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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7화 (325/558)

제27화

거대한 매가 눈앞에 있었다. 생긴 건 매서운데 눈빛은 순진했다.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

매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허공을 스친 손이 아쉽기만 하다.

거리를 벌린 매가 날개를 펼쳤다. 하늘을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길쭉한 날개였다.

창공으로 솟아오른 매를 멍하니 바라봤다. 빙글빙글, 누군가를 기다리듯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가하란은 매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알고 있었다.

저 매의 주인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젊은 시절의 핀들론이 말을 타고 옆을 지나쳤다. 그 뒤로 수많은 사람이 따랐다.

선망하는 모험가들의 질주였다.

“할아버지!”

소리를 내며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잡힌 건 연한 미소를 짓는 아빠였다.

“잘 잤어?”

아빠가 말했다. 가하란은 한동안 눈을 깜빡이며 아빠를 바라봤다.

꿈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제 할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아는데도 울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알기에 우울해지는 걸까.

“핀들론 할아버지를 봤어요.”

“그래?”

“말을 타고 땅끝을 향해 가고 있었어요. 할아버진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고요.”

“우리 아들 외로워하지 말라고 할아버지가 인사 왔나 보다, 그렇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다. 가하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마저 꿈이었다면 슬퍼서 온몸이 굳었을 것이다.

꿈의 여운이 서서히 가시며 기억이 이어졌다.

아빠와 만났고 도시락을 같이 먹었다. 아빠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은 어떻게 변했는지 한참 떠들다가 할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그때부터 계속 울었던 것 같았다.

부끄러울 정도로 엉엉 울었다.

다독여주는 아빠를 보고 있으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잠든 듯했다. 아마 맞을 것이다.

아빠 무릎에서 머리를 뗐다. 얼마나 잔 걸까.

“얼마 안 잤어. 졸리면 더 자도 되고.”

묻지도 않았는데 아빠가 대답해 주었다. 역시 아빠는 모든 걸 안다.

“루카 아저씨는요?”

도시락을 먹을 때까지만 같이 있었다.

“볼일이 생겨서 잠깐 나갔어. 왜? 아빠보다 루카 아저씨랑 있는 게 더 좋아?”

장난스럽게 되묻는 아빠였다.

고개를 가만히 젓고 있는데 아빠가 살며시 안아주었다.

“우리 아들 많이 힘들었겠네.”

“아니에요.”

“아닌 녀석이 그렇게 울어?”

“그건….”

변명거리가 없었다. 가하란은 코를 한번 훌쩍거리고 씩 웃었다.

“아빠가 옆에 있어 줘야 했는데, 미안해.”

“아빠가 왜 미안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이 번쩍 들렸다. 목말을 탄 가하란은 중심을 잡은 다음 손을 위로 뻗었다. 천장이 손가락 끝에 스쳤다.

“오랜만에 한번 뛰어볼까?”

말발굽 소리를 입으로 내며 방 안을 뛰는 아빠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내 신나서 와아 소리를 질렀다.

“어때? 아빠가 태워주는 게 말보다 훨씬 재미있지?”

“음… 말이 조금 더 신났어요.”

“이럴 땐 거짓말이라도 아빠가 최고라고 해야 하는 법이야.”

“전 그렇게 안 배웠는데요?”

“그래? 내가 가르쳤으니 어쩔 수 없지.”

방 안을 몇 바퀴 더 돈 후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빠는 숨이 찬다며 의자에 앉았다.

싱긋 웃는 아빠 얼굴을 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목 언저리, 아까는 옷으로 가려져 있던 부분에 옅은 멍이 보였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하란은 묻지 않았다. 알아야 했다면 아빠가 설명했을 테니까.

모른 척한다는 게 오히려 티가 난 걸까. 아빠가 손으로 목덜미를 만졌다.

“아빠 아픈 거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알지? 이 아빠가 얼마나 센지.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도 금방 나갈 수 있어.”

“알았어요.”

가하란은 배시시 웃었다.

“아, 맞다. 아빠, 집에 가구가 배달 왔어요. 아빠 이름으로.”

