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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6화 (324/558)

제26화

유렐은 들고 온 보고서를 다시 들춰봤다. 달달 욀 정도로 확인한 보고서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읽고 또 읽었다.

그럴 것이 보고를 받는 상급자가 디온 사령관이었다. 항상 수석부관에게 서류만 전달했는데 이렇게 대면 보고를 하게 될 줄이야.

“오시죠.”

수석부관이 휴게실 문을 열며 말했다. 유렐은 보고서를 옆구리에 끼며 일어섰다.

“오늘 사령관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겁니다.”

냉정하게 말하는 수석부관이었다.

쩨쩨한 성격은 여전하군, 유렐은 속마음을 감춘 채 살짝 웃었다.

“당연히 실수하지 말아야죠. 사령관님 앞에서 실수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요.”

“부디 그 끔찍한 일이 안 일어나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유렐 취조부장. 업무보고 때 사고 나면 보좌관실에 피바람 붑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러니까 팁 좀 주시죠. 사령관님께 대면 보고는 처음입니다. 뭘 하면 안 되는지, 뭘 하면 점수를 따는지 알려주면….”

수석부관이 걸음을 멈췄다.

“좋습니다. 알려드리죠. 첫째. 질문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침묵하는 순간 끝입니다. 둘째. 사실만 보고하십시오. 진실 따윈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정황만 설명하시면 됩니다.”

“사견을 조금도 섞지 말라?”

“그렇습니다. 저희가 할 일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거지, 제안하는 게 아니니까요. 제안이 필요하다면 사령관님께서 먼저 말씀하실 겁니다. 생각해둔 게 있냐고.”

수석부관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위아래로 훑는 눈이었다. 아니꼽지만 불평하지는 않았다. 수석부관은 누가 뭐래도 사령관 최측근이니까. 사이가 불편해져서 좋을 게 없다.

사령관실에 들어가기 전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목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정면에 디온 사령관이 보였다. 뒷짐 지는 것으로 군례를 올렸다.

“유렐 취조부장.”

햇빛을 등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예!”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지?”

“2년 됐습니다.”

“오래됐군.”

“앞으로도 이곳 둔에서 사령관님을 보필하고 싶습니다.”

“이런 삭막한 도시가 뭐 좋다고. 성도로 영전해야 하지 않겠나?”

“성도만큼이나 중요한 곳이 둔입니다. 전 이곳에서 근무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군.”

사령관이 의자를 가리켰다. 군소리 없이 얼른 자리에 앉았다.

“오늘 구금자들 면회가 있다지?”

유렐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예. 이번 밀반출 사건과 연관된 가드리언 외 17명에 대한 면회가 있습니다.”

“17명이라. 남은 다섯에 관한 조사는?”

“주도자는 찾지 못했으나 정보 은닉에 도움을 준 자를 찾아냈습니다. 면회 금지를 내린 다섯 명을 중심으로 재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사령관이 다리를 꼬았다. 얼룩진 군화를 걸레로 닦아내며 말했다.

“면회가 허락된 17명은 무혐의라는 건가?”

“예.”

“확신할 수 있나?”

연이은 질문에 유렐은 바짝 긴장했다.

세상에 완벽한 일이란 없다. 흠결 없는 물건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흠집 정돈 보이기 마련이다.

사령관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만약 네 실수로 용의자를 놓아주게 된다면 감당할 수 있겠나?

거병 모듈과 연관된 일. 작은 실수조차 용납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렐은 며칠 전부터 준비해온 대답을 내놓았다.

“예. 면회를 허락한 17명은 무죄가 확실합니다. 이번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음을 제가 확인했습니다.”

“확인했다라.”

사령관이 손걸레를 내려놓았다. 깨끗해진 군화와 더러워진 손걸레가 눈에 밟혔다.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아 불안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선 그만한 각오와 배짱, 성과가 필요하니까.

유렐은 알고 있었다.

이번 건만 잘 넘기면 포장된 도로만큼이나 안락한 출셋길이 열린다는 걸.

