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30분 뒤에 면회자들 돌려보낼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루카는 취조부 소속 군관에게 대답한 후 벽에 기댔다. 끊었던 담배가 갑자기 생각난다. 까끌까끌한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시간을 확인할 때였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그리고 내 걱정은 마. 금방 나가게 될 테니까.”
다른 접견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다들 면회를 끝내고 이별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면회를 허용했다는 건 수사가 어느 정도 끝났다는 뜻이니까.
“루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루카는 고개를 틀었다. 독립2군 소속 이등중사 헌트였다.
“헌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한 석 달 됐나.”
“나갔던 일은?”
“일은 무사히 끝났는데 돌아와 보니 죄인 취급이더라고. 덕분에 여기로 출근하게 됐지.”
“고생깨나 했겠군.”
“그나마 밖에 있던 우리야 취조 한두 시간이면 되니까 상관없지만, 안에 있던 애들은 죽을 맛이겠어.”
헌트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지하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 더위는 끝나긴 하는 건가?”
헌트가 군복 상의를 벗으며 말했다.
“곧 끝나겠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헌트가 담배를 꺼냈다. 처음 보는 마크가 담뱃갑에 찍혀 있다.
“연합왕국 쪽에서 들어온 물건이야. 맛이 기가 막힌데, 태워볼래?”
“이런 유혹에는 넘어가 줘야지.”
금연은 잠시 잊고 담배를 물었다.
헌트가 얇은 쇠막대기를 꺼냈다. 은은한 마법 파장과 함께 작은 불꽃이 막대기 끝에서 피어올랐다.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야?”
“기술부에 아는 놈이 하나 있어서 받아왔지. 애연가에게 사랑받을 제품이라나 뭐라나.”
“마나를 못 다루는 나 같은 놈에겐 쓸모없는 물건이군.”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어.”
헌트가 호들갑 떨며 담배를 힘껏 빨았다.
루카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설탕물을 발라놓은 것처럼 심한 단맛이 올라왔다.
“어때?”
“내 입맛은 아니야.”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소식 들었다. 독립3군에서 사령관 부속실로 옮겼다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출세했네. 수석부관하고도 동렬이 되는 건가?”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 잔심부름꾼이니까.”
“사령관 직속 심부름꾼이면 감사하다고 절할 정도 아닌가?”
“부러우면 시켜달라고 하던가.”
헌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첼. 그 총집사란 인간은 어때? 감상이나 말해봐.”
“소문대로야.”
“좋은 의미로? 아니면 나쁜 의미로?”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소문대로인 분이야. 이 정도로 소문과 부합하는 사람은 드물 거다.”
“위험한 양반이라는 건 확실하군.”
“그렇지.”
“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면 내가 묘비 정도는 세워줄게. 권력가에게 꼬리를 흔들던 불쌍한 친구가 여기에 잠들다.”
실없이 웃으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는 헌트였다. 주변을 서성이던 청소부 꼬마가 얼른 달려와 꽁초를 줍고 사라졌다.
루카는 청소부 꼬마를 바라봤다. 가하란과 비슷한 나이대였다. 별다른 재능이 없는 시민의 삶은 아마 저런 거겠지.
“뭘 봐?”
“내 자식들 고생 안 시키려면 돈을 더 벌어야겠다고 생각 중이야.”
“대단한 아버지 납셨네.”
“연금을 가불 받아 성도로 보내는 인간이 누구더라?”
그 질문에 헌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런 미련한 새끼가 나 말고 또 있어?”
루카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며시 들었다. 달려온 청소부 꼬마에게 담배꽁초와 동전 하나를 쥐여주었다.
“내 딸 말이야, 조만간 위넨 극단 시험을 볼 것 같아.”
헌트가 말했다.
“돈이 더 들어가겠군.”
“연금은 이제 손 못 대니까 이번에 받은 수당으로 해결해 봐야지.”
“돈 필요해?”
“내가 남한테 빌리는 거 봤어?”
헌트가 기지개를 쭉 켜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튤립 전쟁이다 뭐다 해서 한동안 성도가 시끄러웠잖아. 딸애가 다니는 학원에도 아잔탄스 가의 여식이 하나 있었대.”
“친한 사이였대?”
“1등 귀족 영애와 일개 군관의 딸이 친해질 리가 있나.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이더래.”
“죽었겠군.”
황제가 휘두른 칼에는 자비가 없었을 것이다.
“간만에 만난 딸이 이것저것 얘기해주는데 뭐라 말해줄 수가 없더라. 없어진 그 애는 파벌 싸움에 휘말려 죽었을 거야, 이렇게 말해줄 수도 없고.”
“딸애가 올해 몇 살이지?”
“이제 열 살.”
“다 이해할 만한 나이잖아.”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야.”
“용케 성도로 보냈군.”
“극단 배우가 꿈이라잖아.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여건이 되는 한 밀어줘야지. 게다가 우리 딸 보통 재능이 아니야.”
세상 모든 아빠는 다 비슷한 걸까. 올란트가 했던 말을 헌트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루카는 소리 내 웃으려다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 곧 성도로 보낼 예정이니까.
“왜 다들 성도로 못 보내 안달일까.”
루카는 푸념하듯 말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큰사람이 되니까. 둔도 좁은 도시는 아니지만 여긴 너무 삭막해. 애들이 뛰어놀 만한 곳은 아니지.”
“교육하는 곳이 아닌 증명하는 곳인가.”
“딱 그거야. 그러니 배우려면 성도로 가야지.”
헌트가 난간에 기댔다. 루카도 난간에 손을 얹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완만한 언덕 밑으로 둔의 시내가 보인다. 자로 잰 듯이 줄 맞춰 지어진 집을 보고 있으니 속이 답답해진다.