“그거? 아는 분이 선물해주신 거야.”

“아빠 친구예요?”

“친구라고도 할 수 있지. 선생님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분이셔.”

“아빠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어요?”

“그럼. 아빠가 엄청나게 세긴 한데, 그래도 무서워하는 건 있어.”

아빠가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가하란은 아빠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가하란.”

“네.”

“아빠랑 사는 거 어때?”

“뭐가요?”

“아빠랑 둔에서 사는 거 좋아?”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가하란은 턱을 들어 아빠의 눈을 보았다. 항상 눈을 마주하며 얘기하던 아빠가 지금은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전 좋아요.”

“지금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성도에 있는 학교도 다닐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성도에 있는 학교요?”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성도에는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있다는 걸.

“학교에 가면 여기서는 배우지 못하는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어. 네가 관심 있어 하는 마법공학도.”

“정말요? 마법공학을 배울 수 있어요?”

“절차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너라면 할 수 있어. 대학교로 옮겨가는 것도 가능할 테고.”

“대학교가 뭐예요?”

“제국의 근간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곳. 학술을 연마하고 응용 방법을 고안해 지식을 새로운 단계로 이끄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어.”

아빠는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괜히 긴장된다. 가하란은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아빠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면 네가 꿈꾸는 기술자에 다가설 수 있어. 둔에서는 힘들지만 성도라면 가능해.”

“아빠가 알려주면 되잖아요.”

“아빠도 이것저것 알려줄 수는 있지만, 성도에 있는 교수님들과 비교하면 배움의 깊이가 달라. 내가 답하지 못하는 질문도 그분들이라면 쉽게 알려줄 거고.”

가하란은 혼란스러웠다. 공부도 좋고 모험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아빠 곁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아빠가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무리 뛰어난 선생님이 있다고 해도 아빠보다는 못할 거라고, 가하란은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빠. 제가 귀찮아졌어요?”

애를 버리고 떠난 부모를 수도 없이 봐왔다. 흔한 일이었다. 어른들은 질타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아빠도 그런 걸까.

이제 일곱 살이 됐으니 네 앞가림은 알아서 하라는 걸까.

담담하게 말하던 아빠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가하란. 아빤 그런 생각 절대 안 해. 세상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게 너야.”

“그런데 왜 성도 얘기를 해요?”

“그건….”

머뭇거리던 아빠가 가하란을 꽉 안았다.

“미안해, 아들. 아빠가 말을 잘못했어. 네가 귀찮아졌다거나 싫어진 건 절대 아니야.”

가하란은 손을 아빠의 등 뒤로 뻗은 다음 옷을 꽉 쥐었다.

“아빠한테 배울래요.”

“아빠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이 있어도 아빠한테 배울 거야?”

“저한테는 아빠가 최고예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아빠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네. 우리 아들 가르쳐 주려면.”

“같이 공부해요.”

“그래. 같이 하자. 여기서 나가면 아빠가 배운 모든 것들을 너한테 알려줄게.”

아빠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빠의 눈은 웃고 있는데 어쩐지 슬퍼 보였다.

혹시 멍 때문에 아픈 걸까.

“아빠, 아픈 거예요?”

“아니야. 좋아서 그래. 우리 아들이 정말 좋아서 그래. 아 참, 생일날 물어본다는 게 깜박한 게 있어. 아들, 정말로 아빠 따라서 기술자가 될 거야?”

“네!”

힘차게 대답한 다음 손가락을 활짝 펴 보였다. 엄지와 검지를 차례대로 접으며 말했다.

“기술자가 될 거고 탐험가도 될 거예요.”

“두 개 다 이루려면 보통 노력으론 안 될 텐데?”

“꿈은 크게 꿔야 한다고 누가 그랬어요.”

아빠가 눈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지, 나중에 아빠도 볼 수 있을까?

“물론이죠. 같이 읽어요.”

“아빠도 어릴 땐 탐험가가 되고 싶었어. 랍파와 함께 미개척지를 나아가는 거지.”

