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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2화 (330/558)

제32화

“근데 레거시가 뭐야?”

옆에서 걷던 로운의 물음에 밀레나는 멍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진짜 몰라.”

“수업 때 들었잖아. 클랜에서 온 마법사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던 거 기억 안 나?”

“그거 강화훈련 다음 날이었지?”

로운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되물었다.

“기억하네.”

“너무 힘들어서 그때 휴게실에 있었어.”

“그랬나?”

“내가 없는 것도 몰랐구나. 섭섭해도 되나?”

“컨디션 조절을 못 한 건 자랑이 아니야.”

스콜라의 모든 교육은 강압적이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들지만 그 어떤 교관도 억지로 참가시키지 않는다.

힘들면 손들고 탈락, 지치면 수업을 빠지는 것도 본인 재량이었다.

물론 정기평가에서 상상하기도 싫은 최저점을 받게 되겠지만.

밀레나는 앞서서 걷는 무리를 바라봤다. 미엔에게 레거시 설명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듯했다. 꽤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지 브엘라와 미엔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한 번만 설명해줄게.”

“고마워.”

밀레나는 마법사의 설명을 되새김질했다.

“쉽게 말하자면 레거시는 편리한 마법공학품이야. 사용자가 마나를 못 다루더라도 성능 좋은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지.”

“그런 게 가능해?”

“원리는 아무도 모른대. 그래서 제작은 불가능한 상태.”

“옛날에 만든 걸 쓸 수 있을 뿐이네?”

“그렇지. 그리고 레거시의 종류는 다양해서 분류하기가 어려워. 형태도 각양각색이고. 작은 얼음을 만들어내는 귀여운 레거시가 있는가 하면, 어떤 건 저택 한 채를 한순간에 불태워 버릴 수도 있다고 해.”

“불치병을 고치는 레거시도 있을까?”

로운이 말했다. 목소리가 씁쓸했다. 친모가 아프다고 했었나? 밀레나는 앞을 보며 대답했다.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게 발견되면 전부 황가로 흘러들어 가게 될 거야.”

“그렇겠네.”

로운이 미소를 지었다. 평상시와 달리 입꼬리가 살며시 떨렸다.

밀레나는 단어 몇 개를 입 안에서 굴리다가 이내 안으로 삼켰다. 싸구려 동정은 안 하는 게 좋으니까. 진심으로 로운을 위할 정도로 마음을 터놓은 것도 아니고.

“역시 밀레나는 대단해. 모든 수업을 다 들었지?”

“배우는 건 즐거우니까. 빼먹을 순 없지.”

“열이 펄펄 나도 수업에는 반드시 참여했으니까. 나도 그런 끈기를 배워야 하는데.”

“내가 보기엔 너도 할 수 있어.”

“난 못 해.”

“못 하는 건지 하기 싫은 건지, 너만 알 수 있는 거니까 뭐라 안 할게.”

거기서 대화가 끊겼다.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화젯거리를 고민 중인 로운을 내버려 두고 주변 경관을 살폈다.

둔 중심지는 지겹게 돌아다녔으나 시민 거주지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포장된 도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바닥이 오폐수로 질척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나?

“재미없는 곳이야.”

밀레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시민을 보며 말했다. 마흔이 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이쪽을 보자마자 벽에 바짝 붙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오물이라도 되는 양 멀리 비켜섰다.

“귀족과 시민의 화합. 될 것 같지가 않네.”

황제 폐하가 신년 연설로 화합을 내세운다고 한들 뿌리 깊게 박힌 갈등이 사라질 리 없었다.

능력주의, 시민과의 연계를 부르짖는 신흥 귀족도 본토 귀족을 찍어 누른 다음에는 바뀔 것이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니까.

균등한 분배가 정말로 가능했다면 누군가는 이뤄냈을 것이다. 당장 계획도시인 둔만 봐도 철저하게 귀족 거주지와 일반 시민 거주지가 나뉜 상태였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구별과 차별이 황제의 바람대로 사라진다면, 그거야말로 위대한 마법사의 마법 아닐까?

