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스콜라 생도들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첼은 취조실에서 나서면 디온에게 물었다.
“일정이 약간 미뤄지긴 했습니다만 예정대로 진행할까 합니다. 물론 감찰단 쪽에서 문제 삼으면 일정 자체를 취소해야겠죠.”
“장차 거병 기사가 될지도 모르는 귀한 재목들입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어른들이 배려해 줘야겠죠.”
이번에 발탁된 스콜라 생도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의회에서 눈여겨보는 아이가 넷을 넘을 정도였다.
디온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군부의 기틀이 될 친구들이니 좀 더 신경 써 보죠.”
“하하, 사령관님께선 점찍어둔 아이가 있나 봅니다.”
“1등 가문이나 황가에 뺏기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얼굴도장을 찍어둬야죠. 특히나 이번 정기견학에 참여한 생도들은 하나같이 뛰어나니까요.”
첼은 생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물었다.
“사령관님께선 누굴 눈여겨보고 계십니까?”
“미엔과 로운.”
“둘뿐인가요?”
“한 명이 더 있습니다만, 그 아이를 탐내는 자들이 많아서 입에 담기가 조심스러워지는군요.”
“사령관님께서 그토록 탐내시는 생도라니. 점점 궁금해집니다.”
디온이 이가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총집사님께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뛰어난 생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도드라진 아이이니.”
첼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밀레나 엔첸세. 다들 그 아이를 주목하고 있죠.”
“폐하께서도 눈독을 들이셨겠죠?”
“글쎄요. 허스 경이 사라졌다고 한들 지금 폐하 곁에는 테인 경이 버티고 있습니다. 무적이란 소문이 자자하고, 소문만큼이나 강하죠. 몇몇은 허스 경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니….”
“사람이 괴물보다 뛰어나단 말을 전 믿지 않습니다.”
디온이 말허리를 자르며 단호히 말했다. 첼 역시 웃음기를 머금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총수의 이름은 아마 제국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회자될 겁니다. 상식을 넘어선 그 검을 곁에서 본 사람들은 절대 잊을 수 없으니까요.”
계단을 올라 지하실을 벗어났다.
디온이 사령관실로 향하는 복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간 어떻습니까?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기꺼이 응하고 싶으나 처리해야 할 일이 있군요.”
“그러면 차는 다음에 마시는 걸로 하죠.”
사령관과 악수하고 중앙사령부 건물을 나섰다. 대기 중이던 루카와 하브가 조용히 옆에 붙었다.
첼은 루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면회는 잘 진행됐나?”
“예.”
“그럼 됐군. 수고 많았네. 오늘은 이만 됐으니 자네 볼일 보게.”
“알겠습니다.”
군례를 올린 루카가 뒤돌아서서 건물로 들어갔다.
“저 친구와 얘기 좀 해봤나?”
하브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업무적인 대화만 몇 마디 나눴습니다.”
“고지식한 면은 있으나 쓸 만한 사람이니 친해져 보는 게 어떻겠나?”
“그게 해야 할 일이라면 해내겠습니다.”
첼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키지 않으면 됐네. 자네가 심심할까 봐 해본 말이니.”
“선생님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내가 자네를 그렇게 빡빡하게 굴리진 않았을 텐데?”
“그만큼 선생님께 배울 것이 많다는 뜻이죠.”
말하면서 파르르 입술을 떠는 하브였다. 억지스러운 미소였다.
“연습해도 안 되는 게 하나 있긴 하군.”
“아직도 어색합니까?”
첼은 대꾸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에 앉은 하브가 내일 일정을 읊기 시작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첼은 넥타이를 살짝 풀며 말했다.
“자네는 이번 사건의 주동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하브가 수첩을 덮었다.
“표면으로 드러난 사실과 정황으로 봤을 때 황제 폐하께서 준비해온 일 같습니다.”
“근거는?”
“둔 수뇌부, 그중에서도 둔 군부의 약화는 곧 폐하께 득이 되니까요.”