일이 꼬이면 사령관 대신 오물을 뒤집어쓰고 똥통에 처박히는 거고, 잘 풀리면 충성심을 인정받아 둔의 중심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다.

위험한 만큼 보수도 크다.

군부에 들어온 사내치고 이런 기회를 놓칠 이가 몇이나 될까?

욕심과 과욕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 군부에 적을 진 자들이 평생 하는 일이었다.

“자신감에 차 있는 건 보기 좋으나 만약이란 게 있으니 언제나 조심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일단 잘 넘긴 건가?

유렐은 디온 사령관의 눈치를 봤다. 본다고 해서 백전노장의 속내를 간파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령관이 손을 내밀었다. 유렐은 보고서를 사령관에게 건넸다.

“가드리언. 이 친구의 면회자는….”

“아내입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건가?”

“예. 이곳에 오기 전 면회 신청 보고를 받았습니다.”

“가드리언의 혐의점은 뭐였지?”

“용의자가 도주하던 당일, 제철소에서 근무 중이었습니다.”

“그 외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조사 과정은 어땠나?”

“최근 행적을 파악하고 모든 동선을 점검해 봤습니다. 자살한 용의자와 겹치는 동선은 없었고, 친분도 없었습니다. 은행 계좌도 변동사항이 없었고요.”

“애꿎은 친구를 잡아뒀군.”

사령관이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론, 한스, 비비에나소, 홀, 로우가잔.

비슷한 보고가 이어졌다. 사령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보고서를 훑었다.

“다음은 올란트. 이 친구는 어땠나?”

유렐은 기억된 정보를 더듬었다.

올란트.

슬하에 자식이 하나 있고 아내와는 사별. 차기 치프로 지목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사건 당일 제철소에 없었다면 용의선상에도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앞선 용의자들처럼 간략하게 보고를 마쳤다.

“깨끗하다는 거군. 이 자도 면회 중인가?”

“신청을 받아 놨습니다. 아마 지금쯤 아들이 면회를 왔을 겁니다.”

“잘됐군.”

설명을 끝내자 사령관은 무미건조한 어투로 다음 목록을 불렀다.

그렇게 17명에 대한 간단한 보고가 끝났다. 유렐은 침묵한 사령관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 건가.

이번 최종 보고는 형식적인 것으로 주요 사항은 이전에 수석부관을 통해 전부 전달해 두었다.

꼬투리 잡을 게 있었다면 그때 명령이 내려왔을 터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혹시 며칠 사이에 중요한 단서가 나온 걸까? 사령관은 그걸 발견했고 날 시험해 보는 걸까?

“취조부장.”

“예, 사령관님.”

“17명. 그것도 인재들을 감금하고 폭행한 건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겠지. 게다가 다들 거병관리국 소속이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무고한 자들이 고생한 것도 사실이다. 사건 당일 제철소에 있던 주요 직책들은 거의 다 구금됐다가 풀려났으니까.

하지만 시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거병 모듈과 관련된 사건이었으니 일단 잡아넣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면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목숨이, 나아가 가족이 위험한 사안이었다.

뭐라도 건져야 했기에 폭력을 사용했다. 물론 윗선도 알고 있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건 상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는 눈감았으면서 이제는 토를 단다?

꼬리를 자르려는 건가.

곧 특수감찰단이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구마 줄기 뽑아내듯 죄란 죄는 다 엮어서 처벌하는 악질들.

거병 모듈 밀반출이란 거대한 문제는 윗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수사 과정에서 자행된 필요 이상의 폭력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가뜩이나 현 황제는 귀족과 시민의 화합을 신년 연설로 내세울 정도로 평등한 대우를 중요시했다.

지금까지 붙들어둔 17명 모두 시민이었다. 그중 일곱은 자유 시민권을 획득한 자유 시민.

폭행의 정당성을 설명한다고 한들 특수감찰단은 코웃음만 칠 것이다.

그놈들은 중앙 소속 관료들의 고충을 전혀 모르니까. 황가와 의회, 두 곳과 척을 진 미친놈들에게 융통성을 바라는 것도 무리였다.