아니, 마법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이 격변하지 않는 한 이 구도는 영원불변할 터였다.

“저기.”

밀레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한쪽 얼굴이 짓뭉개진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소쿠리를 내밀었다. 표면이 살짝 마른 사과가 소쿠리 안에서 굴러다녔다.

“하나만 사주실 수 있나요?”

밀레나는 여자와 사과를 번갈아 보았다. 사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필요한 물건이라면 제값 주고 사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상태가 불량한 사과를, 먹으면 탈이 날 것처럼 생긴 사과를 돈 주고 사야 할 이유가 있나?

동정심을 발휘할 때인가?

귀가 아프도록 들은 귀족의 의무를, 시민을 이끌어야 할 우등한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때인가?

“필요 없어요.”

밀레나는 여자한테 말했다. 여자는 금방 주눅이 든 얼굴로 쳐다봤다.

“제대로 된 사과가 있다면 사줄게요. 하지만 이런 건 살 수 없어요.”

말을 끝내고 발걸음을 뗄 때였다. 로운이 지갑을 꺼내는 게 보였다.

“다 해서 얼마죠?”

“이거 다요?”

“네. 전부 다 줘요.”

로운이 찌그러진 은화 한 개를 내밀었다. 거슬러줄 잔돈이 없다며 기겁하는 여자에게 로운은 웃음을 보였다.

“나머진 가져요.”

멍하니 쳐다보던 여자가 소쿠리를 넘기고 부랴부랴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거 먹을 수 있겠어?”

밀레나가 물었다.

“아니. 못 먹을 거 같아.”

“그런데 왜 샀어?”

“불쌍하잖아. 나이도 많아 보이고.”

사과를 뒤적거리던 로운이 소쿠리를 길가에 버렸다. 땅에 튕긴 소쿠리가 몇 바퀴 구르다가 멈췄다.

길바닥에 뿌려진 여덟 개의 사과를 시민들이 잠시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귀족은 아랫사람을 돌볼 의무가 있잖아.”

로운이 말했다.

의무. 밀레나는 사람들 발에 치여 어디론가 사라진 사과를 생각했다.

적당한 의무. 편리한 의무.

흔한 풍경이지만 오늘따라 왠지 마음에 안 든다. 왜일까?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래.

불현듯 건방졌던 꼬마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고양이를 받아간 그 꼬마.

“시민도 사람이지?”

밀레나는 로운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귀족도 사람이고.”

“어.”

“그래. 둘 다 사람인 거지. 뭐 하나 잘날 것 없고 뭐 하나 특별한 것 없는 보통 사람.”

조금 앞서 가던 로운이 고개를 틀며 말했다.

“그건 아니야. 우린 특별하니까. 같은 사람이지만 달라.”

확고한 대답이었다. 당연한 대답이기도 하고. 본토 귀족의 아이로서 훌륭한 생각이었다.

평상시라면 흘려듣거나 어느 정도 동조했을 것이다. 우월한 우리가 모자란 시민을 이끌어야 한다는 건 반박 불가한 전제니까.

근데 그게 맞는 걸까?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던 꼬마가 자꾸만 떠올랐다.

여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생각나는 거지?

아무래도 주변 풍경 때문인 것 같았다. 구질구질하고 개성 없고 단조로운 시민의 거리가 그 아이를 기억나게 했다.

“조금만 더 가면 서민들이 여는 작은 시장이 나온대. 성도의 공방 거리와는 다른 의미로 재미있을 거야.”

미엔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심각한 얘기는 다 끝났는지, 앞에 뭉친 애들도 낄낄 웃고 있었다.

“우리도 가자.”

로운이 턱짓했다. 밀레나도 잡념을 날려 보내며 움직일 때였다.

털이 복슬복슬한 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덩치가 무척 컸다. 성도에서는 보기 드문 큰 개였다.

지금 성도는 고양이, 혹은 몸집이 작은 개를 기르는 게 유행이니까.