“연합왕국의 개입 가능성은?”
“무역로가 막 열린 시기입니다. 연합왕국 측 대상단도 둔을 향해 출발했고요. 서로 득을 볼 수 있는 시기에 문제를 터트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제국 내 다른 세력이 거병을 원해 탈취했을 가능성은?”
하브가 잠시 말을 멈췄다. 마차가 두 블록 정도 움직였을 때 닫힌 입이 열렸다.
“진실로 거병을 원했다면 둔에 있는, 그것도 거병관리국에 보관된 모듈을 노리지 않았을 겁니다.”
“자네라면 어딜 노렸겠나?”
“최전선에는 여전히 거병이 배치돼 있습니다. 경비가 삼엄하다 한들 둔 중심만큼은 아닙니다.”
“최신 기술을 훔치기 위해 무리수를 둔 거라면?”
“선생님께서 제게 전해주신 정보에 의하면, 죽은 용의자가 노렸던 창고에는 범용 모듈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가 범인은 밤이 아닌 낮에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건 거병관리국과 군부의 경비체계의 허점을 노린 것일 수도 있지만….”
“수년간 조용히 밑작업을 해온 것치고는 마무리가 조금 허술했지.”
“그렇습니다.”
구스타. 이젠 시체가 돼버린 범인은 오랜 기간 둔에서 생활하며 주변인들을 포섭했다.
점조직화된 범행 체계와 절묘한 정보 누락. 둔의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거병관리국 내부까지 드나들 정도로 완벽함을 자랑하던 범인이 마지막 순간에 실수했다.
그것도 대낮에 군부의 추격을 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를.
“걸린 게 아니라 드러낸 것이 아닐까요?”
하브가 말했다.
“보안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다음 자살함으로써 임무를 완성했다?”
“어디까지나 제 보잘것없는 추론입니다.”
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차가 흔들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창밖으로 갖춰 입은 귀족들이 거닐고 있는 게 보였다.
“총수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튤립 전쟁. 아잔탄스 가가 정리되자마자 터진 이번 사건. 기이할 정도로 폐하께 도움이 되고 있긴 하지.”
“누군가 끼워 맞춘 것처럼 말이죠.”
“자네라면 이토록 노골적으로 일을 벌이겠나?”
“저라면 안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직접 행동하신 거라면….”
하브가 말을 아꼈다.
“강경파도 때론 학을 떼는 게 폐하의 방식이니.”
첼은 중지에 낀 반지를 천천히 돌렸다. 이 정도 가설은 누구나 세울 수 있었다. 촉각을 곤두세운 자들이라면 황제의 다음 행보를 주목할 터였다.
정말로 의회를 찍어 누르기 위해 이번 일을 계획한 거라면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령관 해임 건을 꺼내 들 것이다.
군부의 수장, 총수 자리가 공석인 지금 군부는 황가와 의회 어느 쪽 편을 들어줄 것인가.
“포섭을 끝내고 행동하신 거라면 일단 한 대 맞아야겠군.”
의회와 한 몸이 된 본토 귀족과 새 바람을 원하는 신흥 귀족. 황제 편에 설 신흥 귀족까지 고려한다면 이번 세력 구도는 의회에게 불리했다.
“생각을 달리해야겠군. 특수감찰단, 그 친구들의 독단성이 이번엔 우리 편이 되어줄지도.”
첼은 하브의 눈을 바라보았다. 젊은 수행원의 생각 줄기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까.
“감찰단 단장은 특이한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특이하지.”
“절대적 중립을 표방한다고 하나 정치에 중립이란 게 존재하는지, 저는 의문스럽습니다. 감찰단 단장 역시 황제의 명을 받들고 이곳 둔에 오는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누가 뭐래도 단장에게 권한을 부여한 건 폐하시니까.”
첼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상식 너머에 있는 자들이 분명 존재하지.”
“감찰단장 역시 그런 사람입니까?”