“스콜라 생도들이 왔다지?”
헌트가 물었다.
“얼마 전에 도착했어.”
“그 어린 친구들한테 미리미리 눈도장 찍어 놔야지. 언제 내 상관으로 올지 모르니까.”
“게네들이 임관할 나이엔 우린 은퇴했을 텐데.”
“그건 모르는 일이야. 출생신고서에 잉크도 안 마른 놈들이 상관으로 오는 게 한두 번이야?”
“전쟁 중이라 그랬지. 이젠 명분도 없으니 차근차근 올라올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전쟁 초기에 최전선에 지원할 걸 그랬어. 그랬다면 한몫 단단히 챙겼을 텐데.”
“단단히 챙긴 돈을 너는 못 썼겠지. 무덤에 묻혀 있을 테니.”
“가족이 풍족해진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아.”
“아까 누가 나한테 그러더라. 대단한 아버지 납셨다고.”
헌트한테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황제 말이야. 정말 귀족과 시민이 화합하길 원할까?”
“갑자기 그건 왜?”
루카는 헌트를 쳐다보았다.
“요번에 성도에 갔을 때 귀족 거주지를 보게 됐어. 좋더라고. 마법등이 무슨 유등처럼 널려 있어. 그거 전담하는 마법사가 우리 임금의 몇 배를 받으면서 관리하고.”
“귀족들이 사는 곳이니까. 그 정도 관리는 당연한 거야.”
“그래. 당연한 거. 네 말대로 귀족이기 때문에 그런 자원을 당연히 누리는 거겠지?”
루카는 헌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능력주의를 표방하지만 결국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건 귀족이란 말이지. 핏줄을 잘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이 정당화되잖아?”
“원래 그런 세상 아니었나? 새삼스럽게 뭘.”
“그래. 새삼스럽지.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라 되뇌는 게 유치할 정도로.”
루카는 기지개를 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듣는 귀가 많은 곳이었다.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하는 친구지만 장소를 못 가리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무슨 일 있었어?”
“허밀이 죽었어.”
허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이라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몇 초간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생각이 났다.
“성도에 있다던 네 친구?”
“용케 기억하고 있네.”
“너나 나나 그런 거 기억해두는 게 업무의 기본이니까.”
예전에 헌트가 말했다. 자신한테는 심장을 떼어줘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한 명 있다고.
“사고사?”
“사고라면 사고겠지. 그놈, 아잔탄스 가에서 일했거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묻지 않았다. 튤립 전쟁으로 아잔탄스 가가 역사에서 지워졌다. 직계는 물론 가문과 밀접하게 연관된 식솔들도 제거당했을 것이다.
“셈을 잘하는 놈이었어. 그거 하난 기가 막히게 했고, 그걸로 먹고 살았지. 그놈은 그냥 아잔탄스 가에서 주는 밥을 먹고 몇몇 장부를 관리했을 뿐이야.”
“헌트.”
루카는 진정하라는 의미를 담아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격양되고 있었다. 주변 시선이 끌리면 좋지 않았다.
헌트가 숨을 골랐다. 높아지던 음성도 차츰 낮아졌다.
“그게 죽어도 되는 이유일까? 귀족들 명예 놀음에, 권력다툼에 아무 죄 없는 놈이 유서조차 못 남기고 갔어. 그놈 자식들은 아빠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도 못해. 제수씨는….”
거기까지 말한 헌트는 돌연 빙긋 웃더니 담배를 물었다.
“엿 같은 세상이야. 그렇지?”
“그래. 엿 같은 세상이야.”
“루카. 꿈같은 얘기인데 들어볼래?”
“뭔데?”
“만약에 말이야.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이 빌어먹을 불합리가 사라지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정말 꿈같은 얘기네.”
고개를 끄덕이던 헌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꿈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꿀 수 있다고.
루카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지만, 헌트는 대답 없이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술 한잔할까?”
루카가 말했다. 바쁘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아니. 술은 다음에 마시려고. 이 갑갑함이 해소되는 그 날, 미친 듯이 마셔보려고.”
“그때가 오면 나도 불러줘.”
“그럴게.”
헌트는 꽁초를 손바닥에 비벼 끈 다음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루카. 그거 아냐?”
“뭐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다는 걸.”
“운명?”
“그래. 운명.”
“글쎄. 그런 드라마틱한 단어를 써야 할 정도로 내 인생이 굴곡지진 않아서.”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정말 있더라고. 평범한 소시민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이 갑자기 운명이라. 친한 친구의 죽음 때문에 속이 복잡한 것이리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세상에는 그런 운명을 거스르고 완전한 미래를 가져올 선견자가 있다는 거.”
나중에 또 얘기하자, 헌트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루카는 손바닥에 남겨진 꽁초를 보았다.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만 아니라면 괜찮을 텐데.”
힘들 때는 잠깐 방황하는 것도 해결책 중 하나였다. 헌트는 똑똑한 놈이니 금방 자신을 다잡고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고.
계속 엇나가면 목덜미를 잡고 끌고 오면 될 일이다.
“죽은 자가 돌아오고 불합리가 사라지는 세상이라. 꿈같은 세상이긴 하네.”
막연히 상상해 보았다.
떠나보낸 이들이 되돌아와 지난날을 되새김질하며 웃고 떠드는 걸.
나쁘지 않았다.
분명 즐거울 것이다.
한동안은 정말 행복해 미칠지도 모른다.
근데 그 상황이 계속된다면?
“꼬마야.”
루카는 청소부 꼬마를 불러 담배꽁초를 주었다.
쓸데없는 상상은 여기까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