골목으로 펄쩍 뛰어가던 개와 눈이 맞았다. 꼬리가 바람 맞은 갈대처럼 촐싹거렸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쳐다보던 개가 몸을 꺾어 사라졌다.

“밀레나?”

로운이 서너 걸음 앞에서 불렀다.

“어.”

“안 가?”

“잠깐만.”

애완동물은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덩치 큰 개를 보고 나니 호기심이 생겼다.

일으켜 세우면 내 키보다 크겠지?

매끈한 고양이 털과 달리 사라진 개의 털은 북슬북슬해서 촉감도 다를 것이다.

관심이 생겼으니 이제 움직일 차례였다.

“나 잠깐만 따로 움직일게.”

“어?”

“먼저 가.”

“밀레나!”

로운을 뒤로한 채 개가 사라진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이 따분한 거리에서 처음으로 흥미로운 걸 찾아냈다. 최소한 만져는 봐야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곳에 교관들보다 뛰어난 인간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삼층 높이의 건물이 길게 늘어선 골목으로 진입했다. 공중을 가른 빨랫줄에 빨래가 주렁주렁 걸려 있다.

초가을로 진입한 날씨 덕인지 꽤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 앉아 있었다. 다들 태평한 얼굴이었다.

밀레나는 턱을 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골목을 누볐다. 가끔 시민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거리에서 본 시민들과 달리 겁내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이 덜했다.

개는 어디로 간 거지?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덧 골목 끝에 도착했다. 골목 끝에 세워진 집에는 하얀 천이 문틀에 묶여 있었다.

장례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천을 풀지 않은 걸 보면 최근에 식이 진행된 모양이다.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온 건 오른쪽이었다. 담장이라 부를 수도 없는 낮은 벽. 거기에 개가 누워 있었다.

저기 있었네, 반가움에 다가가다가 또 다른 것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나무토막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남자애. 차림새는 달랐지만 누군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밀레나는 남자애 곁으로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남자애는 책인지 종이 다발인지 모를 것을 집중해서 읽는 중이었다.

“고양이, 맞지?”

밀레나가 소리 내어 말했다. 하지만 남자애는 반응이 없었다. 집중력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크게 소리를 내려다가 문득 남자애 표정을 보게 됐다.

어디서 많이 본 눈빛이다. 밀레나는 서재에서 업무를 보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절대로 방해해선 안 될 그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밀레나는 반쯤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남자애를 지켜보고 있을 때 다리 쪽이 간지러워졌다. 덩치 큰 개가 코끝을 비비고 있었다.

이 애가 주인인가?

밀레나는 쭈그려 앉아 개의 눈을 바라보았다. 집에 도둑이 들어도 활짝 웃을 것처럼 순해보였다.

여전히 글을 읽는 남자애를 슬쩍 쳐다본 후 개 턱밑에 손을 댔다. 예상한 대로 감촉이 색달랐다. 종일 만지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 따라갈래?”

밀레나는 둥근 개의 눈을 보며 살짝 웃었다.

* * *

가하란은 지금 말을 걸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 기록지를 읽어야 할지 헷갈렸다.

“뭘 먹으면 이렇게 클 수 있는 거야?”

여자애가 툴한테 말을 걸었다. 한동안 말없이 쓰다듬기만 했는데, 몇 분 전부터는 저렇게 혼잣말을 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을까.

기록지에서 눈을 떼고 여자애를 바라볼 때였다. 여자애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아까 내가 물었는데 못 들었지?”

“무슨 말을 했나요?”

툴을 간지럽히며 말하던 여자애가 돌연 손을 멈췄다.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나 기억 안 나?”

“나요. 고양이 잡아주신 분.”

“기억하네. 그땐 편하게 말했잖아.”

가하란은 귀 뒤쪽에 손을 살며 올리며 말했다.

“아는 아저씨가 조심해야 한다고 해서요.”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뭔 짓 할 것도 아니고.”

여자애가 다시 툴을 만지작거렸다.

“얘 이름은 있어?”

“툴이요.”

“…이요?”

“툴이야.”

가하란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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