“비상식적이지. 지극히 논리적인 인간이나 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기묘한 남자야. 때문에 폐하께서도 후회 중이시지. 그 인간에게 칼을 쥐여준 걸 보면 말이야.”
하브의 무뚝뚝한 얼굴이 한순간 깨졌다.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 채 하브가 물었다.
“폐하께서도 후회라는 걸 하시는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셨겠지. 보통이 아닌 남자니까.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원리원칙을 준수하며 일할 거라고는 폐하께서도 생각지 못했을 거야.”
“감찰단장은 대체 어떤 인간상입니까?”
첼은 검지로 턱을 몇 번 두드리다가 대답을 내놓았다.
“웃으면서 황제의 치부를 들추고, 기뻐하며 최고 어른들의 비밀을 캐내는 정신병자. 그걸 무기 삼아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독립해버린 인간.”
하핫, 사람 신경을 긁는 경박한 웃음소리가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났다. 그 인간의 웃음은 쉽게 잊히질 않지.
“곧 만나게 되겠지. 자네도 배울 게 많을 테니 기대하고 있게. 어떤 면에서는 폐하보다 뛰어난 인간이니.”
말을 마친 첼은 어깨를 살짝 주무르며 눈을 감았다.
“자고 있을 테니 도착하면 깨워주게.”
“알겠습니다, 선생님.”
마차가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첼은 어둠 속에서 제멋대로 뒤엉키는 제국 실정을 생각하다가 서서히 잠이 들었다.
* * *
밀레나는 따분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벌써 며칠째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성도에 남아서 교육을 받는 게 훨씬 나았다.
“밀레나!”
의자에 앉아 책을 보던 밀레나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마를 찌푸렸다.
지치지도 않는 바보들이 또 찾아온 것이다.
밀레나는 대꾸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겼다. 문밖에 있는 멍청이들을 상대하느니 고리타분한 역사서를 한 페이지 더 읽을 것이다.
“밀레나! 안에 있으면 대답해줘. 없어도 대답해주고.”
아까는 로운. 이번엔 미엔.
번갈아 가며 이름을 불러대는 애들이었다. 양손을 들어 귀를 막고 펼쳐놓은 책에 집중했다. 5분 정도 저러다가 돌아가겠지, 이렇게 생각할 때였다.
“안 나오곤 못 배길걸? ‘요정의 안뜰’에서 요리를 받아왔거든.”
미엔이 말했다. 으스대는 목소리가 떨떠름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거짓말하면 재미없어.”
밀레나는 문 쪽을 향해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6개월 전에 예약해둔 음식이라고. 견학이 확정된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이지.”
흥정 카드로는 제법 괜찮은 걸 가져왔잖아, 밀레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돌리고 천천히 문을 당겼다. 만면에 웃음을 띤 두 남자가 보였다.
“얼굴 보기 진짜 힘들다.”
이렇게 말한 건 미엔.
“그래도 봤으니까 됐잖아.”
지금 말한 건 로운.
“직모와 곱슬. 그거 정말 요정의 안뜰에서 만든 요리야?”
두 사람보단 바구니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별명을 붙이려면 참신하게 해주라. 직모가 뭐야. 난쟁이와 길쭉이만큼이나 센스 없어.”
미엔이 말했다.
“난 괜찮아. 곱슬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로운은 뭐가 됐든 좋다며 웃었다.
밀레나가 슬쩍 다가가 바구니 안을 확인하려 하자, 미엔이 뒤로 물러섰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뭔데?”
“동기 좋다는 게 뭐야. 2층에 애들 모여 있어. 같이 가자. 응?”
“훈련소에서 지겹도록 봤으면서 여전히 붙어 있고 싶어?”
“스콜라 내에서는 그냥 생도지만 지금은 약간 다르니까. 귀족 간의 교류, 좋잖아?”
미엔이 바구니를 흔들며 말했다. 밀레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 밖으로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