“이번 건은….”

유렐은 침을 삼켰다.

왜 대면 보고를 시켰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사령관은 은밀히 요구하는 것이다.

과잉 충성으로 인해 벌어진 사고였고, 전적으로 내 책임임을 인정하라고.

저울질이 필요했다.

특수감찰단에게 들들 볶인 다음에도 군부에 붙어 있을 수 있을까? 사령관이 거둬준다는 보장은?

뭐 하나 얻지 못하고 버려지는 패가 되는 건 사양하고 싶다.

“17명에 대한 처우 개선을 신경 쓰게. 말이 안 나오게끔.”

대답하기 전에 사령관이 먼저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사고가 잠깐 정지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감싸 주겠다는 의미려나? 자잘한 일은 덮어줄 테니 용의자를 절대 놓치지 말라는 뜻인가?

일단 대답해야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너무 거창하군. 그저 면회 시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하란 뜻일세. 자넨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하마터면 얼빠진 표정을 지을 뻔했다. 유렐은 얼굴 근육이 날뛰지 않게 붙잡았다.

“아, 알겠습니다.”

“구금자들은 언제 풀어줄 예정인가?”

“조사를 끝낸 17명은 다음 주 중에 귀가 조치할 예정입니다.”

“무혐의라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특수감찰단이 도착하기 전에 용의자를 추려내고 싶은데.”

“모레까지 정리해서 귀가시키겠습니다.”

“마음에 드는군.”

돌려보낸다고 한들 감시망을 푸는 건 아니었다. 집으로 돌려보내도 문제는 없을 터.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능력을 의심받을 것이다. 그래선 안 되지.

“승냥이들을 상대하려면 준비를 제대로 해야지. 사람이 필요하면 부관을 통해 말하게. 차출해 줄 테니.”

“감사합니다.”

“가보게. 바쁜 사람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순 없지.”

유렐은 재빨리 일어나 경례 후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등지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일이 잘 풀린 거 같은데, 막판에 뭔가 꼬인 것 같았다.

사령관이 내게 바란 게 대체 뭘까?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써 봤지만 딱 떨어지는 게 없다.

처우 개선은 왜 명령한 걸까? 그보다 이번 대면 보고로 사령관은 뭘 얻으려고 한 거지?

막판에 면회자 얘기가 나오면서 상황이 미묘해졌다.

그래도 엇나간 느낌은 아니니 괜찮은 건가. 사람도 붙여준다고 했고.

고민하던 유렐 눈에 다가오는 수석부관이 보였다. 유렐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잘 풀린 것처럼.

“덕분에 대면 보고를 잘 마쳤습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렇게 보였습니까? 하하, 하하하.”

쩨쩨한 녀석에게 괜한 정보를 줄 순 없었다.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얼른 계단으로 향했다.

내려가며 사령관의 말을 되뇌던 중이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의외의 인물과 눈이 맞았다. 유렐은 벽에 붙으며 군례를 갖췄다.

사령관만큼이나 위험한 권력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첼 총집사. 그 뒤에 루카가 보였다. 독립 3군이지만 최근에는 그쪽 업무보단 첼의 보좌를 맡고 있었다.

첼이 눈짓으로 인사하며 지나쳤다. 얼굴을 기억해주면 고맙겠는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틀 때였다.

잠깐만.

유렐은 루카의 등을 바라봤다.

이름 하나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올란트.

루카는 올란트가 용의선상에 올랐을 때 누구보다 강하게 부정했다. 협의를 풀겠다며 조사에 앞장섰고.

사령관이 명한 처우 개선 목록에도 역시 올란트가 끼어 있다.

첼 총집사가 군부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시찰한 곳이 감금실이었고, 거기에도 올란트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총집사의 눈동자 색과 올란트의 눈동자 색도 비슷했지?

“아니겠지만….”

이런 추측은 대개 망상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뭔가가 있다면?

유렐은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심각하게 대응하진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취미로, 가볍게 파볼 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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