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자네들은 됐네.”
디온 사령관 말에 뒤따라오던 군관들이 멈춰 섰다.
“들어가시죠.”
첼은 디온의 안내를 받으며 철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먼저 반겨주었다. 취조실의 공기는 어느 곳이나 비슷했다.
방 중앙에 포박된 남자가 보였다. 고개를 떨군 채 미동조차 없었다. 디온이 다가가 남자의 이마를 밀었다.
고개가 들린 남자는 신음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알라스. 내가 자네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기억하나?”
알라스라 불린 남자는 달달 떨리는 입술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디온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살점이 터지는 소리가 방 안을 꽉 채웠다. 뺨을 맞은 알라스의 몸이 크게 출렁였다. 바닥에 고정된 의지가 삐걱삐걱 녹슨 소리를 내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첼은 디온이 내준 의자에 앉아 잠자코 바라보았다. 고문 현장은 익숙했다. 직접 참여한 적도 있다. 붉은 피와 용의자, 부적절한 침묵은 이골이 날 정도다.
“자살한 구스타와 가장 밀접했던 자로 범행 사실을 어느 정도 자백한 상태죠.”
디온이 설명했다.
“조사했던 대로 모듈을 밀반출하려 했으나 범행 당일 내부 분열로 인해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사령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듈이 밖으로 나간 건 아니군요.”
거병관리국에서도 사라진 모듈은 없다고 확정했으니 한시름 놓은 건가. 수뇌부의 목이 날아가는 건 피할 수 있으리라.
“꼬리는 잡았지만 문제는 머리군요.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디온이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운반책은 아직 둔에 남아 있을 겁니다. 이번 일을 획책한 자는 둔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테니 잡을 순 없지만.”
“운반책이라. 둔만큼 수레가 많은 곳도 없으니 찾아내려면 골치가 아프겠군요.”
“아시다시피 물자 이동이 워낙 많은 곳입니다. 내부에서 이동하는 물류 하나하나 확인하지 못하죠. 도시로 들어올 때 신분이 증명되면 그때부턴 꽤 자유롭기도 하고.”
둔은 소규모 성이 아니라 거대한 계획도시였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 공사만으로도 아찔한 시간을 보냈을 정도다.
이 드넓은 공업, 상업 도시에 들어온 모든 물자를 점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물론 지금처럼 특수한 경우에는 군부의 강제력을 발휘해 조사는 할 수 있지만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용처가 확실한 수레와 짐마차를 제외해도 상상하기 싫은 숫자가 남죠.”
“도시의 보안 단계를 계속 최고 수준으로 유지할 수도 없고. 참 어렵게 됐습니다.”
둔에 물자가 묶이면 제국이 휘청거릴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 통행을 막고 붙들어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수감찰단이 도착하면 보안 단계부터 얘기해볼 참입니다. 죄를 들춰내는 것에 미친 승냥이들이지만, 둔의 물류 유통이 가진 의미를 모르진 않겠죠.”
디온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찰단장도 그 부분은 이해해 주겠죠.”
뺨을 맞고 반쯤 기절해있던 알라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디온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알라스가 비명에 가깝게 외쳤다.
“전부 다 말했어요! 정말입니다. 더는 말할 게 없어요.”
첼은 묶인 채 와들와들 떠는 남자를 유심히 지켜봤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한 건지.
인간은 대개 나약하나 종종 별난 놈들이 나타나곤 했다. 고문이 진행될수록 눈빛이 살아나는 놈들. 신념에 미친 자들은 육체에 가해진 고통마저 훈장처럼 여기곤 했다.
알라스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면 고문은 소용없었다. 정보를 내놓지 않고 거짓으로 기만하다가, 끝내 웃으면서 죽을 테니까.
“사령관님. 저자와 얘기를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디온이 뒤로 물러섰다. 첼은 의자를 들고 알라스 앞으로 갔다. 부르튼 눈두덩 사이로 흐리멍덩한 눈이 보였다. 연기인가 단념인가.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알라스라는 걸 알지만 다시금 물었다.
“아, 알라스입니다.”
“고향은 어디죠?”
“둔입니다.”
“이곳 토박이군요. 가족이나 친구들도 전부 둔에 있겠죠?”
“그, 그렇습니다.”
“가족들 혹은 친구들 중에 이번 일과 관련된 사람이 있습니까?”
알라스가 경련하듯 목을 거세게 저었다.
“없습니다! 가족은 아무 상관 없어요.”
“협조적이라 좋군요. 좋아하는 음악이 있나요?”
“예?”
“음악을 즐겨 듣지 않는다면, 좋아하는 음식은 어떻게 됩니까?”
감정 기복을 확인한 다음 평이한 질문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계절, 싫어하는 계절, 생일은 언제인지 따로 챙기는 기념일 같은 게 있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알라스는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머뭇거림 없이 묻는 즉시 답이 나왔다.
눈동자를 고정돼 있고, 고개를 틀거나 혀로 입술을 적시는 행동은 없었다. 발가락을 오므리지도 않고 어깨에 힘을 주지도 않았다.
궁리하며 대답하는 게 아니었다. 앞에 남자는 절실함을 담아 진실을 토해내고 있었다.
첼은 다리를 꼬고 잠시 뜸을 들였다.
“알라스 씨.”
“네.”
“왜 모듈을 훔치려 했습니까.”
“이미 다 말했습니다. 정말 거짓말 하나 없이….”
“나한테 다시 말해보세요. 뒤에 계신 분에게 말했던 대로.”
잠시 숨을 가다듬던 알라스가 사건 경위를 떨리는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사소한 부탁이었습니다. 정말 자잘한 심부름 같은 거였죠. 옮겨달라, 배달해달라, 받아달라.”
