거병관리국 제철소에서 일하셔.”

“그래? 능력이 좋으신가 보네.”

아빠 얘기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가하란은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집으로 달려갔다. 선물로 받은 거병 조각상을 들고 여자애에게 돌아갔다.

“아빠가 만든 거야.”

여자애가 조각상을 넘겨받았다.

“정말 똑같지?”

“그러네. 내가 본 타입과는 다르지만 외관이야 각기 다를 테니까.”

여자애가 조각상 발판 밑을 유심히 살폈다.

“여기 쓰여 있는 게 네 이름이야? 가하란?”

“맞아. 그게 내 이름이야.”

여자애가 끄덕이며 조각상을 돌려줬다.

“난 밀레나.”

밀레나가 손가락으로 기록지를 가리켰다.

“스콜라가 궁금하다고 했지? 내가 말해줄 테니까 대신 그거 보여줄 수 있어?”

“이걸?”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가하란은 빙긋 웃었다.

“맞는 말이야. 근데 빌려줄 수는 없어. 소중한 거거든.”

“여기서 읽을게. 기록지를 많이 봐봐서 살피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비슷비슷하니까.”

밀레나가 손바닥을 벌렸다. 기록지를 그 위에 올려놨다.

“읽으면서 얘기해 줄게. 스콜라에 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대외 비밀은 말해줄 수 없지만.”

가하란은 밀레나 옆에 앉은 다음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나도 스콜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기록지 표지를 넘기던 밀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가하란을 쓸어봤다.

“교관님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탈락. 일단 체격이 안 좋아.”

“내가 좀 작긴 해.”

“올해 몇 살이야?”

“일곱.”

“어리긴 하네. 부쩍부쩍 크는 시기니까 또 모르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시험을 치는 것조차 불가능해.”

“시험?”

어떤 식으로 시험을 치르는지 되물었다.

“스콜라 정규 시험은 2년마다 치러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이 있는 자들은 시험을 칠 수 있지. 시험 내용은 매번 바뀌어서 시험 당일 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어.”

“밀레나… 네가 시험 쳤을 때는 어땠는데?”

조심스럽게 이름을 말해봤다. 밀레나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 때는 나흘간 잠을 못 자게 했어. 훈련장 한가운데서 치러졌는데, 잠들만 하면 깨워서 기초체력 점검을 실시했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사흘 정도 못 자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더라고.”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는 시험 내용이었다. 하루만 못 자도 눈앞이 핑핑 도는데, 나흘이나 뜬눈으로 새우면서 시험이라니.

“3년 전,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때였어. 딱 네 나이 때지.”

3년 전에 일곱 살. 가하란은 아무 말 않고 눈을 깜빡였다. 또래라고 여겼다. 아니면 한 살 어리거나.

근데 열 살이라고?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네. 키가 안 커서 나도 걱정이야. 신체적으로 불리하니까.”

“크, 클 거야. 아니, 클 거예요.”

“왜? 누나라고 존대하게? 됐어. 그런 거 신경 안 써. 스콜라에선 나이 구분이 없거든. 내 동기들도 나이가 제각각이야. 나보다 두 살 어린 애도 있고, 스무 살 많은 애도 있어. 근데 다 똑같아. 동기인 이상 똑같은 거야.”

가하란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스콜라 생도가 아니니까.”

밀레나가 살며시 웃었다.

“그렇긴 하네. 그래도 편하게 말해.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이인데. 이럴 때 아니면 귀족한테 언제 반말해 보겠어?”

잠깐만, 이라며 기록지에 집중하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두 살 어린 동기가 있다는 건 대체 몇 살 때 그 어려운 시험을 치른 거지?

스콜라 생도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아빠의 말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런 뛰어난 사람 중에서도 거병 기사가 되는 건 소수라고 하니, 거병 기사는 얼마나 대단한 걸까.

타챠 아저씨 말대로 전사가 될 육체는 따로 있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하며 먼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밀레나의 손이 가하란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는지 윽, 하고 신음이 나올 정도였다.

“왜 그래?”

놀라서 되물었다.

밀레나가 눈을 크게 떴다.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가하란을 쏘아봤다.

“이거 정말로 네 할아버지가 쓴 거 맞아?”

“맞아.”

“친할아버지셨어?”

“아니. 이웃 할아버지셔. 지금은….”

가하란은 주인을 잃은 집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바람에 문틀에 달아둔 하얀 천이 흔들렸다.

“돌아가셨구나.”

밀레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저런 집에 이 기록지를 쓴 분이 사셨던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묻는 밀레나였다. 무엇이 밀레나를 동요시킨 걸까. ‘저런 집’이란 표현으로 보건대 좋은 의미로 놀란 건 아닌 듯했다.

“혹시 할아버지를 알아?”

“확실한 건 아니야. 좀 더 읽어 봐야 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는다면, 절대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될 분이야.”

인상을 쓴 밀레나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만해도 느긋하게 기록지를 읽던 애가 지금은 당장 싸울 것처럼 거칠게 페이지를 넘겼다.

집중하던 밀레나가 고개를 든 건 멀리서 골목 끝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리라.

“밀레나! 거기서 뭐 해!”

이쪽을 향해 남자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밀레나와 비슷한 재질의 옷차림이었다.

“너 여기서 사는 거 맞지?”

밀레나가 기록지를 돌려주며 물었다. 가하란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내가 다시 올게. 그거 보관 잘하고 있어.”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며 밀레나가 일어섰다.

“다음에 또 봐.”

짧게 손 인사 한 밀레나가 툴을 한번 쓰다듬은 후 돌아섰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남자들이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가하란은 어깨를 나란히 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골목이 저 세 사람을 배척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골목 초입에서 어슬렁거리던 귀족들이 물러나자, 골목 주민들이 다가왔다.

“가하란, 쟤들은 뭐니?”

“모르겠어요.”

“해코지한 건 아니고?”

“그건 아니에요.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가하란은 또 봐, 라며 손을 흔들던 밀레나를 떠올렸다. 빛나는 듯이 반짝이던 붉은 눈동자. 그리고 골목에서는 맡을 수 없는, 은은하게 풍겨오던 좋은 향

“아, 이게 향수라는 거구나.”

가하란은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둔 밖에서 온 귀족 여자애.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환경이기에 물어볼 것도 많았다.

스콜라에게 관해 알고 싶고, 거병에 관해 듣고 싶고, 성도에 관해 묻고 싶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또 봐, 이 한마디가 괜스레 반가우면서도 아쉬웠다.

“툴, 가자.”

골목 끝을 멍하니 바라보는 툴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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