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자자, 길을 트세요! 우리들의 대장, 아리따운 영애, 밀레나 엔첸세 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미엔이 방문을 열면서 말했다. 밀레나는 손으로 미엔의 입을 틀어막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생도 네 명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브엘라, 노엔, 다비엘, 율.
다들 본토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밀레나, 얼굴 보기 너무 힘든 거 아니야?”
율이 다가와 팔짱을 꼈다. 키 차이가 심해서 어정쩡한 팔짱이었다. 밀레나는 팔짱을 풀어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여섯 살이나 많은 율은 훈련 땐 침착한 동료지만, 사생활에서는 애처럼 굴 때가 많았다.
팔짱을 억지로 풀고 거리를 두면 칭얼대면서 옆에 붙을 것이다. 그러니 내버려 두는 게 속 편했다.
브엘라와 노엔, 다비엘이 차례차례 말을 걸어왔다. 인사를 해오는 순서도 변함이 없었다.
가문의 권력 크기가 인사 순서를 정했으니까.
“다른 애들은?”
밀레나는 알면서도 물었다.
“우리끼리 친목회를 갖는데 다른 애들을 불러올 필요가 있나. 그쪽 애들은 따로 만나서 잘 놀고 있을 테니 염려 마.”
모든 생도가 차별 없이 같은 취급을 받는 스콜라.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스콜라 교정 안에서 차별 대우란 없었다. 1등 귀족의 자제건 시민의 아이건 생도란 옷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순간 모두 전우였다.
하지만 훈련이 끝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오는 순간, 계층의 분리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본토 귀족과 신흥 귀족, 그리고 일반 시민.
교관의 외침이 없는 이곳에선 끼리끼리 뭉치는 게 당연했다.
못마땅한 건 아니었다. 이건 순리에 가까웠으니까. 스콜라 생도 이전에 본토 귀족의 피를 잇는 사람이고.
단지 재미가 없을 뿐이었다. 변함없는 관계 속에서 무슨 새로운 재미가 솟아날까.
요정의 안뜰 요리가 아니었으면 절대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다.
“밀레나. 키가 좀 컸나?”
“그대로야.”
“그런가?”
율이 벌떡 일어서더니 키를 재자며 일으켜 세웠다.
“큰 거 같은데?”
밀레나는 됐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열 살이 됐지만 여전히 또래 남자애들보다도 키가 작았다. 반면 율은 기수 중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했다.
파난 교관은 우리 둘을 가리켜 ‘난쟁이와 길쭉이’로 불렀다. 호칭에 반감을 갖고 따진 적이 있으나 소용없었다. 억울하면 키 큰 뒤에 다시 말하라는 파난 교관 말에 이만 갈았을 뿐이다.
“길쭉이. 자꾸 밀레나 놀리지 마.”
미엔이 말했다.
“놀리는 게 아니라 부러운 거야. 날 봐. 너무 크니까 약혼 상대가 기겁하잖아. 게다가 드레스 맞출 때마다 치수가 계속 달라져서 그것도 골치 아파. 난 좀 더 아담해지고 싶은데.”
밀레나는 율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다.
“그렇게 부러우면 좀 떼줘. 난 크고 싶으니까. 연습용 검을 더 쉽게 쓰고 싶어. 물론 내가 네 나이 될 때쯤에는 더 크겠지만.”
신장이 작으면 불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전투만 해도 팔이 짧다 보니 상대를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한 뼘만 더 길었어도 모의 전투에서 더 좋은 점수를 낼 수 있었을 텐데.
“금방 클 거야. 내 사촌도 열 살부터 부쩍부쩍 크더라.”
로운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로운을 보고 있으면 사교성이 뛰어난 강아지가 떠올랐다.
인상은 좋지만, 스콜라 생도로서는 조금 아쉬운 느낌?
육체와 정신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훈련에서 로운은 항상 먼저 손을 들고 탈락했다. 더 버틸 수 있어 보이는데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도전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왜?”
빤히 쳐다보자 로운이 머쓱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냥.”
그러자 미엔이 끼어들었다.
“뭐가 그냥이야? 나한테도 관심을 줘. 난 얼마든지 그 관심을 받아줄 준비가 됐으니까.”
“그냥은 그냥이야. 무슨 이유가 있어.”
“그러면 나도 그냥 쳐다봐줘. 난 밀레나가 봐주는 거면 어떤 이유든 좋으니까.”
로운이 세상 태평한 개라면, 미엔은 천연덕스럽게 굴면서 자기 잇속은 다 챙기는 고양이였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귀족의 표본이었다. 그렇기에 배울 점도 있고 꺼려지는 점도 많은 동료.
미엔이 살갑게 구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어른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
가치가 있기에 투자한다.
미엔은 그 본심을 숨기지 않고 전해왔다. 열렬한 구애에 대응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고 보니 율! 그 브로치 정말 예쁜데? 분위기하고 잘 어울려.”
“그래? 살짝 신경 써봤는데.”
내버려 두면 알아서 관심을 끊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엔은 말했다. 능숙한 정치가는 적을 만들지 않는다고. 그리고 위대한 정치가는 적을 딱 한 명만 만든다고.
두루두루 친하게, 모나지 않고 원만하게. 그게 지금 미엔의 마음가짐이리라.
브엘라, 노엘, 다비엔. 이 세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기에 귀찮지도, 반갑지도 않은 그런 관계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에 오래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
“요리나 소개해주지?”