“죽은 구스타를 말하는 건가요?”
“예, 예! 거병관리국에서 일한다면서 자기 부탁을 들어주면 관리국 물류 일을 맡게 해준다고 했죠. 다른 곳도 아니고 관리국 하청이라는 말에 정말 열심히 도왔습니다.”
자기는 그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다. 고리타분한 얘기였지만 첼은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놈은 정말로 관리국 쪽 일을 제게 맡겨 주었고, 저는 꽤 괜찮은 수입을 얻게 됐죠. 의심이 싹 가셨어요. 믿음직한 사업 파트너라 생각하고 성실히 일했을 뿐입니다.”
거짓의 징조는 없었다. 첼은 질문을 다시 했다.
“범죄에 가담할 생각이 없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됐다는 건가요?”
알라스가 침묵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군요.”
“저, 저기….”
“그렇겠죠. 모듈을 빼돌리는 일에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썼다가 말이 새어 나가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아니요! 모듈 얘긴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냥 남는 부품을 빼돌린다고 들었거든요. 중요한 게 아니라 소각장에 버릴 그런 것들을….”
“거병 모듈인 줄을 몰랐다는 건가요?”
“예! 정말입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버리는 말로 기용한 건가.
신념도, 거대한 욕심도 없는 평범한 시민. 불법인 건 알지만 걸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가담한 안쓰러운 소시민.
“사건 당일에 무슨 일이 있었죠?”
“저는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넘겨받은 후 남문으로 이동하는 게 제가 맡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약속 시간이 돼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얼마간 기다리다가 저는 자리를 떴습니다. 사정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다음 날 이곳으로 연행된 거군요.”
알라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거 전붑니다. 제가 죄를 저질렀다는 건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 죽을죄를 저지른 건….”
“이용당한 처지인 만큼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알라스는 울 듯한 눈으로 예, 라고 대답했다.
첼은 디온을 바라봤다. 더는 들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디온이 밖에서 대기 중이던 군관을 불렀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군관들 손에 이끌려 나가는 알라스에게 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문이 닫히자 디온이 입을 열었다.
“다른 용의자들도 저자와 비슷한 상태입니다.”
“핵심을 아는 자가 한 명도 없겠군요.”
“놈들은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준비해 온 듯합니다. 주변 관계를 이용해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계획을 진행했겠죠.”
“연합왕국의 개입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군요.”
종전이건 휴전이건 결국 문서 쪼가리로 작성된 조악한 약속일 뿐. 양측 모두 언젠가 다시 시작될 국토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연합왕국 측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황제는 전쟁이란 카드를 만지작거릴 터였다.
전쟁이야말로 황권을 강화할 좋은 수단이니까.
“튤립 전쟁에 이어 연합왕국에 의한 둔 내부 공격. 황제 폐하께서 바라는 그림이겠군요.”
디온이 넌지시 말했다.
“어쩌면 밀반출 시도 역시 폐하께서 주도한 일인지도 모르죠. 시기가 묘하게 맞물려 있으니.”
둔의 행정처와 거병관리국은 황가의 입김이 닿아 있다. 그런 둔이 황제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은 건 정치적 중립을 표방한 디온 사령관 덕분이었다.
중립을 외쳤지만, 모순적으로 의회와 가까워진 사령관이기에 황제도 눈여겨봤을 터.
“불경하게도 의심이 되는군요. 폐하께선 둔 사령관 자리에 누굴 앉히고 싶을까요?”
첼은 웃으면서 디온을 보았다.
“전 이곳을 사랑하고 되도록 오래 있고 싶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도 그걸 윤허해 주셨으면 하고요.”
만일 이번 사태가 황제가 벌인 자작극이라면 어떨까. 진상을 아는 용의자는 자살했고, 다른 용의자들은 그저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보이는 현상으론 진범을 알아낼 수 없으니 남는 건 보안에 실패했다는 떨떠름한 사실뿐.
집요하게 책임을 묻고 물어 경계에 실패한 사령관에게 흠집을 낼 수 있다면?
사소하지만 명분이 생긴다.
사령관을 교체할 명분이.
그 과정에서 행정처와 관리국 인사들도 대거 교체되겠지만, 애당초 그 두 곳은 황제의 발아래 있었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밑그림이 예뻤다. 훤히 보이는데도 책잡을 수 없다는 게 황제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아잔탄스 가를 밀어내고 의회와의 기 싸움에서 승기를 잡아낸 황제가 이번엔 둔을 노리는 걸까.
“허스 경의 죽음이 황제 폐하를 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조용히 대답한 디온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전 허스 경의 죽음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차라리 수백 마리의 마수와 싸우다 전사했다면 그나마 납득했겠지만, 지병 때문에 죽었다라.”
“전쟁 영웅의 생존설은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나오고 있죠. 하지만 그분이 죽었기에 폐하께선 아잔탄스를 정리할 명분을 얻었습니다.”
“전쟁 영웅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참 알기 쉬운 명분이군요.”
첼은 의자에서 일어나 모자를 눌러썼다.
“대단히 불경스러운 얘기를 하나만 더 해보자면, 허스 경의 죽음을 누구보다 바랐던 건 어쩌면 폐하일지도 모릅니다. 막을 수 없는 무력은 혓바닥으로 먹고사는 위정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니까요.”
“정말 불경한 얘기군요. 그래서 있을 법하고요.”
전쟁 영웅이 살아 있다는 소리만큼이나 전쟁 영웅을 황제가 죽였다는 소리가 제국을 떠돌아다녔다.
무엇이 진실이건 제국기사의 총수가 없어짐으로써 당장 득을 본 건 황제였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또 다르겠지만.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군요.”
첼은 중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