“아빠는 미개척지에 가봤어요?”

“아니. 아빠는 꿈만 꿨어.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지.”

가하란은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지금이라도 가고 싶어요?”

아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아빤 다른 꿈을 이뤄서 괜찮아. 후회가 없지는 않지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할 거야. 네 엄마를 만나고 너를 만난 거.”

아빠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하란. 너도 언젠간 네 꿈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멋진 여자애를 만나게 될 거야.”

“그럴까요?”

“분명 그렇게 돼. 그때가 오면 절대 놓치지 마. 이건 아빠가 아니라 남자로서 해주는 충고야.”

“생각해 볼게요.”

아빠가 팔짱을 꼈다.

“말이 나온 김에 제니는 어때? 계속 어울려 다녔잖아.”

“…제니는 좋은 애지만 종종 감당하기 어려워요.”

“어떤 부분이?”

“고집이 세요. 잘 울고.”

“너도 만만찮게 고집이 세다는 건 알고 있지?”

“제니에 비하면 별거 아니에요. 아빠가 제니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요.”

제니가 얼마나 엉뚱하고 화가 많고 눈물도 많은지 설명하려다가 그만뒀다.

“싫은 건 아니네?”

“당연하죠.”

“잘 지내 봐.”

히죽 웃는 아빠를 보다가 하품을 크게 했다. 장례식 동안 계속 못 잔 탓인지, 잠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좀 더 자.”

“아빠랑 얘기할래요.”

“자고 나서 해도 돼. 시간 많아.”

아빠가 깔아준 모포에 몸을 뉘었다. 스르르 감기는 눈으로 마지막까지 아빠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담아서.

“걱정하지 말고 자. 아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옆에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 * *

루카는 접견실 문을 열었다. 모포를 덮고 자는 가하란과 옆에서 지켜보는 올란트가 보였다.

“아직도 자는 거야?”

“잠깐 깼다가 다시 잠들었어요. 지친 거겠죠.”

루카는 잠든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어른도 버텨내기 힘든 사건이 일곱 살 꼬마에게 연이어 벌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와 떨어졌고, 돌봐주던 할아버지가 숨을 거뒀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으리라.

“할아버지는요?”

“사령관님과 대화 중이다.”

“형님이 고생이 많네요.”

가하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올란트였다.

“…아빠, 절 버리지 마요.”

가하란이 뒤척이며 잠꼬대했다.

버리지 말라니,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올란트를 바라봤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피는 못 속인다고 저도 가하란한테 못 할 말을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성도에 가서 제대로 배워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죠. 둔은 첨단 기술의 도시지만 여긴 배우는 곳이 아니라 증명하는 곳이니까요.”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

“애가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귀찮아졌냐고. 머리가 아찔해지더라고요.”

루카는 의자에 앉았다. 같은 부모로서 올란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첼 님이 권유한 대로 자리를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르다고 생각했어요. 가하란이 다 큰 다음에 할아버지를 찾아가도 늦지 않다고. 근데 이런 일을 겪고 보니까 생각이 좀 바뀌네요.”

올란트가 루카를 바라보았다.

“형님. 형님 생각은 어때요? 가하란에게 말해주는 게 나을까요? 네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그런 부담스러운 결정을 나한테 넘기지 마.”

“머리가 복잡해요. 제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애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특별한 놈이에요. 가능성이 무한한데 지도해줄 선생이 무능력하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잖아요?”

“넌 무능력하지 않아.”

차기 치프로 거론되는 놈이 무능력하다면 둔에서 유능한 인간은 몇 없을 것이다.

“제가 가업을 잇지 않겠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안타깝고 아쉽고.”

“자기 자랑을 대놓고 하는 걸 보면 이제 살 만한가 보구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면회 시간이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루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가 다시 오마. 면회 시간 끝나가니까 가하란 깨워서 얘기 좀 하고.”

“그래야겠네요.”

“곧 풀려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첼 님과의 문제도 나가서 생각하면 답이 금방 나올 거고.”

루카는 군모를 쓴 다음 접견실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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