밀레나가 말했다. 수다 떨려고 온 게 아니니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미엔은 섭섭하다는 얼굴로 잠깐 쳐다보다가 이내 가벼운 웃음과 함께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우리 사랑스러운 친우 여러분. 요정의 안뜰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그 말과 동시에 율이 외쳤다.
“알파치가 보증한 훌륭한 레스토랑!”
말을 잘 안 하는 다비엔이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에 둔에 와야 할 이유 중 하나.”
미엔이 다비엔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묵한 다비엔조차 입을 열게 만든 그 음식점. 재수가 없으면 예약하고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가게! 황제 폐하조차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엄청난 식당!”
미엔이 바구니를 엎은 보자기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보랏빛 자기에 앙증맞은 음식들이 플레이팅되어 있었다.
“코스를 담아오고 싶었지만 그건 능력 밖이기에 쁘띠 디저트를 담아왔지.”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색을 뽐내는 음식이었다.
“이게 마에스트로에 가장 가깝다는 요리사의 실력인가.”
“무슨 보석을 조각해 놓은 것 같네.”
미엔이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버터와 어떤 설탕으로 만든 어쩌구저쩌구 설명을 듣긴 했는데, 이미 잊어버렸어. 그런 게 뭐 중요해? 중요한 건 맛이지. 먹어봐. 친목회를 위한 내 성의를 생각하면서 먹어주면 더 좋고.”
호스트가 권하는데 마다할 게스트는 없었다. 밀레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 있던 디저트를 집어 입에 넣었다.
다들 손으로 덥석덥석 집어 먹었는데, 은 식기류를 사용하지 않는 버릇은 스콜라 교정을 벗어나도 이어지는 것 같았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라면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썼겠지만.
음식을 한동안 입에서 굴리다가 꿀꺽 삼켰다.
눈이 스르르 감기고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작은 요리에 이런 기분이 들다니.
다른 애들도 비슷한 감상인지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둥둥 떠다녔다.
“예약하고 제대로 된 코스를 먹어 봐야겠어.”
“요리에 대한 내 가치관이 약간이나마 흔들렸어. 미식가의 심정이 이해되네.”
“마에스트로에 가까운 요리사는 다르긴 해.”
짧은 소감을 툭툭 던졌다.
밀레나는 입에 남은 단맛의 여운을 충분히 즐긴 다음 의자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어. 그럼….”
볼일 다 봤으니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미엔이 얇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막아섰다.
“온 김에 얘기 좀 하고 가.”
“했잖아.”
“내 6개월의 기다림을 고작 대화 1분으로 대신한다면 좀 섭섭할 거야.”
밀레나는 미간을 살짝 오므렸다가 작게 숨을 토해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받은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게다가 시간을 내줘도 괜찮겠다 싶을 만큼 훌륭한 디저트였다. 만약 이곳에 코스 요리가 깔려 있었다면 미엔을 향해 한껏 웃어 줬을지도 모른다.
자리에 도로 앉았다. 옆에 붙은 율이 다시 팔짱을 끼며 싱글벙글 웃었다.
“친애하는 동기 여러분. 둔에 와서 손가락만 빤 지 곧 있으면 한 달이 되어갑니다.”
“한 달은 아니지.”
율이 말했다. 미엔은 손가락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시간은 후딱 지나가니까 곧 한 달이 될 거야. 아무튼 그동안 우리는 지겹게 둔을 구경했고, 또 구경했고, 또 구경했지.”
예정대로라면 거병관리국 내 시설에서 테스트 및 훈련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문제’ 때문에 모든 행사가 미루어진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솔 교관에게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너흰 알 권한이 없다.
권한이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입 다물고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귀족이란 신분도 스콜라 교관 앞에선 쓸모가 없었다. 스콜라는 제국을 대표하는 양성기관이고, 그곳을 담당하는 각 교관들은 귀족 이상의 가치를 지녔으니까.
멋모르고 교관에게 대들었다가 황가와 의회, 양측에게 눈칫밥을 산 멍청한 귀족 얘기는 아직도 유명했다.
“더는 구경할 곳도 없고 할 것도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지.”
“그래서?”
밀레나는 턱을 괴며 미엔에게 물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안 가본 곳이 있더라고.”
“어딜 말하는 건데?”
“둔 중심지를 벗어난 곳. 자유 시민이 머무는 곳을 지나 일반 시민들이 사는 지역. 한번 가보고 싶지 않아?”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다지 흥미가 안 생기는데.”
“유흥거리로는 괜찮아 보이지 않아? 그리고 귀족의 의무 중 하나잖아. 시민의 삶을 관찰하는 거. 그래야 적절히 이용할 수도 있고.”
“따분해.”
“방구석에서 책 보는 것보단 재미있을 거야? 게다가 여긴 계획도시 둔이야. 음침한 골목에 별별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은밀히 유통되는 ‘레거시’를 보게 될지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밀레나는 거절하며 반쯤 일어섰다. 하지만 율의 손이 옆구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기우뚱거리며 다시 앉았다.
“그러지 말고 가보자. 미엔이 한 말치고는 꽤 괜찮아 보이는데.”
“난….”
시선이 모여들었다. 어차피 너도 심심하잖아, 다들 그런 눈빛이었다. 밀레나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재미없을 거래도.”
“여기 있는 것보단 낫겠지. 좋아! 우리 대장도 허락했겠다, 교관님께는 내가 말해볼게.”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가는 미엔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